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학창 시절 어머니가 장사하시는 남대문시장의 서너 평짜리 수예품 가게에 가보곤 했다. 나일론 제품에서 뿜어져나오는 유해물질 때문에 눈이 따가워 살 수 없었다. 내뿜는 독소를 매일 들이마시며 일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왔다. 그는 그때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선 사법고시에 붙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대학생이 된 청년은 이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일조권과 운명적 만남
청년은 이제 어엿한 변호사가 됐다. 곧바로 개업을 했다. 생계를 위한 길이 트인 것이다. 변호사 개업 1년도 안 됐을 때 '일조권' 사건 하나를 의뢰받았다.
어느 날 변호사 사무실에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떼 지어 우르르 몰려왔다. 뭐가 그리 억울해서 이렇게 변호사 사무실로 몰려다니나 싶었다. 알고 보니 일조권(햇볕을 받을 권리) 피해를 호소하는 의뢰인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은 이쪽저쪽, 안 찾아 본 변호사 사무실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사건은 맡아주질 않았다. 지금에야 일조권이 보편적 권리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실체가 없었다. 변호사들은 이게 아니어도 돈 벌 일이 많았다. 그러니 변호사들은 아무도 이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이 사건이 '퇴짜'를 맞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의 일조권 판례를 만들었다.
하지만 초짜 변호사는 모든 사건에 열정적이었다. '잘하면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국내에는 일조권에 대한 판례도 학설도 전무했다. 그래서 일본 사례를 뒤져봤다. 일본에는 많은 판례가 있었다. 대개 법이란 독일에서 들어오기도 하고 독일을에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이 초짜는 일본에 판례가 있으면 우리도 판례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승소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초변'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판례를 번역해 판사에게 갖다 줬다. 1·2·3심에서 승소했다. 변호사는 이때 독일어, 일본어에 능통했고 환경에는 이제, 아주 큰 눈을 뜨게 됐다.
■변호사, 사회운동가로 변신하다.
일조권 소송은 몇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소송 상대인 해당 건설업체는 국내 굴지 대기업이었다. 이 회사 변호사 또한 쟁쟁했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였다. 이를 상대로 초짜 변호사가 승소를 이끌었다. 게다가 환경분야에 첫 판례를 남기는 계기를 직접 제공했다. 변호사는 재판을 준비하면서 환경단체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변호사는 '공해추방연합(공추련)'이라는 시민단체를 찾아갔다. 무슨 자료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시민단체가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공추련은 광화문에 있는 허름한 다락방일 뿐이었다. 불쌍해서 변호사가 오히려 도와줘야 할 지경이었다.
그는 이렇게 시민단체 속으로, 환경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그는 이곳에 갈 때마다 밥도 사주고 하면서 이들과 친해져 어느새 시민단체 운동가가 돼 있었다. 그는 무료 환경 법률 상담도 해줬다. 지금으로 말하면 재능기부자였다.
당시 시민단체 회원들 월급은 일반 시민 월급 대비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사회에 헌신하면서 사는구나' 생각하니 애처로웠다. 한창 나이에 사명감 하나로 돈도 안 벌고 열정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는 감화를 받았다. 같이 환경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 몇 년 시간이 흐르면서 변호사는 공추련 상담실장도 되고 일조권 사건에서도 어느새 승소했다. 대한민국 일조권 첫 판례를 얻어냈다. 초짜 변호사가 말이다. 어느새 '스타 변호사'가 돼 있었다. 그럴수록 시민단체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더 많은 열정을 갖고 했다. 급기야 공추련은 환경운동연합으로 바뀌고 그는 여기서 법률상담실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맡게 됐다.
■시민운동가, 정계 입문하다.
변호사는 환경연합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그의 주특기는 열정, 성실, 정직 아니었던가. 그는 이제 완전 환경운동가가 돼 버렸다. 환경에 관한 법을 만들고 제도를 바꾸기 위해 환경부 공무원을 만나야 했고 때론 국회의원도 만나야 했다.
하지만 변호사로선 넘기 힘든 벽들 이었다. 그 시절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이 얼마나 고압적이고 무성의했던가. 해준다고 해 놓고 해주지도 않고, 시간만 질질 끌고 '개무시' 당하기 일쑤였다. 울분도 쌓였다. 하지만 변호사는 이제 스타가 아니던가. 방송에 출연해 프로그램 진행도 맡고, CF 주인공도 되고 연예인보다 더 잘나가는 셀럽 변호사 아닌가.
이 무렵 변호사는 여야 양당에서 정계 진출 제안을 받는다. 먼저 제안한 쪽은 여당이었다. 그해 새해 아침에 청와대와 전화 한통이 연결됐다.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정계 진출 제안을 슬며시 받았으나 변호사는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이어 야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한테도 전화가 왔다. "한나라당은 당신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변호사의 원래 꿈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대학교수였다. 모교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싶었다. 당시 시민단체에 몸담고 있던 변호사는 기나긴 숙고 끝에 이를 수락했다.
시민단체에 몸담고 있으면서, 법·제도 하나를 바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설움을 당했던가. 국회의원이 되면 환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환경 운동가들의 권유도 있고, 그는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변호사 신분으로 국회 문턱을 넘나들기가 얼마나 힘겨웠던가. 이 총재의 입당 제안을 받아 정치인이 됐다. 그는 쉬운 여당의 길을 놔두고 야당을 택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더 노력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와 인센티브가 주어지는 나라를 만들자는 데 공감했기 때문이다.
■개혁적이고 당찬 신출내기 정치인
어쨌든 그날 화창했다. 하늘도 파랗게 높았다.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국회의사당에 핀 꽃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국회의원 4년 임기 마지막 날 처음 알았다.
짧다면 짧았던 시간이었다.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니 초선 의원은 마음이 너무나 홀가분했다. 이제서야 국회 앞마당에 핀 꽃이 처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지난 4년간 그는 의정 활동에 파묻혀 살았기 때문이다.
이 기간 그는 개혁적이고 파격적이기만 했다.
그는 정치자금법을 개정했다. 일명 '오세훈법'이다. 또 ‘수도권 대기 환경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두 법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체요, 활짝 핀 꽃이었다.
초선 의원은 4년 내내 개혁적 행보를 걸었다. 원희룡, 남경필, 정병국 등 소장파 의원들과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를 결성했다. 여의도에선 이들을 가리켜 '미래연대 5인방'이라고 불렀다. 미래연대는 당내 정치 개혁과 당 쇄신을 위한 모임이다. 여기서 그는 공동대표를 맡고 모임의 총대를 멨다.
이어 2002년 "제왕적 총재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17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6개월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당내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초선 의원은 막무가내였다.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 중진들에게까지도 거침없이 들이댔으니 말이다. 그의 지역구는 '강남(을)'이다. 이곳은 보수 진영 텃밭이다. 꽃길이다.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감이 저절로 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한 몸 던져 당을 개혁하고 쇄신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이렇게 되자 당내에선 '젊은 x이 어쩌구 저쩌구, 싸가지 없는 x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비난 일색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하지 못한 이 정당은 그해 대선에서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대선 2연패를 당한 것이다.
이듬해 그는 다시 심기일전했다. 그의 개혁 칼날은 5·6공 세력을 향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수구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5·6공 세력이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고삐를 더 옥죄었다. "5.6공 세력, 용퇴하라. 그러면 이 초선 의원도 같이 물러나겠다"였다.
그가 17대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까지 쳤다. 이 불출마 약속은 그대로 지켰다. 불출마 선언 후 일명 '오세훈법'은 국회를 통과했다. 옥동자는 이렇게 탄생했다. 기업의 정치자금 후원 금지 및 후원금 대폭 축소가 골자였다. 다시말해 '가난한 정치 초년생도 소신껏 정치할 수 있게 하자'였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신념과 맞아떨어진다.
‘수도권 대기 환경 개선에 관한 특별법’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 특별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 특별법 시행일은 2006년 7월 1일. 이날은 그가 서울시장에 당선돼 임기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즉, 자신이 직접 만든 특별법을 최초로 실시하는 광역단체장이 됐다. 그는 이 때문에 '미세먼지는 내 운명'이라고 믿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정치가, 행정가로 알고 있지만 그의 핏속에는 환경운동가 DNA가 흐르고 있다. 이 특별법은 수도 서울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데 근간이 되고 있다. 서울 녹지축 구축, 한강르네상스, 자전거 보급, 천연가스·전기차 보급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도 "온실가스 해결 없이 미래 도시 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하고 있는 대기오염방지 관련 정책은 초선 의원이 만든 특별법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속에는 대기질 개선과 관련된 모든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