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미국에서는 ESG가 ‘이념전쟁’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화당 측 인사들이 ESG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그동안 11월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면 ESG 투자를 규제하는 법안을 만들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중간선거 결과 이 말이 현실이 되면서 앞으로 하원에서 공화당의 반 ESG 입법 공세가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공화당 측이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다 ESG가 공화당의 돈줄인 거대 석유기업 등 화석연료 기업을 겨냥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ESG가 상장사에 과격한 환경 및 사회 어젠다를 강요하고 있다"며 공화당 의원들이 ESG 원칙의 적용을 중단시킬 것을 촉구한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의 발언은 이런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공화당 인사들이 주지사를 맡은 주 정부들은 한술 더 떠 기후변화 대응과 ESG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금융기관들을 제재하기 위해 44개의 법안을 성안한 상태이다.
주별 움직임을 보면, 차기 대선에서 공화당 내 강력한 후보군에 속해 있는 론 드샌티스 주지사가 연임에 성공한 플로리다주가 선두에 서고 있다. 플로리다주는 지난 8월 은퇴연금의 운용과 관련해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ESG 같은 비재무적이거나 정치적 요인을 고려하지 말고 수익률 극대화를 추구하라는 요구를 담았다. 텍사스주는 지난해 주의 투자 및 은퇴 펀드들이 총기 제조와 화석연료 기업들을 ‘보이콧’하는 블랙록과 유럽의 금융 그룹 등 금융기관들과 거래를 중단하도록 했다. 또 주 연금 펀드들이 보유한 블랙록과 UBS 등 기업의 주식을 팔겠다는 방침도 발표했다. 루이지애나주는 최근 블랙록에 투자자금을 연말까지 모두 찾아가겠다고 통보했다. 블랙록에서 빠져나갈 자금은 7억94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같은 제재 대열에는 웨스트 버지니아주, 켄터키주 등이 참여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 주 정부들의 제재로 금융기관들이 입게 될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될까? 영향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블랙록은 현재 플로리다주의 은퇴연금 자금 72억 달러를 운용하고 있다. 연간 수수료 수입은 720만 달러 수준이다. 이는 194억 달러에 이르는 연간 수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이다. 게다가 시 정부 채권 시장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주요 금융기관을 이 시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시장 자체가 덜 경쟁적으로 바뀌어 텍사스주 당국이 부담해야 할 이자율이 상승하고 있다.
공화당의 반 ESG 공세가 이어지자 민주당은 ESG에 대한 지원사격으로 맞서고 있다. 뉴욕주, 매사추세츠주, 캘리포니아주와 11개 다른 주의 민주당 소속 재무 담당 관료들은 블랙록을 지지하는 서한을 내놓았다. 이들은 이 서한에서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투자자를 벌주려는 주 정부들은 향후 성장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소속 주들은 거꾸로 이들 금융기관에 ESG 투자를 더욱 확대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에서 ESG가 이념 논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은 향후 ESG의 진로와 관련해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중간선거에서 하원의 과반을 차지한 공화당이 반 ESG 입법으로 ESG에 제동을 걸려고 할 것으로 보여 공화당과 민주당 간에 ESG 이념전쟁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미국은 물론 글로벌 무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ESG경영 확산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의제는 인류의 생존과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기된 이슈여서 정쟁(政爭)으로 그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먼저 기후변화의 경우 기상재난의 빈발로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산업화 이전에 대비한 지구 기온의 상승 폭을 1.5℃ 이내로 제한하자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각국의 소극적 대응으로 사실상 달성이 어려워졌다는 비관론 속에 더욱 강도 높은 탄소 배출 감축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기 위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45%(2010년 대비)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뤄야 하는 것은 단지 ‘말의 성찬’이 아니라 ‘살 만한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인류에게 주어진 중대한 숙제이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윤리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지향하는 ESG는 어떤가? ESG는 이제 기업경영의 본류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지속 가능성 및 기후공시, 공급망에 대한 환경 및 인권 실사 등을 중심으로 ESG를 제도화하려는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투자, 금융, 신용평가, ESG 등급, 공급체인, 소비자 등 다양한 부문에서도 ESG의 가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경제질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ESG를 주도해온 투자의 흐름을 보면 ESG의 역주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에 가깝다. 투자자들은 ESG를 리스크와 기회의 두 측면에서 보고 있다. 환경을 망치고 이해관계자를 외면하며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경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반대로 ESG 경영을 잘하는 기업은 새로운 성장 기회를 통해 장기적 기업가치를 키울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만큼 지속가능 우량기업에 투자자금이 계속 몰리고 있다. 모닝스타는 지난 2018년 이후 이들 자금 규모가 세 배나 늘어나 2조470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고 집계했다. UBS그룹의 콜름 켈러허 회장은 “여러 가지 도전적 과제가 있지만, 투자자들이 ESG에 초점을 맞추는 추세는 중단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 이유로 X세대와 MZ세대 등 투자자들이 ESG를 원하고 있기 때문임을 들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발언이다. 미국 공화당이 ESG에 적극적인 금융기관들에 아무리 괘씸죄를 적용해 다양한 제재를 가해도 이들의 고객인 개인 투자자들이 ESG를 원하고 있는 만큼 정치가 경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더구나 기업도 ESG 대세론에 공감하고 있다. S&P500 기업의 거의 대부분(92%)이 ESG보고서를 공시하고 있다. 재무를 담당하는 CFO들은 ESG에 대한 공세로 SEC의 기후공시 의무화 방안이 중도에 좌초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 한 가지. 주주만 우대하는 자본주의를 그만두고 이해관계자 모두를 존중하는 기업 경영을 하자는 이해관계자자본주의는 시대적 의제가 됐다. 지난 2019년 8월 미국 재계가 선제적으로 이 이슈를 공론화시킨 것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 심화 등 ‘곪은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 이제는 자본주의를 개혁할 때가 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 재계가 지난 5월 이해관계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강조하는 기업선언문을 내놓은 것도 이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쨌든 미국 중간선거 결과는 앞으로 ESG의 진로에 적지 않은 진통이 있을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방향이 올바른 일이어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ESG는 고탄소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환경훼손에서 환경보호로, 그리고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자본주의로 가는 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말한다.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라고 설파했다. 견고한 기존 질서를 바꿔 가는 여정(旅程)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울퉁불퉁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ESG 경영은 이제 기업을 넘어서 인류 생존과 사회·경제의 통합력 유지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다져져 온 이 공감대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 혁신의 새로운 나침반으로서 ESG의 역할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