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팬데믹 글로벌 경제가 고강도 금리 인상 카드로 물가와 씨름을 하게 된 이유는 우선적으로 코로나 사태 극복과 경기 부양을 위해 풀린 과잉 유동성 때문이다. 특히 기축달러인 달러화를 마구 찍어댄 미국은 2년 동안 5조 달러 상당을 풀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보다 7배 정도 많은 규모다. 미국 GDP 성장률은 2020년 -3.4%에서 2021년 5.1%로 급반등했다. 세계 경제에 청신호가 켜진 듯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말 생산과 물류 차질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병목은 물가 상승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에너지·식량 대란 까지 더해졌다.
고강도 금리 인상 언제까지?
신시내티 소재 포트워싱턴 투자자문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닉 사르겐은 최근 포브스 기고를 통해 과거 세계 경제는 각종 외부 쇼크에 의해 흔들렸지만 현재 상황은 매우 특이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팬데믹과 전쟁, 두 가지 '더블 쇼크' 이후 나타난 살인적인 물가 폭등 문제는 각국의 폴리시메이커(policymaker)들이 매우 풀기 힘든 난제라고 했다. 지금 상황이 1970년대와 어느 정도 유사한 면도 있지만 매우 다른 면도 있다고 했다. 첫 번째로 기대 인플레이션이 아직은 1970년대와 비교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기대 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률에 대한 가계와 기업의 주관적인 전망치로 고용지표와 함께 연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다. 또 다른 차이점은 다른 통화에 비해 초강세를 보이고 있는 달러화의 움직임이다. 결론적으로 금융 시장이 아직까지는 성장과 물가 사이에서 최적의 해법 마련에 고심 중인 연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그는 분석했다.
연준은 올해 3월 열린 FOMC 회의에서 3년 3개월 동안이나 유지되던 제로 금리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한때 2023년 말까지 제로 금리 유지 방침을 시사했던 연준이 다급해진 이유는 지난해 말 공급망 대란과 올해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물가가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준은 지난 5월 빅 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에 이어 6월과 7월엔 2연속 자이언트 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까지 매처럼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과연 연준은 언제까지 강도 높은 금리 인상을 지속할까?
지난 7월 열린 FOMC 회의 의사록을 보면 연준의 향후 기준금리 인상 보폭과 속도를 가늠하긴 쉽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계속해서 금리를 올리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한편으로는 금리 인상 속도 조절 가능성과 함께 과도한 긴축에 따른 우려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장의 주요 관심사는 현재 2.25~2.5% 수준인 기준금리가 올해 말까지 3%를 약간 웃도는 수준으로 완만하게 상승하느냐, 아니면 거의 4.00%까지 급속도로 올라갈 것이냐다. 이날 파월의 잭슨 홀 발언을 보면 연준이 후자의 길을 택할 것으로 보이고 9월 FOMC 회의에서 또다시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할 가능성이 커졌다. 내년 상반기 기준금리 인하 전환을 기대하던 투자가들은 파월 의장의 "조기 정책 완화는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확인하면서 일제히 투매에 나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고해 '닥터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15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을 연준 목표 2%까지 낮추려면 금리가 4.5~5%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금리가 그렇게 오르지 않으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불안해질 것"이라며 미국 경제가 경착륙 또는 통제 불능인 인플레이션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서 그는 마켓워치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S) 기고 칼럼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장과 물가가 온건한 모습이었던 '대(大) 모더레이션(great moderation)' 시대가 전복(overturned)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 경제가 막대한 돈 풀기로 부채비율이 너무 높아져 '스태그플레이션적 채무위기(stagflationary debt crisis)'를 걱정할 때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안보와 전략적인 차원에서 미국이 달러를 '무기화'하고 있지만 달러화 위상이 향후 흔들릴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내다봤다.
'스톱 앤드 고 폴리시(stop-and-go policy)'
최근 미국의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루비니 교수와 같은 비관론자들이 전망하는 대로 미국이 과연 스태그플레이션 늪으로 빠지고 있는지 단정하긴 힘들다. 지난 10일 발표된 미국의 7월 소비자물가(CPI) 상승률은 8.5%로 전월(9.1%)에 비해 소폭 둔화되었다. 파월 의장은 26일 "단 한 번의 물가지표 개선으로 물가 상승률이 내려갔다고 확신하기에는 한참 모자란다"고 인플레이션 완화에 대한 시장의 과대한 기대를 식혔다. 미국의 올해 2분기 GDP 증가율은 -0.9%로 1분기(-1.6%)에 이어 2분기 연속 하락했다. 통상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은 기술적인 경기 침체 진입으로 보지만 현재 미국 당국은 노동시장이 의외로 탄탄한 모습인지라 공식적으로 경기 침체 국면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발표된 실업률은 완전고용 수준인 3.5% 전후다. 연준의 공격적 기준금리 인상과 마이너스 성장에도 고용과 소비가 위축되지 않는 현상은 참으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경기 부양 노력 과정에서 나타났던 '고용 없는 성장'과도 정반대 현상이다.
노동경제학자들은 경기 침체 중에도 실업률이 낮고 기업들의 인력난까지 겹치는 이유를 주로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자발적 퇴직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생긴 수요와 공급의 심각한 '미스 매치'에서 찾는다. 또한 미국 인구 고령화로 인한 청년층 노동참여율 감소나 이민자 단속 등도 원인으로 분석된다. 펜데믹을 거치면서 미국에선 '대퇴직 시대'라고 불릴 만큼 직장을 그만두는 근로자가 크게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경제적 제한 조치가 풀리자 중소기업·대기업 할 것 없이 일할 사람이 부족하고 '구인난'에 임금도 크게 상승하는 등 지난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구직난'에서 '구인난'으로 판이 바뀐 모습은 미국이나 유럽뿐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관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 있는 침체(Jobful Recession)' 현상이 장기간 지속될 전망은 희박하다. 이미 기업들이 줄줄이 영업 전망을 하향 조정하고 인력 감원 또는 신규 채용 감소를 계획하면서 노동시장 분위기가 다시 냉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는 13년에 걸친 '비정상적' 양적 완화와 초저금리 시대를 살았다. 지금은 이러한 초장기 유동성 파티를 뒤로하고 고물가의 높은 파고를 정부와 경제주체 모두가 힘을 합쳐 극복해 나가야만 하는 고난의 항해가 시작됐다. 파월 의장은 "역사는 (통화) 정책을 조기 완화하면 안 된다고 강력히 경고한다"고 언급했다. 연준이 물가 상승 리스크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늦었지만 3월부터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은 1970년대의 정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싶어서 일 것이다. 즉, 인플레이션이 좀 수그러들면 긴축을 풀었다가 다시 오르면 긴축을 강화하는 '스톱 앤드 고 폴리시(stop-and-go policy)'를 되풀이하면서 결국 인플레이션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다. 그 의지가 약해진다면 인플레이션 시대는 그만큼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
통상적으로 경기가 나쁘지 않으면서 물가가 적당히 오르면 근로자 임금도 오르고 소비까지 연결되면서 경제가 성장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물가가 너무 급격히 오르면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커진다. 또 기업들의 늘어난 인건비 지출은 제품 가격 인상으로 어어져 또다시 물가를 자극하는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wage-price spiral)이 시작된다. 세계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지금 고금리와 물가고로 인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속출하고 저소득층은 한계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올해 인재 영입 경쟁이 치열했던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큰 폭의 임금 인상 소식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대기업들은 아무리 호실적이라도 임직원들 월급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다. 임금 인상을 최대한 자제하고 제품 가격을 내려 물가 안정에 앞장서야 한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