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중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에 한 번인가 밖에 가지 않았다. 대덕특구에는 IBS(기초과학연구원) 등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KAIST 같은 교육기관들이 있다. 대덕특구에서 일하는 한 생명과학자는 익명을 전제로 한 통화에서 “대덕 단지에 있는 사람은 (대통령에게) 버림받았다, 소외됐다고 생각한다. 문 대통령은 과학이 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문 대통령은 코로나 대유행과 관련해 국군대전병원과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찾았으나 과학자들은 패싱당했다고 했다.
과학에 무관심한 대통령이 이끄는 부처여서 그런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임혜숙)도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3일 언론 보도용으로 내놓은 ‘2022년도 연구개발사업 종합시행계획’이 있다. 6쪽 분량인 보도 자료를 보면 ‘과학 정책’은 실종이다. ‘기술’만 보인다. ‘미래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고 디지털 대전환을 가속화하기 위해 2022년 6조4227억원 투자’라는 게 보도자료의 큰 제목이다. 이어 4개 중점 분야를 홍보하는데, 4개 분야 모두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다. 살펴보면 이렇다.
△탄소중립·양자기술·첨단 바이오 등 미래 핵심기술 개발(1.28조원), 연구자 중심의 기초연구 예산 확대(2조136억원, 전년 대비 +2107억원)
△AI·지능형반도체·6G·사이버보안 등 디지털 필수 전략기술 분야 신규 과제 1687억원 등 ICT 핵심 원천기술 R&D 투자(104조원)
△누리호 2차 발사(2022년 하반기) 및 달 궤도선 발사(2022년 8월), 다양한 위성항법 수요 충족을 위한 한국형 위성항법 시스템(KPS) 개발 본격 착수
△인공지능·우주·반도체 등 미래 유망 기술 분야 전문 인력 양성
이 일은 과기부가 잘하는 것이다. 정부가 열심히 한 덕분에 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과학은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순수과학 사업이 보이지 않아 인내심을 갖고 과기부 보도자료를 훑으며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맨 마지막인 6쪽에 가니 ‘과학’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기초과학연구원 KAIST·POSTECH 캠퍼스 연구단 공사를 완료(2022년 3분기)하고, 작년 말 완공된 한국·베트남 과학기술연구원(VKIST) 본격 운영, 해외 대형 연구시설(CERN 등)에 대한 국내 연구진의 접근성 향상 등 국제 협력도 지속적으로 추진. ※VKIST 공동연구 지원(2022년 4.7억원),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협력(2022년 58억원)'
왜 이렇게 됐을까? 입자물리학자인 박인규 서울시립대 교수에게 물어봤다. 박인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중화학, 토목, 자동차, 반도체, IT 분야 기술에서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 기술에 대한 정부 투자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문화 분야에서도 서양을 상대하기 쉽지 않지만 골든글로브 상을 받는 영화 배우(‘오징어 게임’ 오영수씨)가 나오고, BTS 음악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면서 잘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굴욕적인 유일한 분야가 순수과학이다.” 박인규 교수는 이어 “수학과 물리처럼 고리타분하고 성취를 이루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한국인은 잘 못할까?”라며 그게 아니라고 했다. 그는 “정부의 지난 50년에 걸친 국가 R&D(연구개발)가 기술에서는 성공했지만 기초과학에서는 실패한 것”이라면서 “정부 R&D 투자에서 과학과 기술은 다르게 해야 한다는 걸 다음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정부 R&D는 2~3년이라는 시간 틀에 맞춰져 있다. 이게 기술 분야에서는 통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에서는 성과가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30~40년 걸릴 수도 있다. 박 교수는 “길게 10년 이상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했다. 돈을 많이 줄 필요는 없고 1년에 1000만원, 2000만원을 10년에 걸쳐 지원하면, 가령 새 연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조류 연구를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 1년에 2억원을 주는 방식 말고 10년에 걸쳐 매년 2000만원을 지원해준다면 그게 더 좋다고 했다. 기술과 달리 기초과학 연구에 대해서는 소액·장기 지원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
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핵물리학, 고에너지물리학회 회장)는 “이런 식으로는 한국은 노벨상을 결코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스타 연구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현재 시스템으로는 노벨상 수상과 같은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며 “연구를 선도하는 그룹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입자가속기나 대형 자석과 같은 시설(facility)을 갖춘 국립연구소(National Laboratory)가 있어야 하고, 그런 시설에는 연구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 그룹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정부가 대전 신동지구에 짓고 있는 IBS 중이온가속기(RAON)를 예로 들었다. 과기부는 중입자가속기의 일부 시설을 완성하고 올해 중반에 입자 빔을 뽑아내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유 교수에 따르면 과기부는 중이온가속기 연구소에 가속기를 유지·관리하는 최소 인원을 유지하려 한다. 그리고 시설을 이용하려는 외부 연구자에게 '서비스'하는 개념으로 가속기 연구소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 포항방사광 가속기연구소가 그 모델이다. 한국고에너지물리학회 회장인 유인권 교수는 “사용자가 아니라 가속기를 갖고 연구하는 이론가와 실험가 그룹이 연구소 내부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통화 때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로 출장을 가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이라고 했다. CERN에는 CERN에 적을 둔 실험 물리학자와 이론 물리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CERN의 물리 실험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이들이 기획한 실험에 유인권 교수와 같은 외부 대학이나 연구소 사람들이 참여한다.
유 교수에 따르면 CERN 전체 연구 인력 중 3분의 1이 내부 인력이고, 3분의 2는 외부 인력이다. 유 교수도 학생 3명이 앨리스 검출기 업그레이드 작업에 참여하고 있어, 그걸 확인하기 위해 제네바에 2년 만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실험 시설이 있고, 내부 연구단이 그 실험을 갖고 하는 연구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한국 중이온가속기 연구소도 그런 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주 양성자가속기 얘기를 했다. 이곳에는 양성자가속기를 갖고 연구하는 ‘연구 그룹’이 없다. 외부에서 찾아오는 연구자에게 시설 이용 ‘서비스’를 제공할 뿐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은 한국 최초로 정부가 ‘순수과학’ ‘기초과학’을 키우기 위해 만든 국립연구소다. 업계 용어로 표현하면 정부 출연 연구소다. IBS는 연구 여건이 좋아 대학 교수 자리를 관두고 이곳에 가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있다. 내가 만나 취재했던 IBS 지하실험연구단의 이현수 박사는 원래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였다. 대학 교수라는 보장된 자리를 마다하고 IBS로 옮기려고 할 때 동료 교수들 대부분이 말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현수 교수는 암흑물질을 찾는 실험에 몰두하고 싶어 IBS로 옮겼다. IBS 말고는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그만한 위상을 갖고 있는 곳이 없다. 대덕에는 정부 출연 연구소가 각 분야에 걸쳐 수십 개 있으나 한국 기초과학 연구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 출연 연구소 혁신이 끝없이 논의됐으나 겉돌고 있다. 여전히 대학이 연구자가 희망하는 제1의 일터이고, 대부분의 정부 출연 연구소는 차선책이다. 다음 대통령은 출연 연구소 개혁을 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틀을 깨고 21세기 현 시대에 맞는 ‘국립연구소(National Lab)'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과기부는 과학에서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경험이 없다. 학계가 큰 프로젝트를 들고 가서 논의하자고 하면 어쩔 줄을 모른다. 정치인을 만나 그들을 설득해서 일을 만들어보라고 한다. 과학자가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고 정부를 대신해 국회의원들 만나러 다녀야 하는 게 한국 과학의 현주소다. 과기부는 대통령이 5년 만에 바뀌는데 무슨 큰 그림이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 불확실성에서도 학계와 이마를 맞대고 기초과학 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그려내야 하는 게 과기부가 할 일이다. 미국 천문학자와 천체물리학회는 지난해 11월 향후 10년 계획(decadal survey)을 관련 부처인 에너지부의 과학자들과 논의한 결과를 내놓았다. 부러웠다. 학계가 당국과 논의하고,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이후에는 미국 천문학은 뭘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하는 큰 그림을 그렸다. 한국은 그런 게 없다. ‘10년 계획’이 뭔지 궁금하면 위키피디어 ‘Astronomy and Astrophysics Decadal Survey‘ 페이지에 들어가 보길 권한다.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 R&D 규모는 꾸준히 늘어났다.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 예산(국가과학기술연구회, 직할출연기관 연구운영비 제외)은 2021년에 4조6061억원이었고, 2022년에는 5조491조원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돈은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연말이 다가오면 받은 그해 연구비를 다 쓰기 위해 불필요한 장비를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닐을 개봉하지도 않은 채 폐기 처리되는 장비가 넘쳐난다고 한 과학자는 말했다. 한국 과학의 도약을 위해 다음 대통령이 할 일이 많다. ‘기술‘의 성공을 ’과학‘에서도 만들어내야 할 때가 되었다.
요약
한국 정부는 지난 50년간 기술 투자에 성공해 기술 강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정부의 R&D 투자는 실패했다. 한국 과학이 세계 정상에 도달했다는 신호가 없다는 게 그 증거다. 과학에 대한 투자가 없어서 그런가? 요즘 현장의 과학자는 “연구비가 적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미국 못지않게 연구 환경이 좋아졌다,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과학 연구라는 게 원래 그렇기도 하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지만 정부가 큰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측면도 있다. 특히 ‘빅 사이언스’ 경험이 없는 게 약점으로 작용한다. 물리·천문 분야를 보면 고에너지 물리학의 ‘입자가속기 실험’ ‘지하 중성미자 관측 실험’ ‘대형 천문학 실험’을 해본 적이 없다. 담당 부처인 과학기술부는 일정액 이상인 실험은 만들어본 적이 없다며 학계가 특정 실험을 하자고 요청하면 절절맨다. 학계와 정부가 긴밀하게 협의하여 한국 과학을 어떻게 밀고 나갈지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최준석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뉴델리특파원 ▷카이로특파원 ▷주간조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