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은행위기에 日 저축·채권 신화 산산조각

2023-03-2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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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비즈니스 리뷰

인플레에 예·적금 본전도 못 찾아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시작된 은행 부문의 혼란이 아시아 시장을 뒤흔들었다. 지난 한 주간 일본 3대 은행의 시가총액이 200억 달러 이상 증발하는 등 일본 은행들은 위기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잃어버린 30년’ 동안 이어져 온 저금리·저성장 속에서 당연시돼 온 채권과 저축 위주의 투자 전략이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은행 위기 전염에 흔들리고 있다.
 
SVB 붕괴에 중국보다 일본이 더 휘청
SVB발(發) 위기는 중국 은행보다 일본 은행에 더 큰 타격을 입혔다. 22일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미쓰비시 UFJ 파이낸셜 그룹, 스미토모 미쓰이 파이낸셜그룹,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 등 일본 3대 은행의 주가는 지난주에 각각 10~12% 급락해 총 202억7000만 달러(약 26조5000억원)에 달하는 시총이 증발했다. 같은 기간 아시아 11개국(중국과 일본 제외) 40개 주요 은행들의 시총은 120억 달러가 사라졌다.

이는 중국 4대 국영은행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중국공상은행(ICBC), 중국은행(BOC), 중국건설은행(CCB), 중국농업은행(ABC) 등 4대 은행의 주가는 중국 본토 및 홍콩 증시에서 3~5% 오르며 시총이 300억 달러나 늘었다.
 
닛케이아시아는 “아시아 양대 경제 대국 금융그룹의 상반된 운명은 지난 10일 발생한 SVB 파산으로 촉발된 은행 위기의 성격에서 비롯된다”며 국채 등 만기보유증권을 대량 보유한 은행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이 커졌다고 짚었다.
 
SVB는 유가 증권 대부분을 잔존 만기 10년 이상의 장기 상품 등 만기보유증권에 투자했고, 이로 인해 금리 상승에 따른 자산의 시장 가격 변화가 은행 실적에 반영되지 않았다. 통상 국채 등 만기보유증권은 만기 때까지 보유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해당 시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미실현 손실로 잡힌다.
 
SVB는 소수의 스타트업들로부터 거액의 예금을 모아 만기보유증권에 투자했다. 이런 자산들은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무서운 속도로 가치가 쪼그라들었다. 문제는 SVB의 주고객인 스타트업들이 금리 인상에 따른 비용 상승과 투자 감소에 따른 자금난에 시달리며 예금을 대량으로 인출했다는 점이다. 예금 인출에 직면한 SVB는 지난해 말 기준 자산 2118억 달러 가운데 약 43%에 달하는 만기보유증권을 손실을 감내하고서라도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해당 사실이 대중에 공개되면서 뱅크런에 불이 붙었다.

SVB의 붕괴는 세계 글로벌 금융시장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스위스 은행 UBS는 SVB 사태 여파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지난 20일 아시아 증권 시장 개장 직전에 크레디트스위스를 32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번 SVB발 혼란은 채권 의존도가 큰 일본 은행에 부담을 줬다. 닛케이아시아는 “일본 은행들은 금리 상승에 민감하기 때문에 위험에 더 노출됐다”며 “지난 수십 년간 거의 제로에 가까운 성장으로 인해 대출 수요가 급감하자, 일본 은행들은 채권을 쌓는 데 집중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소규모 대출 기관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모습”이라며 “경제 성장이 사실상 멈춘 상태에서 중앙은행은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하는 식으로 대응했다”고 덧붙였다.

요시자와 료지 S&P 글로벌 금융기관 등급 담당 선임이사는 "일반적으로 일본의 소규모 은행들은 지역 경제의 대출 수요가 약해지면서 채권 투자를 늘렸다"며 "금리 변동성이 커질수록 소규모 은행들의 건전성은 더 취약해진다"고 말했다.
 
반면, 대출 위주의 사업에 집중한 중국 은행권은 금리 상승으로 이익을 볼 수 있다.

중국이 이미 한 차례 뱅크런 홍역을 겪어, 이번 위기에서 다소 강한 모습을 보였다는 분석도 있다. 컨설팅 업체 로디움그룹의 부이사인 앨런 펑은 중국이 지난해 11월에 SVB와 유사한 사태를 겪었다고 봤다. 당시 제로 코로나 폐기로 중국 주식 시장이 활황세를 보이자, 채권 시장에 묶여 있던 자금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면서 중국 채권 시장은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특히 채권 가격 하락에 직면한 투자자들이 약 3조 위안(약 4400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관리상품(WMP) 환매에 나서면서, 채권 시장 침체는 더 깊어졌다. 펑 부이사는 “중국 WMP 사태는 SVB 사태와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중국은 은행 파산 없이 채권 시장 돈맥 경화 사태를 견뎌냈다.   
 
아시아 보험사들의 실적도 금리 상승에 직격탄을 맞았다. AIA는 지난해 투자수익률이 급락해 순이익이 전년 대비 96.2% 급감했다. 중국 핑안보험 역시 지난해 보험사업 부문의 투자수익이 전년 대비 29.3% 위축됐다.
 
다만, 전문가들은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발생한 은행 위기가 아시아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본다. 프란시스 챈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애널리스트는 “폭풍이 일시적으로 끝나면서 투자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며 “아시아의 금융주 대부분은 다양한 지표에서 탄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SVB에서 발생한 종류의 뱅크런이나 채권 손실에 직면할 가능성은 없다”고 예상했다. 이어 “아울러 아시아 지역의 대형 금융사들 중에는 크레디트스위스처럼 신뢰 위기를 겪는 곳은 없다”고 덧붙였다.
 
인플레에 예·적금 본전도 못 찾아
인플레이션에 일본 금융권을 지탱해 온 저축 신화마저 산산조각 났다.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시기에는 나름 성공적이었던 예·적금이 인플레이션 속에서는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해서다. 
 
예금 구매력, 즉 예금 금리에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평균 이자율은 지난해 마이너스(-) 4%에 달했다. 이는 석유 파동으로 물가가 급등했던 1974년 이후 최저치로, 예금으로는 본전도 못 찾는 셈이다.
 
특히 일본 가계 금융 자산에서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54%에 달한다. 유럽(35%)이나 미국(14%)에 비해 압도적으로 비중이 크다. 일본 가계의 금융 자산이 인플레이션에 취약하다는 점을 뜻한다.
 
일본의 1월 CPI는 전년 동월 대비 4.3%나 상승했다. 0.02%에 불과한 1년 만기 정기예금 이자가 인플레이션에 따른 치솟는 생활비를 따라잡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일본인들은 저축이 아닌 다른 금융 상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후쿠다 다케시 파이낸셜 스탠더드 대표는 “최근 몇 달간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운용 상담이 급증했다”며 “2월 상담 건수는 전년 동월 대비 30%나 늘었다”고 말했다. 이어 “2% 물가 상승률을 전제로 30~50대 고객에는 글로벌 주식을, 60세 이상 고객에게는 고배당주를 추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예금 금리가 거의 제로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물가가 하락하자, 예·적금 구매력은 오히려 강해졌다. 더구나 주식 시장이 거품이 최고조에 달하던 1989년에 고점을 찍고 붕괴한 뒤 오랜 기간 정체되자, 저축이 자산 관리의 정답으로 통했다고 닛케이신문은 짚었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은행채 등 상품에 투자하는 원금보장형 펀드가 1000억엔 이상을 끌어들이는 등 이제 일본 투자자들은 위험 감수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도 소액 투자자를 위한 비과세제도(NISA) 확대를 결정하는 등 저축에서 투자로 전환하기 위한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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