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제왕학] 비수를 가슴에 품고 천하 평정한 '시따따"

2022-12-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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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3부작- (3)

[박종렬 논설고문]


마오쩌둥(1세대:1893∼1976), 덩샤오핑(2세대:1904∼1997)에 이어 중국의 3세대 지도자인 장쩌민 전 주석(1926~2022)이 지난달 30일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 전 주석은 퇴임 이후에도 4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1942~) 시대까지 중국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시진핑 체제를 출범시켰지만, 2018년 시진핑 1인 체제가 굳어진 뒤부터 정적(政敵)관계로 바뀌었다. 시 체제를 탄생시킨 4세대 지도자 후진타오도 20차 당 대회 현장에서 강제 퇴장당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시 주석을 견제해온 전직 국가 원수 등 원로들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시진핑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시 주석의 집권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2007년 무명의 저장성 당 위원회 서기에서 몇 단계를 뛰어넘어 미래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5년 뒤, 2012년 제18차 전국대표대회와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당 총서기뿐 아니라 당 중앙군사위 주석에 올랐다. 2012년 당시만 해도 최고 권좌를 둘러싼 권력투쟁 과정에서 시진핑의 존재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중앙정치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인 흔적도 없다. 시진핑은 야망을 품고 공청단과 태자당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어부지리(漁夫之利) 전략으로 임했다. 시진핑의 최고 권력자 등극 과정은, 자신의 노력보다는 장쩌민과 후진타오, 두 세력의 치열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얻은 어부지리였던 셈이다.
당시 후계 구도를 놓고 전직 장 주석과 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당), 두 파벌은 생사를 건 암투를 벌였다. 공청단 출신 후 주석은 후계자로 친동생처럼 여기던 최측근 리커창(李克强, 1955~ )을 내세웠다. 길가는 차들의 번호를 순간적으로 외운 뒤 오차 없이 기억할 정도로 우수한 베이징대 출신 리커창은 대학 시절, 영어로 된 법학 서적들을 번역하고 공청단에 가입, 44세로 최연소 성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심지어 시진핑보다도 5년 빨리 중앙위원회에 입성해 후 주석의 후계자로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그러자 당시 86세의 장쩌민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이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 리커창 부총리 등 ‘사대천왕(四大天王)’으로 불리던 리위안차오(李源潮) 당 중앙조직부장,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 등과 치열한 차세대 지도자 경쟁을 벌인 시진핑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졌으나 2007년 상하이 서기로 깜짝 발탁,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며 기류가 달라진다. 같은 해 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서열 6위의 국가부주석과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맡고, 리커창은 서열 7위의 국무원 상무부총리를 맡아 후계 구도에서 시진핑의 우위가 확정된다. 이는 리커창의 총서기 등극만큼은 막으려는 상하이방의 적극적인 반대와 모두가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시진핑을 중재안으로 제시한 쩡칭훙(曾慶紅:1939~)의 배려 때문이었다. 시진핑의 초등학교 선배로 14살 위인 쩡은 태자당(당·정·군·재계 고위층 인사들의 자녀) 맏형이면서 장쩌민 심복으로 상하이방과 연결돼 시진핑의 킹메이커 역할을 한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소속(소장)의 국민적 스타인 부인 펑리위안(彭麗媛:1962~)의 막강한 군부 인맥 등 거미줄처럼 얽힌 인맥도 시진핑이 황태자로 부상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됐다. 2010년 시진핑이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지명되면서 후계자 경쟁은 막을 내렸다.

결국, 시진핑 부주석의 낙점은 카리스마나 특출함이 아닌 무색무취함이었다. 서로에게 거부감 없는 ‘무난한 인물’을 선택한, 계파 갈등의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공청단과 상하이방 두 세력의 권력투쟁으로 태자당의 시진핑이 승리, 2013년 3월, 후진타오 뒤를 이어 제7대 중국 국가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두 파벌의 ‘10년 대란’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문득 결말에 도달해보니, 보시라이로부터 아두(阿斗)라는 비아냥을 듣던 시진핑 홀로 황제대관식을 치르게 된 셈이다. 아두는 아둔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된 유비(劉備)의 아들이다.
 
시진핑은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취임, 이듬해 8월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 선전 사상 공작 회의에서 당 간부들에게 독서와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근대 중국의 대철학자이자 선통제 스승이었던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가 설파한 ‘인생삼경계(人生三境界)’를 인용, ‘맥연회수’를 언급한다.
 
‘…고금의 위인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인생의 3경계를 거쳤다. 제1경계는 ‘망진천애(望盡天涯:목표를 분명히 하고 실천 전략을 세운다)’, 제2경계는 ‘의대점관(衣帶漸寬:식음을 전폐하고 잠을 설치면서도 목표에 매진한다)’, 제3경계는 ‘맥연회수(驀然回首:천신만고 노력 끝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는 경지)…’
 
시진핑은 왕궈웨이가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3경계의 개념을 서술한 다음의 시구가 ‘원대한 이상을 꿈꾸며 어려움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자신의 인생 역정과 닮았음을 암시했다.
 
“간밤에 서풍이 심하게 불더니만/푸른 나무들이 다 시들어버렸네/나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저 하늘 끝까지 펼쳐진 가없는 길을 바라보네(망진천애·望盡天涯).”(제1경지)
“바지 끈이 점점 헐렁해져도(의대점관·衣帶漸寬)/끝내 나는 후회하지 않으리/그대를 위한 것이라면/내 몸 하나 초췌해진들 그 무엇이 걱정이랴.”(제2경지)
“길거리에 밀려 넘치는 사람 속에서/수천 수백 번 그녀를 찾아 헤매었지/불현듯 무심히 고개 돌려 쳐다보니(맥연회수·驀然回首)/등불이 희물그레 꺼져가는 난간 곁에/찾으려는 바로 그 여인, 서 있지 아니한가!”(제3경지) <도올, 시진핑을 말하다>
 
시진핑은 대학 졸업 후 3년간 중앙군사위에 근무했던 것을 빼면, 82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25년간 지방을 전전하며 시골동네 현 서기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승진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공직자 생활을 했다. 리커창 등 다른 파워 엘리트와 달리 시진핑은 중앙 정계의 주목도 끌지 못했으며 처음부터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노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어느 순간 대권을 향한 질주를 의식했겠지만, 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과정은 일종의 ‘맥연회수’였다.

남송의 사인(詞人)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의 ‘청옥안’이란 시에 빗대 묘사한 제3의 경계인 ‘등불이 희물그레 꺼져가는 난간 곁에/찾으려는 바로 그 여인, 서 있지 아니한가!’처럼, 그야말로 ‘문득 고개 돌려 쳐다보니 권력의 정상에 올라있었다’라는 것이다.
 
대지약우(大智若愚)와  난득호도(難得糊塗)로 정적 제거
 
시진핑이 노자 가르침대로 ‘드러내지 않아도 알려지며(不見而名), 뭘 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어진(不爲而成)’ 것처럼 삶의 우연적 계기들이 작동, ‘무위에 이르면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이룬 것과 같다(無爲而 無不爲). 하는 것이 없기에 아니 하는 것이 없다’처럼 어느 날 일어나보니 천하를 품었다는 얘기다. 이는 ‘자기를 숨기는 지혜’인 노자의 대지약우(大智若愚)와 위대한 승자들의 비법인 후안흑심(厚顔黑心)인 ‘난득호도(難得糊塗)’에 맥이 닿아 있다. ‘교활하고, 뻔뻔하고, 음흉하며, 잔인하기까지 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내고 내 뜻을 이루는 창과 방패’라는 후안흑심으로 무장하는것이야말로 제왕학(帝王學)의 요체(要諦)이다. 난득호도는 ‘총명하기는 어렵고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기는 더욱 어렵다’라는 뜻이다.

시진핑 아버지를 복권시킨 덩샤오핑은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국내적으로는 천안문 사태와 개혁개방 반대, 대외적으로는 동구권 붕괴 후 서방의 위협 등 국내외 도전 속에서 체제 안정을 지키면서 대외문제 처리 기준으로 공산당 내부에 도광양회 28자 방침을 제시했다.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누구를 두려워하지도 말라. 누구에게든 죄를 짓지 말고, 친구를 사귀되 나름의 계산하고 사귀라. 도광양회하면서 머리를 절대로 들지 말라. 절대로 깃발을 흔들며 나서지 말고, 지나친 말을 하지 말라. 지나친 일도 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경제건설에 매진하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해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유훈인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절대로 머리를 쳐들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국가전략만이 아니라 인생에도 귀감으로 삼았고, 마침내 극상의 권좌에 올랐다. 마음을 비우고 때를 기다리며 천하를 도모한 시진핑은 역사적 인물도 진시황이나 한 무제, 당 태종 같은 화려한 영웅이 아니라 후한을 연 유수(劉秀)나 촉나라를 세운 유비처럼 인화단결을 중시하는 인물들을 롤 모델로 삼았다. 누구도 믿지 않고,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시 주석은 나중에 권력 장악에 큰 역할을 하는 지방 인맥들을 관리하고 조용히 실력을 쌓으며 침착하게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아버지 인맥의 후원하에 꾸준히 군 관련 인맥을 관리해온 시진핑에 비해 공청단 출신인 리커창은 군 인맥이 없던 것도 큰 약점이었다.

대권을 틀어쥔 시진핑은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상하이방과 공청단을 향해 반부패 척결을 앞세워 가차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각 파벌의 핵심 권력들을 부패 등의 혐의로 숙청, 제거하고 전광석화처럼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자신의 집권에 반대해 정변을 모의한 것으로 알려진 4대 천왕이라는 신 4인방도 차례로 감옥에 넣었다. 항상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시따따(시 아저씨)’의 서민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지만, 흉중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야심가의 기질을 감추고 1인 체제를 굳힌 것이다. 집권 후 반대파를 숙청하고 헌법의 주석직 2연임 초과 금지 조항도 삭제, 종신 집권 기반까지 마련한 시진핑은 어찌 보면 마오쩌둥보다 더 무서운 비수(匕首)를 가슴에 품고 등극한 책략가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지지자들은 그를 하늘이 낸 ‘천명(天命)을 받은 지도자’인 천자(天子)로 떠받들고 있다.

중국 혁명 8대 원로였던 부친의 실각 등 부침을 거듭하는 정계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아홉 살부터 지켜보며 성장한 시진핑은 평실(平實), 저조(低調), 겸화(謙和), 대기(大氣)란 네 단어를 좌우명 삼아 체화했다. 소박하고 수수한 성품을 바탕으로 재능과 능력을 뽐내지 않는 처세(저조)와 겸허하고 온화함(겸화)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면서 대범하고 당당(대기)하게 일을 처리했다.

G2로 굴기한 오늘의 중국을 만든 걸출한 세 인물 즉 “마오는 산, 주은래는 물, 덩은 길”로 비유하며 ‘반세기 한 우물을 판 3인방’으로 꼽았다(이중 전 숭실대 총장). 이제 시진핑은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 ‘중국몽’을 주창하고 ‘한 송이 꽃’이 되어 천하통일과 세계를 제패하는 패권 국가로의 위상을 노리고 있다. 14억을 다스리는 황제로 등극한 시진핑의 두 어깨에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명이 걸려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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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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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근/현대사 공부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고금의 위인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인생의 3경계'를 거쳤다"에 다시 한번 음미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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