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잼버리 대회 파행(跛行).’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한 말 중 하나가 바로 '파행(跛行)'이다. ‘절뚝거리며 걷는다’는 뜻인 파행은 일이나 계획 따위가 순조롭지 못하고 이상하게 진행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절름발이 파(跛)자를 썼다. 장애 차별어인 ‘절름발이 국회’라는 말은 많이 사라졌지만 파행은 아직도 빈번하게 사용된다.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한글문화연대에서 열린 좌담회에는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효은 중학교 국어교사,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함께했다.
차별어를 쓰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차별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김 원장은 “차별어란 사회적 약자 또는 특정 대상을 직간접으로 부정하고 무시 또는 경멸하거나 공격하는 단어·구·문장 등 언어 표현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김 원장은 차별어를 △노골적 차별어 △비대칭 차별어 △관습적 차별어 △다의적 차별어로 분류했다. ‘노골적 차별어’는 차별 의도가 언어 형식이나 내용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나 누구나 차별어로 인식하는 비속어나 혐오 표현을 말한다. 차별 의도가 명백하고 그것이 언어의 형식과 내용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비어나 속어, 모욕어, 직접적 언어폭력에 해당하는 어휘들이 여기에 속한다.
‘비대칭 차별어’는 표현 자체는 차별을 담고 있지 않지만 다른 어휘와 관계되면서 차별의 특성을 드러낸다. 여의사, 여류 작가, 여기자, 남간호사 등이 있다. ‘관습적 차별어’는 ‘미망인’ ‘집사람’처럼 역사적으로 또는 사회적 관습으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 차별어로 보통은 차별어인지 모르고 쓸 때가 많다.
‘다의적 차별어’는 비차별적 의미와 차별적 의미가 함께 있는 다의어로 특정 맥락에서 차별어로 규정되는 어휘들이다. 특정 맥락에 따라 차별어인지 아닌지 판별되는 맥락 의존성이 강한 어휘들로 발화 주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썼느냐가 중요하다.
신 교수는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차별로 ‘나이 차별’을 꼽았다.
한국 사회는 나이가 큰 권력으로 작용하는 사회라고 설명한 신 교수는 “이면에는 한국어가 숨어 있다. 한국어는 나이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높임법’이라는 문법을 통해 드러낸다”고 말했다. 한국어 높임법에서 존댓말과 반말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은 나이다.
◆ 차별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와 대안은
사회 전체가 한꺼번에 바뀌기는 어렵다. 차별어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신 교수는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있어서 나이 차별은 언어를 통해 학습되고 언어 사용으로 강화되며 일상화하는 특징을 갖는다”며 “일상화된 차별은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어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짚었다.
‘나이 차별’은 모두가 기득권자이자 피해자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구나 더 큰 기득권을 갖게 된다는 특징도 있기 때문에 사라지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개개인의 ‘차별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언어 교육이 중요하다.
경기도에 있는 한 공립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신 교사는 2021년 ‘차별어 좌담회’ 당시 학생 270명(1학년 120명·2학년 30명·3학년 120명)을 대상으로 ‘차별어 및 혐오표현 사용 실태’에 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한 학생은 “평소 많이 쓰는 단어에 차별이나 혐오의 의미가 담겨 있는 걸 몰랐는데 충격적이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라도 쓰지 말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뜻을 알고 쓰냐는 말을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신 교사는 올해에는 20~60대 보호자 80명을 대상으로 ‘차별어 및 혐오표현 인식 조사’를 진행했다.
‘차별어 인식 조사’에 참여한 40대 보호자는 “차별어의 의미를 계속 상기시켜주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용하게 되었는지, 가치와 문화 의식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 의미를 알아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 교사는 “학생에게 차별어 수업을 하거나 학부모 대상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때 하기 전과 후 차이가 천지 차이”라며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 말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알고 난 이후에 사용하지 않으려 애쓰는 변화가 즉각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차별어 민감성’을 높이는 국어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차별어가 국어 교육과정에 반영됐으면 좋겠다. 교과서를 만들 때도 유의해야 할 부분”이라고 짚었다.
언어는 사회문제를 푸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신 교수는 “나이로 인간의 서열이 정해지면 토론이 되지 않아 세대 간 갈등이 심해질 수 있다”며 “친한 관계에서는 평어, 모르는 사이는 존댓말을 쓰자”고 주장했다. 평어는 반말을 하되 상대를 이름 혹은 ‘너’라고 부르는 표현법이다.
좌담회 참가자들은 세상을 조금씩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담는 도구인 말이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 원장은 “처음에는 환경 미화원이라고 말만 바꾸는 게 무슨 의미냐는 반응이 있었지만 말이 바뀐 게 처우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말을 바꾸는 것은 차별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