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한전)이 위기에 몰렸다. 올해 한전이 판매한 전력량은 지난해보다 늘었지만 적자는 오히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국제 에너지 가격에 비해 낮은 전기요금 때문에 전기를 팔면 팔수록 손실이 커지는 상황이다.
문제는 한전의 자금 조달 창구인 채권시장마저 얼어붙고 있다는 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는 한전 등 공공기관에 대해 회사채 발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자금시장 경색을 해소하겠다는 취지다. 이대로라면 정승일 한전 사장 발언이 현실을 뛰어넘어 자금 조달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전력 판매량 늘었는데도 적자는 '눈덩이'
한전의 '8월 전력통계월보'를 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전력 판매량은 37만854GWh(기가와트시)다. 지난해 같은 기간(35만6693GWh)에 비해 4.0% 증가했다. 특히 산업용 전력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이 기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3.1% 증가한 19만9520GWh였다. 코로나 사태로 쪼그라들었던 경기가 점차 활력을 띤 영향이다. 같은 기간 일반용 전력 판매량은 8만6381GWh, 주택용 전력 판매량은 5만4946GWh로 각각 7.9%, 1.6% 늘었다.
연간 전력 판매량은 코로나 사태 영향으로 2019년 1.1%, 2020년 2.2% 감소하다가 지난해 다시 4.7% 증가하며 반등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올해 전력 판매량도 4∼5%가량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력 판매량이 크게 늘었는데도 한전은 오히려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글로벌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전이 전력을 구매하는 가격인 전력도매가격(SMP)까지 치솟았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일평균 1㎾h당 SMP는 지난 13일 270.24원(육지 가중 평균치 기준)까지 뛰었다. 이틀 전 세운 기존 최고 기록(269.98원)을 이틀 만에 갈아치우면서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적자는 오히려 불어났다. 전기요금이 SMP의 가파른 상승세를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올 1∼8월 한전은 전력을 1㎾h당 144.9원에 구입했다. 반면 판매 단가는 116.4원에 그쳤다. 소비자에게 전기 1㎾h를 판매할 때마다 28.5원씩 손실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정 사장은 지난 11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연료비 폭등'을 적자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연료비 상승이 (한전에 대규모 적자를 안기는 요인으로) 상당히 작용했다"며 "기저전원 중 석탄 이용률과 원자력 발전 비율 하락, 전기요금 인상 지연도 한전 적자의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대로라면 한전의 연간 적자는 30조원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전은 이미 올 상반기까지 14조원 넘는 영업손실을 냈다.
채권시장마저 '꽁꽁'···벼랑 끝에 몰린 한전
문제는 벼랑 끝에 몰린 한전이 회사채 발행 외에 마땅한 자금 조달 방안이 없다는 점이다.기준금리 인상과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인해 한전의 자금 조달 창구인 채권시장마저 얼어붙고 있다. 한전은 올해 들어서만 23조원 넘는 회사채를 발행해왔다. 대규모 적자로 현금 유입이 끊기자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충당해온 것이다.
문제는 연 6%에 육박하는 한전채 금리에도 투자자를 모집하지 못해 유찰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전은 지난 17일에도 연 5.75%와 연 5.9% 금리로 4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1200억원어치가 유찰됐다. 채권시장의 투자 심리가 얼어붙자 한전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더 높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기준 3년 만기 한전채 금리는 5.701%였다.
정 사장은 지난달 국회 산자위에 출석해 한전 적자 상황이 심각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는 "올 연말이면 회사채 발행 여력이 남지 않을 것"이라며 "하반기에도 상반기 못지않은 적자가 예상되는 만큼 전기요금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는 한전의 유일한 자금 조달 방안인 회사채 발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전 등 우수한 신용등급을 가진 공공기관이 대출이나 해외 회사채 발행 등으로 자금을 조달해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는 상황을 줄여보겠다는 취지다.
일각에서는 이대로라면 올해 한전 적자가 30조원을 넘어 40조원에 육박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 업계에서는 전기요금 추가 인상과 정부 자금 지원 등을 대책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가파른 물가 상승과 함께 긴축 재정 기조가 이어지고 있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