㉑풍수지리 스토리 담긴 담양의 석조 문화재들

2022-02-07 10:27
  • 글자크기 설정

 

당간은 돛대, 돌장승은 뱃사공
 

“이렇게 멋진 조형물을 길에서 만나다니….”
담양 도심에서 객사리 석당간(石幢竿)을 감상하고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올린 사람들의 이구동성이다. 글을 올린 사람이 전문가나 마니아일 수도 있고 아마추어일 수도 있겠지만, 그 표현은 적확하다. 그 표현 그대로, 담양에서 석당간을 만나는 일은 예상치 못한 행복이다.
담양군청에서 가까운 곳, 순창으로 향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초입에 객사리 석당간이 서 있다. 석당간이라고 하면 돌로 만든 당간을 말한다. 예로부터 절에서는 ‘당(幢)’이라고 하는 깃발을 내걸었다. 법회와 같이 중요한 행사를 널리 알리거나 사찰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혹은 부처님의 위엄을 보여주려는 장엄용(莊嚴用)이기도 했다. 이 깃발을 달아 두는 장대가 바로 당간이다. 당간은 주로 나무나 돌, 철로 만들었다. 당간은 길고 높기 때문에 혼자 서있기가 힘들다.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지주(支柱)가 필요한데 이를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지주는 대부분 돌로 만들었다. 당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간지주는 흔히 볼 수 있는데 당간도 매우 드물다.
담양 객사리 석당간은 당간과 지주가 함께 남아 있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귀한 경우여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보물)과 함께 전통 당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객사리 석당간은 원래 고려 때 만들었으나 바람 등으로 인해 쓰러져 부서진 것을 조선 헌종 때인 1839년에 지금의 모습대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당간 높이는 15m, 당간지주의 높이는 2.5m.
당간의 아래쪽에는 받침돌이 있다. 연꽃잎이 새겨진 넓적한 돌로, 그 위에 당간을 세우도록 되어 있다. 받침돌에 표현한 연꽃은 단정하고 반듯하다. 당간은 길쭉한 8각 돌기둥들을 위로 연결해 만들었다. 돌과 돌의 연결 부위는 긴 철심을 박고 철띠를 둘러 단단히 고정시켰다. 당간지주 윗부분은 당간과 연결되어 당간을 곧게 지탱해준다.

담양 객사리 석당간. 고려 때 처음 세운 뒤 1839년에 고쳐 세운 것이다. [사진=이광표]

당간의 위쪽 일부는 철로 기둥을 만들어 돌기둥과 연결한 모습이다. 맨 꼭대기에는 둥근 철제 보륜(寶輪·바퀴 모양의 장식)을 올렸고 그 보륜에는 풍경(風磬) 같은 자그마한 장식이 달려 있다. 실제 풍경인지 장식물인지 다소 애매하다. 그런데 옛날 사진을 보면 두 개가 매달려 있는데, 하나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다.
석당간이지만 위쪽 일부는 철제 기둥이 연결되어 있다. 돌기둥과 철기둥의 만남이 이색적이며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이 당간과 관련해선 풍수지리적인 얘기가 전해온다. 담양의 지형이 배가 떠다니는 모양(행주·行舟)이어서 풍수상 돛대가 필요한데 그래서 이 당간을 만들어 세웠다는 얘기다.
석당간에서 길을 건너면 탁 트인 공간에 남산리 5층석탑이 있다. 고려 때의 석탑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을 눈여겨보면, 탑신(塔身·몸돌),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을 비롯해 전체적 모습이 백제탑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과 비슷하다. 이는 남산리 오층석탑이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담양이 백제 땅이었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탑의 전체 높이는 7m. 상륜부가 사라져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늘씬하고 날렵하다. 그러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그런데 이 탑은 기단부(基壇部·받침)가 일반적인 다른 탑에 비해 매우 낮다. 그리고 기단부 맨 윗돌의 너비가 1층 옥개석의 너비보다 약간 좁다. 기단부가 낮고 작다 보니 다소 불안정한 느낌도 주지만 전체적으로는 깔끔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자랑한다. 옥개석의 윗면을 보면 별석받침을 놓았다. 별도의 돌로 받침을 만들어 끼워 넣은 것으로, 위층의 탑신을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 전통 석탑에서 그리 흔한 것은 아니어서 남산리 5층석탑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담양 남산리 5층석탑.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모습을 이어받은 백제계 고려 석탑이다. 뒤로 보이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 잘 어울린다.[사진=이광표]

옥개석의 경사는 완만하고 부드럽다. 옥개석의 지붕선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가볍게 올라간 그 각도가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그렇게 살짝 올라간 귀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풍경을 달았을 것이다. 5층석탑 옥개석의 네 모퉁이 매달린 스무 개의 풍경들.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본다. 바람이 불면 그 풍경은 저마다 흔들리며 싱그러운 소리를 낼 것이다. 고려 때 담양 사람들은 그 풍경 소리를 들으며 온갖 번뇌를 바람에 날려 보냈을 것이다. 담양군은 현재 객사리 석당간과 남산리 5층석탑 주변을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석당간과 석탑이 한곳에 있다면 거기 고려시대 사찰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석당간이 있는 곳은 절의 입구가 되고, 탑이 있는 곳은 절의 내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절의 실체를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다. 담양군은 역사문화공원 조성의 전(前)단계로 5층석탑과 석당간 주변 지역을 발굴한 바 있다. 2012~2013년에 5층석탑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목사(木寺)’‘대사(大寺)’‘ 만(卍)’자 등이 새겨진 기와를 찾아냈다.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지만, 아쉽게도 좀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당시 발굴에선 건물터 8곳, 다량의 폐(廢)기와, 우물의 흔적(12개) 등을 확인했고 현재 석탑 주변엔 일부 우물을 복원해 놓았다.

남산리 5층석탑 주변의 우물. 2013년 발굴에서 확인되었고 이를 원래 모습에 가깝게 추정해 복원한 것이다.[사진=이광표]

2014∼2015년에 석당간 주변을 발굴 조사했고 그 결과 고려시대 건물터와 담장, 수로 등의 흔적과 청자편 등을 발견했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종합해보면, 객사리와 남산리 일대에 고려시대 사찰이 존재했음은 확실하다. 다만, 정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객사리 석당간과 남산리 5층석탑이 원래 위치에서 옮겨왔을 개연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추정일 따름이다.
전국의 도시 가운데 도심 한복판의 널찍한 평지에 두 점의 보물이 마주 보고 있는 곳은 아주 드물다. 객사리 석당간은 오래된 불교 유물이지만 세련되고 모던한 설치미술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남산리 5층석탑은 반듯하고 단정한, 백제계 고려 석탑의 전범이다. 거기 우물이 가세해 공간에 변화를 준다. 그 뒤로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쫙 펼쳐져 있다. 이곳에 운치 있는 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면 석당간과 5층석탑, 우물을 배경으로 멋진 미디어 아트를 기획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 천변리에는 2구의 석인상(石人像)이 있다. 천변리 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는 2구의 돌장승으로 오른쪽이 할아버지, 왼쪽이 할머니 모습이다. 조선 헌종 때인 1838년 담양부사 홍기섭(洪耆燮)이 제작한 것으로 전해온다. 돌장승에 걸맞게 마을의 입구에서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한다. 그런데 마을 수호신치고는 너무나 편안하고 소박하다. 얼굴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투박하고 정겹다. 할아버지 장승은 머리에 관을 썼고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손에는 홀(笏)을 쥐고 있다. 문관을 표현한 것이다.

담양 천변리 석인상. 마을의 안녕을 위해 1838년 세운 할아버지 할머니 장승.[사진=이광표]

이 석인상은 앞서 설명한 객사리 석당간과 풍수지리 스토리의 짝을 이루는 문화재다. 담양의 땅이 배 모양이기 때문에 풍수지리상 돛대가 필요해 석당간을 세웠고 배를 저을 뱃사공이 필요해 이 장승을 세웠다는 것이다.
담양의 문화재를 말하면서 개선사지(開仙寺址) 석등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신라 때인 868년 담양의 개선사에 세운 석등이다. 지금 개선사는 사라졌고 보물로 지정된 석등만 홀로 남아 그 터를 지키고 있다. 개선사지 석등은 담양군 가사문학면 학선리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은 담양이지만 광주호 상류 쪽의 무등산 자락이어서 광주 충효동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
석등은 절 안을 환하게 밝힌다. 물리적인 빛을 발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처의 가르침을 사방에 비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석등은 높이 3.5m로 비교적 큼지막하면서 전체적으로 세련되었다. 석등에서 불을 밝히는 부분을 화사석(火舍石)이라고 한다. 개선사지 석등의 화사석은 8각으로 되어 있고 8개 면에 모두 직사각형의 창을 뚫어 놓았다. 석등의 맨 아래 기단부(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고, 그 위로 화사석을 받치는 기둥은 장고 모양이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통일신라 왕실의 발원에 의해 868년 건립되었다.[사진=이광표]

화사석 위의 옥개석(지붕돌)은 8각으로 펼쳐져 있는데 각각의 끝부분에는 꽃 모양 장식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떨어져나가고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 그런데 옥개석을 잘 들여다보면, 8각의 변마다 중간에 살짝 각을 주어 위로 솟아오르게 했다. 이를 포함한다면 옥개석은 8각형이 아니라 16각형이 된다. 중간중간 살짝 반전(反轉)을 두어 지붕돌의 디자인에 변화와 생동감을 준 것이다. 개선사지 석등의 감춰진 매력이 아닐 수 없다. 9세기 담양지역 석공의 미감과 손놀림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옥개석 맨 위에는 상륜부를 올렸다. 꽃(앙화․仰花), 보륜, 보주(寶珠·구슬 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라가 있다.
화사석의 창과 창 사이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새겨넣은 명문(銘文)이 있다. 경문왕과 왕비, 공주(훗날의 진성여왕)의 발원에 의해 868년 승려 영판(靈判)이 석등을 건립했으며 891년 개선사의 승려가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토지를 구입했다는 내용 등이다. 석등에 명문이 있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명문의 앞부분은 이러하다.
“경문대왕, 문의황후, 큰공주께서 등(燈) 두 심지를 원하셨다. 당(唐) 함통(咸通) 9년 무자년(868년) 2월, 저녁 달빛을 잇고자 전(前) 국자감경( 國子監卿) 사간 김중용이 등유와 식량으로 운영하도록 조(租) 300석을 올려 보내니, 승려 영판이 석등을 건립하였다(景文大王主文懿皇后主大娘主願燈二炷 唐咸通九年戊子中春夕繼月光 前國子監卿沙干金中庸 送上油粮業租三百碩 僧靈判建立石燈…).”
석등 건립을 발원한 사람과 석등을 제작한 사람, 건립 시기와 건립 과정, 운영 비용 마련 등에 관한 내용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개선사지 석등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 크다. 특히 통일신라 전후의 석등의 연대를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개선사지 석등은 규모도 작지 않고 그 모습도 아름답고 고급스럽다. 그런데 여기에 왕실에서 발원해 만들었다는 명문까지 새겨져 있다. 이 같은 정황은 개선사와 이 석등의 존재 의미를 방증한다. 개선사는 9세기 당시 크고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의미한다. 석등 외에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통일신라가 기울어가던 9세기말, 왜 이곳에 석등 불사가 있었던 것일까. 명문이 의미하는 바는 무얼까. 변동명 지역사연구소장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은 바 있다. 그 논의 과정이 학술적이고 복잡하지만, 결론은 이렇다.

개선사지 석등 명문, 후백제와 신라의 갈등 반영
 

개선사지 석등의 화사석. 석등의 제각에 관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사진=이광표]

“9세기 말엽 광주에 견훤의 후백제가 들어섰다. 신라 중앙과 타협하고 중앙 귀족에게 협조하던 지역 토착세력이, 기왕의 고식적인 방책을 버리고 왕경 경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세력으로 자립하였다. 무등산 개선사지 석등의 명문에는 그처럼 이제까지와 다른 길을 선택하기에 이른 광주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담겨 전한다.”(변동명, 〈삼국・통일신라시기의 무등산과 광주〉,《호남학》제69집)
이러한 해석은 다소 놀랍다. 명문에 등장하는 연호(龍紀 3년)가 잘못되었고 토지 매입과정에 왕실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석등을 세우고 무려 23년이 흐른 뒤에 명문을 새겼다는 점 등등을 토대로 볼 때, 신라 왕경(경주)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 견훤(甄萱․867~936)이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던 상황을 예로 든다. 변 소장의 설명을 듣다 보면 이 아름다운 석등과 드라마틱한 정치적 함의를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개선사지 석등을 찾아가려면 가사문학면 한국가사문학관 바로 앞에서 광주호 상류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길은 다소 외지고, 몇 번의 굽이를 돌다 보면 인적 드문 넓은 밭 사이로 석등이 나타난다. 그 석등이 너무 깨끗하고 담백하여 더 쓸쓸해 보인다. 변 교수의 해석이 떠오른다. 무언가 시대 상황이 연결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 흥미진진한 문화 콘텐츠 스토리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박경식,《탑파》 예경, 2001.
2. 변동명,〈삼국・통일신라시기의 무등산과 광주, 《호남학》제69집,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2021.
3. 호남문화재연구원․담양군,《담양 남산리유적》, 2015.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