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표트르인(Petrovian)이라고 해야 한다. 러시아는 표트르의 땅(Petrovia)이다.”
표트르는 1682년, 10세 나이로 로마노프왕조의 공동왕좌에 올랐지만 야심만만한 25세 이복누이 소피아의 섭정하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병립(竝立)정권으로 남매가 통치권을 놓고 갈등을 벌인 치열한 권력투쟁중 소피아의 쿠데타를 역습, 승리한 표트르는 타고난 명민함과 열정으로 모스크바대공국을 세계열강 ‘제정 러시아’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17세기 후반 차르와 보야르(봉건 귀족)의 권력투쟁, 교회와 국가 간 갈등,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변방국가 러시아의 기존 질서를 파괴, 혁신을 일으켜 유럽의 열강으로 개혁했다. 낡고 오래된 러시아가 한 사람 ‘표트르의 등장’으로 반세기도 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국가로 떠오른 것이다. 러시아 역사를 축약한다면,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와 표트르 대제 이후의 새로운 러시아로 구분할 정도다.
‘표트르 대제’ 꿈꾸는 푸틴의 열망이 일으킨 전쟁
전제군주 표트르는 2m가 넘는 장신(長身)이었다. 그는 왕위를 이복누이 소피아에게 맡긴 후, 선진기술을 익히기 위해 250명의 서유럽 방문사절단을 조직했다. 표트르는 스스로 하사 신분으로 위장해 프로이센에서 대포 제조술을 익혔고, 네덜란드에서는 조선기술을 배웠다. 영국에서 수학 기하학 응용과학까지 배운 그는 6개국을 거쳐 18개월 만에 귀국, 1696년 누이를 축출하고, 명실공히 전권을 장악했다. 대개혁에 나선 그는 야만의 동토 러시아를 경영용어를 빌리자면 리모델링(개조) 아닌 리스트럭처링(개혁), 리엔지니어링(혁신)해 새로운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당시 해군력이 없던 러시아는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不凍港)을 얻으려면 남쪽으로 터키가 버티고 있는 흑해, 서쪽으로는 당시 군사 강국이었던 스웨덴이 통제하는 발트해로 진출해야 했다. 1696년 인구 1400만 러시아의 표트르는 러시아 최초로 해군을 창설했고 30만 대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당시 흑해 방면을 틀어쥐고 있던 오스만제국, 발트해의 맹주였던 스웨덴과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 당시 표트르가 창설한 러시아 해군은 이후 200여년 위세를 떨쳤고, 20세기 초반 ‘해상의 왕자’로 군림했던 영국해군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군비확장을 끝낸 표트르는 1695년 아조프(Azov) 원정으로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1696년 7월 해군 지원에 힘입어 오스만제국 장악지역이던 흑해 연안의 아조프 요새 공략에 성공했다. 그는 첫 성과를 거뒀지만, 더 강력한 해군 양성을 위해 전국에서 인재 50여 명을 선발해 서유럽에서 항해 기술을 배우도록 특별 유학을 보냈고, 1697년에는 200명이 넘는 규모의 대사절단을 서유럽으로 파견, 인재를 양성했다.
‘나라를 부하게 하며 군대를 강화’시키는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이 살길이라는 법가(法家)사상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강화, 1700년 8월 발트해로 진출해 이후 20년 동안 지속한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을 전개했다. 17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서는 패하였지만, 표트르는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침공하였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을 침략해 승리했다. 1721년 북방 전쟁에 승리, 8월 30일 니시타트 평화조약 체결로 발트해 연안을 획득하고, 이듬해 페르시아에 원정하여 카스피해 서안을 합병하였다. 스웨덴을 정복,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동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사실상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다. 인그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랸디야, 리플랸디야 지역 등 러시아 북부와 발트 해 연안지역을 병합함으로써 발트해로의 ‘전략적 출구’를 확보해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교회의 종까지 녹여 대포를 만들 정도로 국방력을 강화, 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책략을 지닌 표트르는 새로운 국가의 틀 속에 유럽 문화를 주입, 행정·산업·상업·기술·문화·교육도 개혁했다. 그는 학교건립·해외 유학·문자개량·신문창간·새 수도건설 등 서유럽식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개혁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처럼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낡은 법률과 미비한 제도 등 국가체제를 완전히 바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제정 러시아는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한것이다.
특히 그는 불모지였던 늪지대를 메워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거대 도시를 건설, 모스크바에서 천도(遷都)했다. 수도 이전이라는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무리하게 진행된 토목공사와 철권통치에 저항한 민중반란 진압과정에서 10여만 명을 살상했다. 급진적 개혁을 반대하는 투쟁을 피의 숙청으로 진압한 그는 전제주의적 절대주의 체제를 구축, 당시 서유럽에서 퍼지고 있던 시민 계급 성장도 방해했다.
그러나 독재자 표트르가 강력한 통치력으로 추진한 국가개혁 덕분에 러시아는 중세적인 후진국에서 벗어나 근대적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철권통치의 수수께끼와 같은 괴력을 발휘하며 40년 가까이 국가개혁을 통해, 문명화된 강대국의 성장 기반을 마련한 표트르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1721년 10월 원로원에 의해 로마 초대 황제인 카이사르(시저)에서 따온 명칭인 황제(차르:Tsar)로 추대됐다. 역사가들로부터는 ‘대제(大帝:the Great)’를 뜻하는 표트르 대제(Pyotr Veliky)’ 칭호를 받았다.
레닌 동상이 헐린 현재도 모스크바에 30m 높이의 위용(偉容)을 자랑하는 표트르 대제 동상은 ‘역사는 흔히 그런 무자비한 악당을 통해 한 걸음씩 전진한다’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집무실에 표트르 초상화를 걸어놓고 기회 있을 때마다 영토 확장 등 그의 치적을 꺼내며 그와 ‘영혼 대화’를 한다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21세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영토확장을 통해 ‘강대국 러시아의 원형’를 창조한 표트르가 되기를 열망하는 푸틴의 열망이 “우크라이나 땅은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는 침공 당위성의 배경이 되고 있다.
표트르, “한 마디(寸)를 탐내면 한 마디를, 한 자(尺)를 탐내면 한 자를…”
‘위대한 황제’라는 표트르는 사악하고 기괴한 성품의 군주였다. 자신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명을 비정하게 살해했다. 심지어 자기 외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표트로비치가 반란에 가담했다며 고문하고 사형까지 선고, 반개혁세력 제거에 활용할 정도였다. 제정 러시아의 토대를 구축한 위대한 지도자이면서 이반 뇌제(雷帝)나 스탈린보다 더 가혹한 희대의 폭군이었다. 53세에 요로결석 합병증으로 숨진 그는 “하느님께서 제 죄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는 유언을 남겼다. 러시아 역사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표트르는 발군(拔群)의 치적으로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성공한 개혁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발트해와 흑해 연안의 땅은 러시아가 반드시 날마다 조금씩 잠식(蠶食)해야 한다. 한마디(寸)를 탐내면 한 마디를 갖게 되고 한 자(尺)를 탐내면 한 자를 갖게 된다. 그치는 곳이 없으면 끝나는 때도 없다.”
(『역주 옥중 잡기』, 우남 이승만 전집 6권,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p.108. 2022.10.7.)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안(懸案)이 된 요즈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백여 년 전에 주목한 ‘피터대제의 유언’은 러시아의 대외정책의 특징인 ‘무한한 영토욕’을 증명하는 상징적 자료다. 유언은 구한말 패권국 러시아의 영토 야욕을 경계해 일본이 퍼뜨린 공로주의(恐露主義)의 한 단면으로, 이승만을 비롯한 공로주의자(恐露主義者)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경계하게 했다. 이승만은 한문으로 번역된 이 문건을 1910년에 한글로 출판한 『독립정신』의 ‘아라사(俄羅斯) 정치 내력’이라는 장(章)에서 아래와 같이 약술했다.
“…1672년에 대피득(표트르 대제)이라 하는 인군이 평생에 각국을 병탄할 욕심이 있어 사방으로 토지를 널리 확장하고 마침내 장생(長生)할 계책이 없어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줄 먼저 생각한지라. 미리 열네 조목 유언(遺言)을 지어 깊이 간수하고 그 후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유전하며 비밀히 감추고 형편을 따라 본떠 행하라 하였나니, 그 중 대지가 강한 나라와 먼저 합하여 작은 나라를 나누어 없이하고, 그 후에는 틈을 타서 그 나라를 마저 쳐 없이하며 자유하는 나라에는 혼인을 통하거나 달리 결련(結連)하여 먼저 내정을 간섭하여 권리를 주장하라.
모든 이런 궤휼(詭誘)·간교(奸巧)한 계책의 뜻이 가장 음험한지라, 그 후로 누대(累代) 인군되는 이들이 다 준행하여 효험이 많더니 근래에 이르러 그 글이 발각되어 세상에 드러남에 그 ‘무한한 욕심’을 알고 각국이 크게 두려워하여 사람마다 전파하여 하나도 모르는 자 없도록 만들며 구라파주(유럽)에 모든 나라가 아라사(러시아)의 세력을 막기로 제일 긴급한 문제로 삼지 않는 자가 없는지라…”
20대 후반의 청년 이승만이 반역죄로 5년 7개월 감옥 생활 중 한문으로 필사한 ‘러시아 피터대제의 고명’(俄彼得大帝 顧命) 요지는 슬라브족의 뿌리 깊은 영토적 야심을 보여준다.(우남 이승만 전집 6권 : 역주 옥중잡기) 이 문건은 ‘표트르 1세’가 임종 전에 남긴 부탁의 말, 즉 유언장(遺言狀)이다. 이승만은 “재위 중에 서거하자 뒤를 이은 각 황제가 고명(顧命, 유언)을 상전(相傳)하여 버리지 않았다…. 1896년 겨울에 이르러 미국 대례상(大禮相, 미상) 보관인(報館人, 신문기자)이 진본 14조를 찾아냈다.”라고 기록했다. 이 문건은 1948년, 진본이 존재하지 않는 위서(僞書)로 판명 났다.(Dimitry V. Lehovich, "The Testament of Peter the Great", American Slavic and East European Review, 7(2): 111-124, Apr, 1948).
류석춘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건은 러시아가 팽창정책을 펼칠 때마다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19세기 중반 크림전쟁으로 불리는 1차 동방전쟁(1853-56), 터키와의 전쟁인 2차 동방전쟁 (1877-78), 그리고 1차 세계대전 (1914 - 1918) 등이 그 예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라 불리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오늘날은 과연 표트르 대제의 고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일까.”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옥중잡기’ 중 ‘러시아 피터 대제의 유언’과 우크라 전쟁,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자유일보, 2022.3.13)
러시아는 국토면적이 1,712만 ㎢에 동서 간 거리가 9600k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다. 총 11개의 시간대가 존재할 정도로 광대한 러시아는 우리나라 면적의 170여 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탐욕스러운 영토 확장 야심은 피터대제 이후 푸틴에 이르기까지 범슬라브주의, 유라시아이즘 등 명칭을 바꿔가며 그치지 않고 있다.
미 CIA에서 제공하는 The World Fact book(‘23) 통계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다시 말해 지표면적의 7분의 1인 러시아는 미국의 1.8배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임에도 푸틴이 집무실에 표트르 대제 초상화를 걸어놓고 그의 고명인 영토 확장을 다짐하는 한,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로 강대국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머리이며, 키예프는 어머니이다”는 슬라브 속담대로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땅이라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선택은 영원히 반복될 숙명을 안고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머리이며, 키예프는 어머니이다”
우크라이나는 어찌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