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찬란한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Angkor Wat)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근현대사를 펼치면 지극히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1953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캄보디아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다. 실권을 거머쥔 노로돔 시아누크(1922~2012) 국왕은 중립 정책을 내세웠지만 베트남 전쟁(1960~1975)에서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 지역을 군사물자 보급 루트로 이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는 1970년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인해 축출되어 망명자 신세로 전락했다. 미국은 캄보디아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베트남 공산주의자 소탕을 명분으로 수년간 캄보디아 북부 지역을 맹폭했다. 이로 인해 죄 없는 캄보디아 양민 수십만 명이 희생된다. 소위 1차 '킬링필드'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 대부분 지역은 급진적 좌익 무장세력에 의해 공포와 죽움의 땅으로 변했다. '공산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던 폴 포트(Pol Pot)의 크메르 루주(Khmer Rouge)에 의해 저질러진 전대미문의 대량 학살로 전체 인구 중 25%인 200만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2차 '킬링필드'의 비극은 몇 세대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1993년 선포된 헌법은 입헌군주제 복귀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다당제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야권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 탄압으로 민주주의는 요원하고 국민들은 고질적인 부패와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38년간이나 집권했던 '스트롱맨' 훈 센(70)이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자신의 후계자로 키워온 장남 훈 마넷(45)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오랫동안 준비되고 예상된 시나리오의 권력 대물림이지만 앞으로 캄보디아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국제사회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지난 7월 총선에서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은 전체 125개 의석 중 120개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나머지 5석도 친정부 성향 정당(푼신펙) 몫이었다. 유력 야당인 캄보디아촛불당(CP)은 정당 등록 서류 미비를 이유로 출마 후보를 내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은 캄보디아 선거를 '가짜 선거'라고 지적하면서 선거 참관인 파견을 거부했다. 5년 전인 2018년 총선에서 CPP는 125석 전부를 독식했다.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이 강제 해산되고 야당 주요 인사들은 내란음모죄, 명예훼손 등 죄목으로 묶어 정치 참여를 차단했다. 훈 센의 정치적 라이벌인 삼 랭시 전 구국당 총재는 해외 망명 중이다. 또 다른 야권의 거물 껨 소카는 가택연금 중이다. 훈 센은 광범위한 반대파 숙청과 함께 장남 훈 마넷의 권력 승계를 위한 지도자 수업과 정비 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캄보디아 총리는 국왕이 의회 제1당의 추천을 받아 지명한다. 지난 22일 캄보디아 의회는 미국과 영국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훈 마넷을 새 총리로 선출했다. 의원 125명 가운데 123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 취임 연설에서 훈 마넷은 “오늘은 캄보디아 왕국에 매우 중요하고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자축했다. 또 캄보디아를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끌고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유지하고 개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훈 마넷의 새 내각엔 훈 센 가족과 측근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막내아들인 훈 마니는 공무부 장관, 조카사위인 넷 사보엔운이 부총리에 기용될 예정이라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강대국의 개입과 침략, 쿠데타, 그리고 내전으로 점철된 약소국가 캄보디아의 현대사에서 첫 평화적 정권 교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 대물림을 통한 훈씨 가문의 집권 연장이다. 이리하여 캄보디아는 북한과 시리아에 이어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세습 독재 국가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훈 센은 총리 재임기간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한 친한파로 알려져 있다. 한때 크메르 루주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던 훈 센은 1977년 폴 포트 세력의 만행에 실망해 부대를 이탈해 베트남으로 탈출해 망명했다. 1979년 1월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낸 뒤 세운 괴뢰 정부 하에서 훈 센은 승승장구하며 1985년 33세 젊은 나이에 총리에 올랐다. 1993년 유엔(UN) 주도 하에 치른 총선 이후 제2총리로 왕당파와 권력을 분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4년 후인 1997년 7월 쿠데타를 통해 연립정부 파트너를 축출하고 유일 총리가 되어 1인 체제를 구축했다. 그때 나이가 45세였다. 또 다음 해인 1998년에는 크메르 루주 잔당 지도자들과 협상을 통해 캄보디아에서 30년 동안 이어진 내전을 종식시켰다. 1997년 그는 친북 성향인 시아누크 국왕 등 왕당파 세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영삼 정권 당시 우리나라와 22년 만에 재수교를 맺었다.(한국과 캄보디아는 1970년 수교했으나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1975년 양국 외교 관계가 중단됐다.) 1997년 재수교 이후 힌국과 캄보디아는 여러 차례 정상외교를 포함해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 정권에 의해 참혹하게 파괴된 캄보디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는 구실로 정적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독재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2012년 사망한 후 그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를 꼭두각시 국왕으로 내세우고 실권을 장악했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정권 교체를 노릴 야당과 시민운동 그리고 독립적 언론은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에 사실상 절멸 상태다. 반면에 30여 년간 이어진 경제 발전과 정치적 안정은 오랫동안 캄보디아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캄보디아 경제는 최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의 지원과 투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영토 분쟁으로 중국과 껄끄러운 관계인 베트남이나 필리핀과 달리 훈 센은 미국과 유럽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의도적으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견지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중국을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로 칭하고 있어 동남아 지역에서 과거의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중국의 벽은 너무 높아 보인다. 서방 언론은 중국이 최근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해군기지를 완공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해당 기지에 대해 중국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상왕 정치
훈 센이 총리직을 떠났지만 캄보디아 국내 정치와 친중국 외교 스탠스는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당 대표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정치 무대를 떠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2월부터 상원의장 자리를 2033년까지 맡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즉, 자신의 나이 80까지는 국정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소위 '상왕정치'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정치사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최고 권력에 오른 아버지와 달리 훈 마넷은 차분하게 다듬어진 일정에 따라 총리에 올랐다. 그는 비교적 온화한 성품과 개방적이며 서구적 매너로 캄보디아 젊은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훈 센이 1977년 크메르 루주 부대를 이탈해 베트남으로 망명한 뒤 약 4개월 만에 태어났다. 18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캄보디아인 최초로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뉴욕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2008년 브리스톨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군 요직을 두루 걸친 뒤 올해 초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새 내각은 아들을 따르는 젊은 측근 인사들 위주로 구성됐다. 훈 센은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고위층 권력층 자제들에게도 장관 자리 등 고위직을 약속했다. 향후 권력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구세대 정치인들의 권력다툼을 방지하고 아들을 중심으로 대를 이은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숨은 전략이다.
권력의 대물림과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서방국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새 총리 훈 마넷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데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온하다. 또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뿌리 깊은 정경유착, 정실인사와 족벌정치 등을 아들이 청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극소수다. 또 빈부격차 해소나 부패 척결을 위해 새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이라는 공약도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오랜 기간 미국 유학을 했다고 해서 새 총리가 친미 성향을 보인다거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서방세계의 요구를 수용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서구로 유학을 다녀온 후 권력을 물려받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바사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잔혹한 독재 정치를 보면 훈 마넷도 그들과 크게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다. 특히 '상왕'인 훈 센은 만약 아들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면 언제든지 자신이 돌아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아버지와 다른 목소리를 내야 국제 무대에서 실세 총리로 인정받겠지만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큰 모험이다. 현재 그에게 아버지는 든든한 버팀목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존재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