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중국 산동성 칭다오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북한 핵, 사드, 칩(chip)4 등 첨예한 현안이 많았지만, 양국은 갈등을 완화하고 협력을 증진하는 데 합의하였다. 3불 정책(중국의 허락 없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가입 불가, 사드 추가 배치 불가,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에 대한 입장 차이는 해소되지 않았지만, 양국 사이의 관계 진전을 위해 당분간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박진 장관은 칩4 예비회담 참여를 공식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중국의 반발을 어느 정도 무마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동안 중국을 배제하는 반도체 동맹 참여에 반대했던 왕이 외교부장은 한국이 적절하게 판단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고 언급하였다. 가장 명시적인 성과는 고위급 전략적 소통 및 현안 관리, 공급망 등 실질 협력, 문화·인적 교류 활성화 노력, 지역 및 글로벌 평화·번영 기여 등으로 구성 / 외교안보대화(2+2), 공급망 대화, 해양협력대화, 탄소중립 협력 등을 포함하는‘한·중 미래발전을 위한 공동행동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한·중 외교장관 회담의 성과는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의도적으로 미국과 외교적 거리두기를 실시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올해 초부터 타진해온 칩4 가입에 대한 최종 결정을 지난달 말까지 미뤄왔다. 이러한 지연은 칩4가 자유무역에 부합하지 않으며 반도체 공급망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중국의 비판에 대한 고려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한 더 큰 양보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방한 직후 등장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을 직접 접견하지 않고 전화로만 통화하였다. 중국 관영언론인 환구시보는 “한국 정부가 김진표 국회의장을 펠로시 의장과 만나도록 한 것은 예의 바르게 보이면서도 국익을 고려한 조치”라고 우호적으로 평가하였다. 반면, 미국의 반응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미국의 소리(VOA)는 “기시다 일본 총리가 펠로시 의장을 만나 두 나라 사이 연대를 보여줬다며, 윤 대통령의 최근 결정은 일부 미국 관리들에게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 믿을 수 있는지에 의문을 갖게 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라는 수 김 랜드연구소 정책분석관의 발언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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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상반되는 평가를 볼 때, 한·중 외교장관 회담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이 한·중관계를 가깝게 만들기 위해 압박한 것과 같이 미국이 한·중관계를 멀게 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의 압력 속에서 윤석열 정부가 중국과 외교적 거리두기로 선회한다면, 중국은 보복 위협을 재개할 것이다. 이렇게 미국과 중국의 압박이 교차하는 악순환이 지속되면, 우리나라는 세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중추국가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글로벌 스윙 스테이트 (swing state)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박근혜 정부의 시계추 외교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9월 3일 천안문 성루 위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항일승전 70주년’ 기념 중국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을 관람하였다. 또한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불참한 박 정부는 그해 12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비준하였다. 친미보수 정권 하에서 한·중관계의 급속한 진전은 미국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점점 더 많은 미국 외교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한·미동맹을 벗어나 중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중국 경사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2016년 7월 사드 1개 포대가 한반도에 배치되었다는 발표가 나온 이후, 한·중 관계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그해 11월 중국은 성주골프장을 사드 부지로 제공한 롯데그룹의 중국 사업장에 대한 세무조사와 소방·위생·안전 점검을 개시하였다. 2017년 3월에는 우리나라를 여행금지 국가로 지정하여 관광을 사실상 금지시켰다. 중국의 보복은 2017년 11월 3불 정책이 합의된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시계추 외교의 위험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소련의 멸망으로 독립한 이후 우크라이나의 외교정책은 친러와 친미/친유럽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1994년 집권한 레오니드 쿠치마가 대통령은 친러 정책을 내세웠지만, 오렌지 혁명을 통해 2004년 대선에서 당선된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친미를 표방했다. 푸틴 대통령의 지원을 받은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2010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러시아 흑해 함대의 크림반도 주둔을 2042년까지 연장하는 하르키우 조약에 합의하였다. 2014년 취임한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과 그 후임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나토와 EU의 가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정권마다 외교정책이 변동하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강대국 사이에서 대리전(proxy war)의 희생양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압박에서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 윤석열 정부는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즉 한·미관계와 한·중관계가 상충할 경우 어떻게 정책을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 전략이 필요하다. 한·미관계를 중시한다면, 미국에게 한·중 협력의 수준과 범위를 설득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안별로 다르게 대응한다면, 미국은 윤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중국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압박하면 통한다는 인식을 주지 않도록, 우리나라의 핵심이익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외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악순환의 함정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왕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외교학과 ▷런던정경대(LSE) 박사 ▷아주대 국제학부 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