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휘 칼럼] 유가 급등에 흔들리는 바이든의 가치외교

2022-06-14 16:40
  • 글자크기 설정

이왕휘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플레이션의 공포가 바이든 행정부의 가치외교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1981년 12월 이후 최고치인 8.6%에 도달하자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0일 물가 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인플레이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유가다. 지난 4월부터 전략비축유를 방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달 10일 미국 휘발유 평균 가격이 사상 처음으로 갤런당 5달러를 돌파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에 고유가는 대형 악재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는 유가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뭐든지 해야 하는 궁지에 몰려 있다.

바이든 행정부 대외정책의 핵심인 가치외교도 예외가 아니다. 작년 12월 민주주의정상회의가 보여주었듯이 가치외교의 목표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이다. 그러나 유가 급등 이후 가치외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유가를 낮추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권위주의 국가와 타협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지난 8∼10일 LA에서 개최된 미주정상회의는 가치외교의 한계를 잘 보여준 사례다. 1994년 1차 회의 이후 28년 만에 처음으로 이 회의를 유치한 미국은 중남미 국가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와 유사한 ‘경제 번영을 위한 미주파트너십(APEP)' 구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총 35개 회원국 중 21개국만 참여함으로써 이 회의는 반쪽 행사로 전락하였다.

미국 뒷마당으로 불리는 중남미 국가들이 불참하게 된 이유는 가치외교에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인권 유린과 민주주의 탄압을 명분으로 쿠바, 니카라과, 베네수엘라를 초청하지 않았다. 이 조치에 불만을 가진 멕시코, 과테말라, 온두라스가 불참을 선언하였다. 미국 입장에서 멕시코의 불참이 큰 타격이었다. 미국의 최대 교역국인 멕시코가 빠지면서 APEP 구상이 순조롭게 출발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태도도 모순투성이다. 미국은 2019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하였다는 이유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는 동시에 야당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를 임시 대통령으로 지지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가가 급상승하자 미국은 지난 3월부터 베네수엘라와 제재 완화 조치에 대해 협상하였다. 이달 초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일부 제재를 완화하여,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에너지 기업이 부채를 베네수엘라산 원유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타협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마두로 대통령을 미주정상회의에 초청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가진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8일 앙카라를 방문하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남미와 중동의 권위주의 지도자가 반미 연대를 과시한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관계 개선도 가치외교에 전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원유 소비국인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를 중시해왔다. 2018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 이후 살인을 청부했다는 의혹을 받은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하였다. 또한 2019년 이 지역에서 미국 무인기가 격추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시설에 대한 무장 공격이 발생한 이후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 센티널 레이더와 함께 병력 약 3000명을 추가로 파병하였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빈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 암살의 배후라는 국가정보국(DNI) 기밀보고서의 공개를 승인했다.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작년 9월 리야드를 방문했을 때 이 문제를 언급해 빈살만 왕세자를 격분시켰다. 또한 빈살만 왕세자가 국방장관을 겸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바이든 행정부는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을 최고 실권자인 빈살만 왕세자의 상대역으로 지정하였다. 더 나아가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걸프 지역 긴장이 완화되었다고 평가하면서 패트리엇 미사일 2개 포대와 병력 300명을 철수하였다. 그 결과 양국 관계는 역사상 최악으로 치달았다.

유가 급등으로 인플레이션이 악화되면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관계는 역전되었다. 단기간에 유가를 안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석유 생산량을 증대할 수 있는 국가가 사우디아라비아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OPEC+ 지도국으로서 석유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이 빈살만 왕세자와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빈살만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 전화를 거절하는 동시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아닌 러시아를 지지하였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과 석유 거래를 할 때 위안화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미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해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4월 중순 비밀리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여 빈살만 왕세자를 면담하였다. 지난 2일 OPEC+가 석유 증산에 합의한 이후 바이든 대통령은 7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빈살만 왕세자와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피에르-장 대변인이 국가 이익으로 이 결정을 합리화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하였던 애덤 시프 민주당 하원의원은 정상회담이 암살 사건에 면죄부를 부여한다고 비판하면서 반대하였다. 만약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가치외교의 적실성과 유효성에 대한 논란이 더욱 증폭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와 같이 가치외교를 중시하고 있다. 110대 국정과제 중 글로벌 중추국가의 3대 약속에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으며,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민주주의와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 촉진, 부패 척결 및 인권 증진이라는 양국 공동의 가치”에 합의하였다.

미국이 가치외교를 제대로 추진하고 있지 못하는 처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도 가치외교의 방법과 수단을 적절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석유와 가스 90% 이상을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37개 OECD 회원국 중 원유의존도(GDP 1만 달러당 원유 소비량 5.7배럴) 1위, 1인당 원유 소비량(국민 1인당 원유 소비량 18.0배럴) 4위다. 지난 11일 휘발유 평균 판매가가 역대 최고치인 ℓ당 2064.59원을 기록함으로써 조만간 경제에 큰 충격이 예상된다. 경제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유가 상승이 진정될 때까지 산유국을 자극할 수 있는 분쟁을 최대한 회피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치와 국익이 충돌하는 난처한 상황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왕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외교학과 ▷런던정경대(LSE) 박사 ▷아주대 국제학부 학부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