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로 재미보던 日, 유가상승으로 '날벼락'

2023-09-1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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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엔저로 과거 금융위기 때와 비슷한 수준 육박

휘발유 지원 대책 내놓았지만, 형평성에 반발 큰 상황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일본 정부가 난처하다. 산유국들의 감산으로 유가가 오름세를 보이는 데다가, 당국의 엔저 정책까지 더해져 휘발유 가격이 역대 최고를 찍었다. 유가를 잡으려면 엔저를 막아야 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 막 꿈틀대기 시작한 경제 활력을 잃어버린 30년 시절로 되돌릴 수 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셈이다. 

일본 정부가 고민 끝에 꺼내든 대책은 원유 보조금 지급이다. 원유 가격이 당장 하락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가운데 엔저 정책도 포기할 수 없으니 보조금 지급으로 해결책을 들고 나온 것이다.

문제는 원유 보조금 지급을 둘러싸고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은 원유 보조금 지급은 시장을 왜곡하고 납세자 사이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日 정부, 유가 급등에…보조금 지원 축소에서 증가로 선회
최근 일본 자원에너지청이 발표한 일반 휘발유 장외가격(전국평균)은 리터당 186.5엔(약 1670원)이다. 일본 휘발유 소매 가격은 지난주 2008년 기록한 최고점을 돌파한 뒤 연일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한국에 비하면 저렴한 수준이지만, 약 10여년 전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80엔(약 720원)에 거래됐던 점을 고려하면 큰 변화다. 

일본의 휘발유 가격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자, 정부가 발을 벗고 나섰다. 당초 6월부터 보조금 지원을 줄여 9월에 폐지하려고 했지만, 유가가 급격히 오르자 방향을 틀어 정책을 연장했다. 

7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날부터 휘발유 가격 지원 제도를 변경했다. 전주까지 휘발유 보조금이 리터당 9.7엔이었지만, 이날부터 17.4엔으로 1.7배가량 오른 것이다. 

일본 정부는 휘발유 가격의 기준점을 168엔과 185엔으로 잡았다. 168엔을 초과하면 185엔까지는 초과분의 30%를 지원하는 방식이고 185엔을 넘어서면 전액을 보조한다. 이를 통해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이 180엔을 넘지 않게 만들겠다는 취지다. 

10월도 이번 정책의 주요 변곡점이다. 일본 정부는 10월 5일 이후에 168엔부터 185엔까지의 보조율을 60%로 상향 조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추가 연장, 감산도 가능하다"고 언급해 원유 동향이 이를 따라갈 가능성이 있다. 공급 부족으로 연말 국제 유가가 오른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면서 연말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겨울철로 접어들수록 난방 수요가 증가하는 점도 고려됐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8월 여론의 뭇매를 맞고 급하게 휘발유 지원책을 추진했다. 8월 중순인 일본의 추석 오봉절을 앞두고 민심이 악화한 영향이다. 오봉절에 귀향하거나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휘발유 가격이 발목을 잡으면서 불만이 고조됐다.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는 '자차를 이용한 귀성은 사치가 된 건가', '오봉 귀성길에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걱정이 많다'는 말이 나왔다. 

기시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10월 중에 휘발유 가격을 리터당 175엔으로 만들고 싶다. 리터당 175엔은 지난해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직후 가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9월에는 휘발유 지원책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日 휘발유 급등, 원유 감산 아닌 엔저가 진짜 원인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의 감산 등 외부 요인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일본 정부의 엔저 정책이 휘발유 가격 상승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사실상 원유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엔저는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닛케이는 "이번 휘발유 가격 상승의 배경에는 엔저가 있다"며 "2008년 고점과 비교하면 이번 고점 국면은 엔화 약세 요인이 크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리먼 브라더스발 위기 직전인 2008년 7월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을 주목했다. 당시 WTI 선물 가격은 배럴당 147달러대에 육박했고 그해 8월 일본 휘발유 시중 가격은 리터당 185엔을 찍었다. 현재 WTI 선물 가격은 배럴당 88달러 안팎으로 당시보다 40%가량 낮지만 휘발유 시중 가격은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환율이 원인이다. 2008년 8월 1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10엔이었던 반면 현재는 1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47엔이다. 지난 15년 동안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약 25% 떨어졌다. 닛케이는 "엔저로 수입 가격이 상승하면서 휘발유 시중 가격이 다시 최고치에 근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가는 일본 사회 곳곳에 즉각적인 여파를 미쳤다. 원유는 가솔린 등 에너지뿐만 아니라 고무나 플라스틱의 원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의 물가가 날뛰면서 4%대 물가 상승률 진입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국제 에너지 시장 동향을 포함해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긴장하며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도 일본 정부는 엔저 정책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1990년대 중반 소비 감소로 인한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겪었던 만큼 저금리를 활용한 소비 촉진과 경제 성장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동시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가 높아 금리 상승 시 국채 이자 부담도 엔저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휘발유 지원 대책, 운전자만을 위한 불합리한 정책"
기시다 정부는 휘발유 지원 대책을 도입했지만,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시장을 왜곡하고 정부의 세수가 과도하게 많이 들어간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다른 국가들의 면세와 달리 정유사에 세금을 지원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일본 정계가 '면세 방식'을 병적으로 기피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유사는 휘발유 소매 가격을 줄여도 세금을 통해 영업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기에 정부는 이를 통해 가격을 낮추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금이 막대하게 들어가기에 시장에 재정이 과도하게 투입된다는 비판이 따른다. 이번 연료 증대로 시장의 자금 투여 상황은 6조엔(약 54조원) 이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닛케이는 "휘발유 보조금 지원은 산업계와 시민의 생활에 도움이 되겠지만 재정을 고려해야 한다. 가솔린 보조금에 국민 1인당 5만엔을 부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고로 정유사의 배를 불려준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일본 경제 전문지 다이아몬드는 "보조금 중 최소 110억엔(약 990억원)은 휘발유 가격 인상 억제 효과가 전혀 없었다"며 주유소 경영 개선에 사용되는 현실을 지적했다. 매체가 주요소 사업장 294곳에 조사한 결과 보조금을 휘발유 가격 상승 억제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업체가 23%에 이르렀다. 

시장주의자들은 고통스럽더라도 시장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격 상승에 따라 수요 감소가 일어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격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장 개입으로 원유 수요가 유지되면 가격이 내려가기 어렵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차량 이용자만 대상이 된다는 형평성 문제도 거론된다. 스즈키 슌이치 재무부 장관은 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차량 운송이 이뤄지는 점을 근거로 국민 전체의 편익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점점 커지고 있다. 

닛케이 에너지의 야마네 코유키 기자는 기자수첩을 통해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는 재정 지출이며, 저출산 대책 예산이 연간 3조엔(약 27조원)인 점을 고려하면 과도한 지출"이라고 꼬집었다. 히토쓰바시 대학 사토 모토히로 교수도 "차를 보유하지 않은 사람의 세금 부담이 차를 가진 사람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세금 부담과 사용이 괴리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일본 사회 휘발유 가격 폭등 문제를 탈탄소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사토 교수는 "전기 자동차 이용을 촉진하는 보조금 등 가솔린 사용을 억제하는 방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닛케이 신문도 사설을 통해 탈탄소 흐름에 역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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