[지역혼의 재발견–나주정신](5) 대신증권 창업자 양재봉, 신뢰 중시한 증권계 거목

2023-10-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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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하고 남보다 앞서 혁신 '큰 大 믿을 信' 실현

청년시절 10전 11기...DJ와 고교동창 '햇볕정책' 지지

 
양재봉 대신파이낸셜그룹 창업자
양재봉 대신파이낸셜그룹 창업자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 했다. 나주에서 태어난 송촌(松村) 양재봉(1925~2010)이 그랬다. 10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났다. 20살에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들어가 안정된 삶이 보장됐지만 뛰쳐나왔고 대한투자금융을 창업한 48살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격동기를 살았다. 그 기간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격동기였다. 일제에서 해방되고 건국 초기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이어 6·25 한국전쟁을 치렀다. 양재봉이 겪은 다난한 삶은 장차 대신증권을 키우며 우리나라 증권계 발전을 이끄는 밑거름이 된다. 그는 우리나라 ‘증권계의 선구자’로 불리며 거목(巨木)의 삶을 살았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믿음을 중요하게 여겼다. 새로운 세상에 맞춰 부단히 혁신하며 '대신증권 최초는 곧 증권업계 최초'라는 등식을 만들었다. 금융을 보는 안목과 감각이 탁월했다.
 
유창순·DJ와 절친
양재봉은 유창순 전 국무총리(1918~2010)와 1944년 조선은행 입사 동기다. 이후 50년 동안 친하게 지냈다. 유 전 총리는 그를 “매사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천성이 근면하고 성실했고 장차 거상(巨商)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다”고 평했다. 일찌감치 그의 성공을 예견했다. 양재봉이 단자, 증권, 보험업 등 금융업을 두루 섭렵해 성공했으니 예견은 적중했다. 유 전 총리는 한국은행에 상당기간 몸담고 있다가 관계와 정계, 재계를 거쳐 국무총리와 전경련 회장을 지냈다. 양재봉은 김대중 전 대통령(1924~2009)과 목포상고 동기동창이다. 1971년부터 4차례 대권 도전 끝에 1998년 2월 대통령에 당선된 DJ. 그는 신안에서 태어나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에 수석 입학했다.
양재봉은 “두뇌가 명석하고 학창시절 통솔력과 웅변 등 모든 면에서 출중했다”고 DJ를 평가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나로서는 그가 참으로 파란만장한 가시밭길을 걷다가 마침내 성공해 감격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되자 “친구인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양재봉은 그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대포나 대량 살상무기를 동원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싸우다 이 나라가 다시 폐허가 된다면 후세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물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증권 현판식 때 모습 오른쪽에서 두번째사진대신증권
대신증권 현판식 때 모습( 오른쪽에서 둘째).[사진=대신증권]
사업 실패해도 신용은 굳게 지켜
그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자. 양재봉은 조선은행을 나와 우여곡절 끝에 한국전쟁 직전 외자관리청(현 조달청) 목포부소장을 맡았다. 전쟁이 끝나자 석유저장공사 목포출장소장을 지냈다. 이어 식량공사(현재 농협) 간부를 거쳐 목포와 나주 일원의 쌀을 사서 부산에 내다 파는 미곡상을 했다.

또 의욕적으로 양조 사업을 했다. 하지만 지방의 재력가들이 이미 터를 잡고 있어 20대 청년에게 양조사업은 쉽지 않았다. 외상값을 받아내지 못해 빚에 몰렸고 주조장과 집을 팔아 모두 갚았다. 이때 그는 신용에 남다른 소신을 갖게 되고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양재봉은 30살 되던 해 전남대 상대를 졸업하고 다시 금융계로 발을 돌렸다. 조흥은행을 거쳐 한일은행 전신인 흥업은행에 들어간다. 월급쟁이에 안주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강원도 오지 근무를 자원했고 동양시멘트 등 기업고객과 대출 업무를 하며 돈의 흐름에 눈을 뜬다. 45살이던 1970년 초 한일은행 서울 청량리지점장이 된다. 부임 1년도 안 돼 예금액을 2배로, 1년 6개월 만에 4배로 늘려 능력을 인정받았다. ‘사채 동결 조치’가 내려진 1972년은 양재봉에게 또 다른 기회였다. 임대홍 미원그룹 회장, 박병규 해태제과 사장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이어 중보증권을 인수해 1975년 대신증권으로 이름을 바꿔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게 된다.
 
‘큰 대(大) 믿을 신(信)’
양재봉은 금융은 고객의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굳게 믿었다.
대신그룹을 창업하면서 회사 이름을 대신(大信)으로 결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1980년대 TV광고에서 ‘큰 大 믿을 信’을 강하게 부각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양재봉은 고객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믿음을 기반으로 고객과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재벌 위주의 경제구조에 의문을 품었다. 외형적으로 그럴듯한 기업군으로 결합된 기업이 아니라 기업 자체가 가진 독특한 탁월성, 전문성을 바탕으로 고객의 믿음을 얻고 안정적인 재무구조, 성장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9년 대신증권의 대표적인 광고문구 “남들이 자동차를 만들 때 우리는 자동차 주식을 연구했습니다”를 좋아했다. 백화점식이 아니라 증권전문, 금융전문기업이 되기를 바랐다.
 
대신송촌문화재단 현판식
대신송촌문화재단 현판식
멕시코 위기를 보고 IMF 대비
그는 변화하는 환경에 집념을 갖고 대응했다. 1995년 멕시코에 금융위기가 닥치자 그 여파로 우리나라 종합주가지수가 계속 떨어졌다. 당시 우리 정부와 언론들은 “우리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양재봉은 긴장했다. 회고록에 “그때 표현할 수 없는 직감적인 불안감을 느꼈다”고 적었다. 곧바로 증시 호황으로 느슨해진 회사의 경영상태를 점검했다. 국제펀드를 대폭 줄이고 동남아 투자를 제로 상태로 만들었다. 그 결과 800원선이던 외환이 1997년 IMF 직후 1900원대까지 치솟으며 일어난 금융대란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또 5000억원의 단기 차입금을 상환해 1998년에는 단기차입금이 전혀 없는 ‘완전 무차입’ 경영을 실현했다. 남보다 한 발 앞선 구조조정으로 IMF 구제금융 한파를 넘길 수 있었다. 오히려 2년 후 창사 이래 최고의 수익을 올려 증권업계 최고의 순수익을 기록했다. 당시 국내 경제는 최악이었다. 당시 5대 증권사였던 대신, 대우, 동서, 쌍용, LG증권 가운데 문을 닫거나 주인이 바뀌지 않은 곳은 대신증권이 유일하다.

양재봉은 부지런하고 검소했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근검(勤儉)정신을 좋아했다. 다산은 유배생활 18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두 아들에게 보낸 ‘유배지의 편지’에서 다산은 “나는 논밭을 너희들에게 남겨 줄만 한 벼슬을 못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주겠다. 너희는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근(勤), 검(儉)이다”라고 썼다. 양재봉은 다산을 본받아 평생 근검했고 이 두 가지를 집안을 다스리는 생활규범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한국증권업계 발전 이끌어
1977년 대신증권 사장에 취임한 지 4개월 만에 회사 영업부장이 금융사고를 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3년 동안 초야에 묻혀 와신상담 끝에 1981년 대신증권 사장으로 복귀한다. 돌아와 보니 대신증권은 자본잠식이 심각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증권업의 앞날을 낙관하고 미원 임대홍 회장이 갖고 있던 대신증권 주식을 인수해 최대주주가 되면서 회사를 안정시키고 다시 일으켰다. 1980년대 초 사회가 불안해 금리가 30%대로 치솟자 회사채를 매매해 큰 차익을 남겼다. 이후에는 기업공개와 회사채 발행시장을 이끌면서 많은 기업들을 상장시키고 자금조달을 주선해 한국증권업계 발전을 견인했다. 양재봉은 기세를 몰아 1984년 대신경제연구소를 열었다.

이어 1986년 대신개발금융을 시작으로 대신전산센터, 대신생명보험, 송촌문화재단, 대신인터내셔널유럽을 잇따라 설립해 대신종합금융그룹으로 몸집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양재봉은 남보다 앞서 늘 새로운 시도를 했다. 전산부문이 장차 증권회사의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보고 오래전부터 전산분야에 과감하게 투자해 온라인 증권거래 시대를 열었다. 또 업계 최초로 전산기를 도입하고 전광 시세판을 설치했다.

양재봉의 위기관리 능력은 탁월했다. 1990년대 말 펀드 열풍이 불자 증권사들은 너도나도 20%대의 고금리 회사채를 편입한 채권형 수익증권을 무차별 판매해 시중의 자금이 증권사로 몰렸다. 하지만 그는 위험성을 직감했다. 수익증권 판매를 중단시키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 취급하라고 지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우그룹이 부도 나고 수익증권을 판매한 증권사에 대규모 환매사태가 일어나 증권사들이 큰 손해를 봤다. 하지만 대신증권은 멀쩡했다. 오히려 모든 부실자산을 손실처리하며 투명경영에 나섰다. 투자가들이 크게 반겼고 대신증권은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으로 선정되는 계기가 됐다.
 
 
대신증권 본사
대신증권 본사
송촌문화재단 통해 공익사업
1999년 이래 온라인 증권거래가 폭발적으로 이뤄지면서 대신증권은 다시 중흥기를 맞는다. 하지만 양재봉은 2001년 회장직을 차남 양회문에게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1990년 설립한 대신송촌문화재단에서 사회공헌활동에 힘을 쏟았다. 평소 그는 ‘사회발전 없이는 기업발전도 없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사회가 조화롭고 균형 있게 발전하려면 기업은 이윤을 반드시 사회에 되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촌문화재단을 통해 이를 실천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연구여건이 열악한 학술단체에 연구비를 지원했다. 소외계층에 수술비를 대주고 소년소녀가장과 사회복지시설을 지원했다. 2007년 전남대학교총동문회는 그에게 ‘용봉인 영예대상’을 시상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기업이란 사회적 공기(公器)로 영속해야 한다고 믿었던 양재봉은 2010년 12월 9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그의 나이 85세.
 
손자 양홍석 경영권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 대신증권 새 회장이 된 양회문은 지병으로 2004년 타계했다. 그의 부인 이어룡이 뒤를 이었다. 이어룡 회장은 20년 동안 대신그룹을 이끌면서 증권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6월 대신증권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름을 ‘대신파이낸셜그룹’으로 바꾸고 10년 후 자기자본 10조원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글로벌사업과 투자확대 전략을 펴고 있다. 이어룡 회장은 지난 3월 아들 양홍석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올해 42살로 양재봉 창업주의 손자다. ‘혁신 경영’에 힘을 쏟고 있어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서적 : 대신금융그룹50년사(2012.대신증권),더불어 사는 인생(2001.양재봉) 중앙일보(2022) 아시아경제(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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