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5공비리 한복판에서 폭풍을 맞다

2022-12-0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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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강 자서전 《80년 한결같이》

거대한 민주화의 폭풍을 맞아 독재정권이 무대 뒤로 사라지고 5공화국 비리 청산이 휘몰아치던 시기에 이진강 검사는 검찰 수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는 4개 과가 있었고 부장검사들이 각기 과장을 맡았다. 가장 선임(先任)인 이진강 1과장이 나중에 수사기획관 범죄정보정책관 과학수사담당관 공보관 등으로 분화한 자리를 모두 혼자 담당하던 시절이었다.
이 검사가 그 시절의 비화와 진실, 그리고 과로로 쓰러졌다가 5년 투병 끝에 이겨내고 검찰을 떠나 이모작 인생을 살아간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80년 한결같이>(나남출판사)를 펴냈다. 중요 사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과 함께 가슴을 찡 울리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그가 중앙수사부 1과장으로 있던 1986년 5월~1988년 8월, 2년 3개월 동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6월항쟁이 불 붙었다. 전두환 정부가 물러가고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5공 비리 수사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최고 권력자의 측근들이 심판을 받았다. 이 격동의 시기에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보를 알린 중앙일보의 특종을 확인해준 사람이다. 당시 대검에서는 매일 아침 검찰총장, 대검차장, 중앙수사부장, 공안부장 등 검찰의 ‘빅4’가 모여 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이진강 중앙수사부 1과장과 공안부 1과장이 보고를 했다. 1987년 1월 15일 아침 9시 회의에 들어온 쪽지를 보고 공안 1과장이 “서울대 학생 한 명이 경찰에서 조사받다 사망했다”라고 보고했다.
 
박종철 사망 1보 확인과 재수사 지휘
 

회의를 마치고 이 검사가 방에 돌아왔을 때 중앙일보 기자가 찾아와 “오늘 보고 중에 서울대생 한 명이 죽었다는 내용이 없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기자에게 “공안 1과장이 회의 중 쪽지를 받아 보고하더라”고 말해줬다. 중앙일보는 돌아가고 있던 윤전기를 세우고 박종철 사망기사를 2단 크기로 돌판(突版)으로 집어넣었다.
6월항쟁의 폭풍 속에서 고문치사 사건의 초동수사가 경찰로 넘어가자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조작이 시작됐다. 경찰은 고문에 가담한 경관 5명을 2명으로 축소해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안기부 등이 주도하는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손발이 묶여 경찰에서 넘어온 대로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해 5월 김승훈 신부가 “고문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하면서 민심이 다시 요동치자 장세동 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이 경질됐다. 신임 이종남 검찰총장은 박종철 사건의 재수사를 중앙수사부에 배당했고 이진강 검사는 고문치사사건 재수사와 범인은폐 조작사건 수사까지 지휘하게 되었다.

이진강 자서전  <80년 한결같이> 표지.


1월 경찰 수사 때 구속된 조한경 경위가 성동구치소에서 성경의 여백에 깨알같이 은폐조작 내용을 적은 것을 찾아내 박처원 치안감 등을 구속했다. 이진강 검사는 수사 발표를 마친 뒤 함세웅 김승훈 신부에게 전화해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미진한 점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라고 했다. 두 신부는 “잘됐습니다.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을 폭로한 가톨릭계의 검증과 승인을 받은 셈이다.  
동아일보는 1보를 놓쳤지만 속보 경쟁에서는 계속 앞서나갔다(졸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 참고). 그 다음해 박종철 사건 1주기에는 동아일보가 안상수 변호사를 인터뷰하고, 황적준 박사의 일기를 압수해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축소조작에 관여한 사실을 밝혀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치안본부장을 구속하는 일도 이 검사의 소관이었다.
 
5공 비리 전경환 염보현 구속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와 여론에 밀려 5공 비리 청산이 시작됐다. 대검 중수부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비리 수사를 시작했다. 그는 1과장으로 총괄 지휘를 하고 주임검사는 이명재 3과장이 맡았다. 전씨를 구속하고 배후수사로 확대됐는데 전두환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씨와 염보현 서울시장 등이 거론되다 염 시장만 사법처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중수부 이 검사 밑에서 과장을 하던 심재륜(전 부산고검장) 박순용(전 검찰총장) 강신욱(전 대법관) 이명재(전 검찰총장) 이종찬(전 서울고검장) 등은 모두 검찰 요직으로 뻗어 나갔지만 그는 과로 끝에 덮친 병마로 검찰을 떠나야 했다. 전경환 염보현씨 사건 수사를 마치고 나서 커피잔을 잡을 때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쓰려져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심장에서 부정맥, 뇌에서 혈관기형이 발견됐다. 그리고 길고 긴 5년 동안의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병을 치료하고 나서 어렵사리 발령받아 나간 성남지청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을 떠났다. 김영삼 정부 탄생에 기여한 민주산악회 간부를 올곧게 처리해 상부에 밉보인 것이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결정적 이유였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에게 “그동안 몸이 불편했던 것은 공무 수행을 하다 과로한 것 때문이 아니냐”며 하소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검찰을 떠난 후에는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장관급) 등을 하면서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을 할 때 <시민과 변호사(1997년 11월호)>에 쓴 ‘검찰총장님 힘을 빼십시오’라는 글은 법조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김태정 검찰총장은 대검차장, 중앙수사부장, 중앙수사부 과장 전원을 배석시키고 TV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김대중(DJ) 비자금 수사 유보를 직접 발표했다. 수사 결과도 아닌 수사 유보를 검찰총장이 직접 발표한 일은 유례가 없었다.
 
“김태정 총장 힘을 빼십시오” 고언
 

이회창씨를 후보로 내세운 한나라당은 인맥을 총동원해 “DJ 비자금 수사를 개시해 투표일 전에 DJ를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워달라”는 로비를 집요하게 벌였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와 등을 돌렸을 때였다. 김태정 총장도 대선 기간에 선거 결과를 바꿔놓을지도 모를 비자금 수사를 벌일 뜻이 없었다.
이 변호사의 글은 수사 유보의 적절성 여부를 논한 게 아니라 검찰총장이 검찰의 수사 간부들을 배석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모양새를 따진 것이었다. 검찰총장이 힘을 빼고 부하들에게 권한을 나눠주라는 의견으로 너른 공감을 샀다.
김 총장은 비자금 수사 유보의 공으로 DJ 정부에서 계속 검찰총장을 하다 법무부장관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지만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재벌은 형제가 원수고, 권력은 측근이 원수’라고 하던가. 김 총장은 권력 내부의 총질로 현직 법무부장관으로서 사표를 내고 구속되는 수모를 당했다가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23년 동안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지만 내심을 들여다보면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겨서 어려움을 겪은 세월’이라고 진단했다. 일 욕심이 쌓이고 쌓여서 몸과 마음에 부담이 되고 몸의 균형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 병과 동행하다 보니 욕심을 버리고 평상심으로 돌아가 그 병도 슬그머니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회고했다. 병과 동행하는 길에 그의 손을 잡아준 것은 고려대 법학과 동기생인 아내 나길자와 불심(佛心)이었다.
그는 2011년 법무연수원 초임검사 특강에서 검사들이 갖추어야 할 덕성으로 책임, 용기, 외로움을 들었다. 이 셋 중에서도 어쩌면 외로움이 검사들에게 가장 실천하기 힘든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머리말(들어가며)에서 ‘이 자서전은 자신과 진솔하게 대화를 하지 못했던 내가 내면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며 이 세상을 마치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갈 때 나의 보고서’라고 술회한다. 저자는 ‘오늘 현재 이 시간을 열심히 살다 보니 어언 80이 되었다’면서 책의 처음과 중간과 끝에 일관되게 흐르는 무엇인가를 느껴줬으면 고맙겠다고 독자들에게 부탁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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