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판자촌서 어렵게 자랐지만 가난을 '무기'삼아 정치하지 않겠다"

2022-05-0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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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마이웨이' <1>

오세훈 어린이[사진=서울시]

오세훈군[오세훈 군]

 

[사진=서울시]

 

[사진=서울시]


 

<오세훈의 어린 小說>17.5매

“동생 하나 있는 것도 건사 못해.”
소년은 늦은 밤 어머니한테 호되게 혼나고 있었다. 낮에 동네 어귀에서 데리고 놀던 여동생이 똥독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시장에서 장사를 끝내고 들어오신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이 가엽기만 했다. 소년과 여동생은 두 살 터울이다.

소년은 깎아지른 듯한 민둥산 산등성이 판자촌에 살았다. 동네는 변변한 변소 한 칸 보기 드물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똥독이 널부러지게 박혀 있었다. 산등성 저편에는 똥이 뿌려져 있기도 했다.
이런 동네에 전기가 들어올 리 만무했고 수도는커녕 우물조차 없어 없는 형편에도 물은 사 마셔야 했다.
 
이때만 해도 ‘새마을 운동’ ‘조국 근대화’란 단어는 낯설었다. 아무튼 6·25전쟁과 5·16혁명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렵게만 살던 박정희 군사혁명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시장에 장사 나가시고, 아버지는 월급도 나오지 않는 건설회사에 다니셨다. 말이 회사지, 부도난 회사나 다름없었다. 월급 한번 가져오질 못하시니 말이다. 그렇지만 잘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만큼은 분명했고, 아이들 교육열도 어떤 부모 못지않으셨다.

이 시절에는 소년만 그렇게 어렵게 산 것이 아니었지만, 소년이 학교에 갔다 돌아와 솥뚜껑을 열어보면 누룽지 한 조각 없는 빈 솥단지였다. 소년은 배가 고팠다. 소년은 허기를 달래고자 여동생을 데리고 놀다 변(變)을 당했다. 여동생이 박혀 있던 똥독에 빠져 버린 것이다. 똥독에 빠지면 더러운 악취는 물론이요, 똥독(毒)에 걸리기 십상이다. 이렇게 되면 큰 일이다. 더러운 똥이야 씻으면 된다지만 똥독에 걸리면 병원 갈 돈도 없다.
 
충분히 먹고 자라지 못한 어린 동생은 면역성 결핍으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니 어머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어머니도 소년에게 왜 안 미안했겠는가. 먹일 거 못 먹이고, 입힐 거 못 입히고···. 부모 마음이야 매한가지다. 어머니가 밤 늦게까지 장사를 하셔도 하루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끼닛거리조차 못 벌 때도 허다했다. 이런 어린것들에게 싸라기밥으로 연명시키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소년은 이런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소년은 이때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소년은 또래보다 훤칠한 키에 깡마른 체구였다. 게다가 약간 광대뼈가 솟은 데다 못 먹어서 생겨나는 마른버짐까지 피어 있었다. 그렇지만 총명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오뚝한 코하며 입가에는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년은 못 먹어서 근력이 달렸다. 하지만 공부만큼은 반에서 제일이었다. 그래서 반장을 늘 도맡아 했다.
 
소년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소년은 미아리에 있는 삼양국민학교에 다녔는데, 담임이 여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초급대학교를 막 졸업하시고 이 학교로 첫 발령을 받으셨다. 참 예쁘셨다. 그때 소년은 반장이었다. 선생님은 소년을 참 예뻐해 주셨다. 그러나 3학년이 되자 소년은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가 그곳으로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그 월급도 안 나오는 회사 말이다. 소년에게 아버지 회사는 말이 건설회사지 조그만 '하꼬방'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소년은 두 손 불끈 쥐고 열심히 공부했다. 반에서 1등은 당연했다. 소년은 가난 종식을 위해 이를 더 악물었다. 어린 나이에도 말이다. 그러나 인간사 세옹지마라고 했던가. 소년은 폐병을 앓게 됐다. 어머니는 매일 학교로 소년에게 도시락 배달을 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병에서 회복됐다.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말은 제주로’라고 했던가. 어머니는 소년을 위해 서울로 또다시 전학을 시켰다. 소년의 가정이 다시 서울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6학년 때 서울 미동국민학교로 전학왔다. 그해 박정희의 독재가 극에 달해 있었다. 10월 유신도 그해 단행됐다. 박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포석이었다. 한편으론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됐다. 모두가 ‘잘살아 보세’였다. 희망적이고 역동적이기도 했다.
 
소년의 집에도 조금씩 볕이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1평 남짓한 쪽방 하나를 얻어 원단에 삯바느질을 하게 됐다. 그렇더라도 가난은 여전했다. 원단을 사서 삯바느질을 해 어느 가게에 납품을 한 뒤 돈 받으러 가면 그 가게는 감쪽같이 사라지가 일쑤였다.
 
그럴 때 어머니는 소년의 손을 잡고 이모댁으로 돈을 꾸러 가시곤 또다시 그 돈을 갚으러 가셨다. 돈을 갚으러 온 어머니가 안쓰러운지 이모는 어머니 손에 택시비를 쥐여 주지만 그 돈을 받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마지못해 이모는 소년의 손에 그 돈을 쥐여 주시고 택시까지 잡아 태워 주지만 이모 눈에서 멀어지기가 무섭게 택시에서 내려 걸어오기가 일쑤였다. 소년은 이렇게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분들 밑에서 자랐다.
 
어느덧 소년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사춘기에 도달해 있었다. 국민학교 때는 반장을 도맡았는데 중학교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이 반장을 하는 게 아닌가. 빈정이 상했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게 가난이라지만···. 소년은 가난이 창피하지 않았다. 잘살 수 있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청소년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고생 덕분인지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진 듯했다. 고교생이 되자 이 학생은 한 소녀를 알게 됐다. 그러나 이 소녀가 자신의 운명일 줄은 그땐 몰랐다. 영화나 드라마 같지만 계기는 아주 간단했다. 반에서 친한 친구 한 명이 생긴 것이다. 학생과 그 친구는 곧바로 '절친'이 돼 버렸다.

그러나 절친은 디스크를 앓게 됐고 급기야 학교에 나올 수가 없게 됐다. 학생은 절친을 위해 수업시간에 받아 적은 노트를 빌려주며 같이 공부를 하게 됐다. 미리 말하지만 이 절친은 학생보다 한 학년 선배였는데 허리 디스크 때문에 1년 휴학한 뒤 복학한 것이다. 그래서 학생과 절친은 한 학년 한 반이 돼 친하게 지냈다.

절친에겐 여동생이 있었는데 절친과는 연년생이요, 학생과는 동갑내기였다. 꽤 아름다운 소녀였다. 학생과 절친, 절친 여동생은 한 학년이 됐다. 셋은 같이 모여 공부도 하고 그룹 과외를 같이 하기도 했다.  학생과 소녀는 자연스레 친하게 됐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서먹한 사이가 돼 버렸다. 학생은 과외를 30분 더 시켜 달라였고, 소녀는 30분 일찍 끝내 달라였다. 소녀와 그래서 그렇게 됐다. 학생은 그룹 과외를 때려치웠다.

종로 학원가 단과반에 다니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녀도 이 단과반에 등록한 것이 아닌가. 학생과 소녀는 또다시 친해졌다. 둘은 열심히 공부해 같은 대학에 입학 원서를 냈다. 소녀는 합격했으나 학생은 고배를 마셨다. 후기 대학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후기 대학에 입학하자 금세 청년이 돼 버렸다. 청년이 된 그해 10·26이 터졌다. 전국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청년은 이 휴교령을 틈타 열심히 공부해 숙녀가 다니는 대학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청년과 숙녀, 둘은 이제 완연한 연인 사이가 됐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청년은 이 예쁜 숙녀와 냅다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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