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치 밴드’ 음악에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춤사위를 입힌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이 유튜브에서 9억 뷰를 기록하는 빅 히트를 했다. 이 영상이 2020년 가을부터 화제에 오르고 ‘이날치 밴드’가 뜨면서 19세기 소리꾼 이날치가 부활하고 있다.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를 듣다 보면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판소리가 현대 악기의 리듬과 반주를 경쾌하게 넘나들며 21세기에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동아 같은 뒷발로
양 귀 찌어지고
쇠낫 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자라) 정신없이 목을 움츠리고
가만이 엎졌것다…
수궁전(水宮傳)에서 토끼를 데리러 육지에 온 자라(거북이)가 호랑이를 잘못 불러 소동이 벌어진 장면이다. 이날치 밴드는 ‘서편제의 수령’(《조선창극사》의 표현) 이날치를 오마주한 보컬이다. 오마주는 존경하는 사람의 업적이나 재능에 대해 경의를 표해 스타일이나 분위기를 따라 하는 것이다.
이날치 박동실을 배출한 담양은 서편제의 본향(本鄕)이다. 조선일보사가 1940년 출간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는 이날치(李捺致·1820~1892)의 소리를 신기(神技)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 수리성(거칠고 탁한 소리)인 성량이 거대하여 춘향가 중 신관사또 부임 대목에서 나팔소리를 흉내 내면 실물 나팔 소리와 구분 안 되고, 그가 ‘뎅뎅’하고 인경 소리를 내면 실제 인경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고 전한다. 애원과 한탄으로 청중의 한숨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다가도 해학과 골계로 포복절도케 하는 소리와 발림(제스처)을 보면 천하장관이었다는 것이다.
새타령을 하자 새가 날아 들어와
이날치가 스승 박유전에게서 물려받은 새타령은 독보적이었다. 법국새 쑥국새의 소리를 내면 실물의 새가 소리를 따라 날아 들어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한문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임규(林圭·1867~1948)의 목격담에 따르면 어릴 적에 고향 익산의 미륵산 중턱에 있는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타령을 듣는데 새가 날아 들어오는 것을 보고 청중이 모두 그 귀신 같은 재주에 경탄했다고 한다. 신라시대에 솔거가 황룡사에 소나무 그림을 그려놓자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가 가끔 날아 들어와서 나뭇가지에 앉으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날아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연상시킨다.
이날치의 본명은 경숙(敬淑). 전남 담양 출신이나 만년에 묻힐 자리를 찾아 장성으로 가서 일흔두 살에 생을 마쳤다. 그는 머슴을 살던 주인으로부터 한자와 풍수지리를 배웠는데 장성에 명당이 많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 했다고 한다.
담양의 향토사학자 이해섭 씨는 2004년 서편 판소리의 유적지를 답사하던 명현(현 국립남도국악원장)에게 "이날치는 창평 고씨들의 집성촌인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창평면 해곡리 얼그실 마을 유한기 씨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는 말을 들려줬다. 유 씨는 조선말엽 집강(執綱·면장)을 지냈다. 유 집강의 후손들은 이날치가 어깨너머로 한문과 풍수지리를 깨칠 정도로 영특했다는 말을 조상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한다. 이날치는 유 씨의 총애를 받아 서울 장성 등지로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우연히 창하는 곳에 들러 광대들의 줄타기와 판소리를 처음 접하고 예인(藝人)의 꿈을 키웠다.
유 집강이 얼그실에서 수북면 대방리 포백마을로 이사갈 때 열여덜 살 안팎이던 이날치도 따라갔다. 이날치의 증손녀 이일주(85·전라북도 판소리 무형문화재) 씨 집안에 내려온 이야기에 따르면 유 씨는 가세가 기울자 “너를 더는 거둘 수 없으니 나가 살아라”고 이날치를 내보냈다. 이날치는 주인 집을 나와 서울 장성 등지로 심부름을 다닐 때 봐두었던 광대패를 찾아나섰다.
처음에는 빠른 몸동작으로 줄타기에 소질을 보여 '날치'라는 예명(藝名)을 얻었다. 이날치는 줄타기의 명수로 만족할 수 없었던지 소리꾼이 되려고 동편제 명창 박만순의 수행고수(隨行鼓手)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연희집단은 일인다역(一人多役)을 했다. 이날치에게 고수는 판소리를 배우기 위한 과정이었다. 19세기에 살다간 박만순은 송흥록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판소리 애호가인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무과 선달(先達) 벼슬을 받았다. 명성에서 생긴 자부심과 오만이 넘쳤던 모양이다. 이날치는 연하의 소리꾼에게 세숫물과 발 씻을 물까지 떠다 바치는 수모를 견디다 못해 “나도 소리꾼이 되자”고 결심하고 무등산 증심사에 들어가 각고 연마를 했다.
이날치는 순창 출신 명창 박유전(朴裕全·1835~1906) 문하에서 수년간 도야해 박 씨의 법제를 계승했다. 마침내 이날치는 발 씻을 물을 떠다 바친 박만순과 겨루는 실력이 됐다. 박만순의 소리는 식자(識者)들이 좋아했지만, 이날치의 소리는 남녀노소 시인묵객 나무꾼 할 것 없이 찬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조선창극사》에 전한다.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1815~1882)은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얼굴에 희로애락을 표현하지 않았다. 어느 날 좌의정을 지낸 김병학이 “이날치가 소리로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명창”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이최응이 “졸장부라면 몰라도 대장부가 미천한 광대에게 감정의 지배를 받아 웃고 울 수가 있겠느냐”고 퉁을 주었다. 그래서 실제로 이날치를 불러서 시험을 해보기로 하고 “내가 소리를 듣고 눈물을 떨어뜨리면 천금을 주겠지만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하면 명창이 목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치의 소리 증손녀로 이어져
이날치는 목숨을 걸고 심청가 공연을 했다. 심청가 중 공양미 삼백석에 몸이 팔려 남경 선인들에게 끌려가면서 부녀가 이별하는 장면, 피눈물을 흘리면서 허둥지둥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광경을 처절한 곡조로 표현했다. 듣는 사람은 물론이고 귀신도 따라 울 만큼 슬픈 가락이었다. 이최응은 뒤로 돌아앉아서 눈물을 닦고 약속대로 큰돈을 주었다.
하늘이 이날치의 소리 DNA를 버리기가 아까웠던가 보다. 이날치의 증손녀 이일주 명창에 이어 조카딸인 장문희(45·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원)가 이 명창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받았다. 장문희의 어머니도 소리를 하고 무용과 장구도 두루 잘했는데 결혼하면서 접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언니 이일주에게 맡겨 장문희는 여덟 살 때부터 이모한테서 소리를 배웠다.
이일주는 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 공연을 하고 임금으로부터 무과선달 교지(敎旨)와 금토시를 받은 증조부 이날치의 이야기를 아버지 이기준으로부터 자주 들으며 자랐다. 선친은 기름을 먹인 한지에 임금 옥새가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찍힌 벼슬종이(교지)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러다가 6·25 전란 중에 "이것으로 해를 입을지 모른다"며 불 태웠다는 것이다.
이일주는 박초월 김소희 오정숙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지만 증조부 조부 아버지로 내려온 더늠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이일주의 또 다른 후계자 송재영은 말한다. 더늠은 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을 가리킨다.
이날치의 아들은 소리꾼에 대한 천대가 싫어 자기 집안의 가계를 모르는 타관인 부여로 와서 살았다. 이일주의 할아버지대 이후로는 족보도 없다. 그러나 이일주의 손자 이기중은 DNA에 끌렸던지 선조의 소리를 다시 붙들었다.
이날치가 머슴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의 청소년수련원 초입에는 이날치 기념비가 서 있다. 1987년 전석홍 전남지사 시절에 세운 비석이다. 비문에는 이날치가 수북면에서 태어난 것으로 잘못 기록돼 있다. 이날치가 머슴살이를 한 얼그실은 문화 유씨의 집성촌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처가 동네였다. 지금도 16세기 이전에 지은 유종헌(柳宗憲) 가옥이 잘 보존돼 있다. 송강이 문화 유씨 종가(宗家)의 손녀와 결혼해 이 집에 신방을 차렸다.
박동실의 딸은 영화 '서편제' 모델
박동실은 아홉살 때 아버지 박장원과 명창 김재관으로부터 처음 소리를 배웠다. 예술적 자질이 뛰어나 김채만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지 1년이 지나 춘향가를 완창해 ‘애기 명창’으로 이름을 얻었다. 박동실은 이날치-김채만으로 이어져 내려온 서편제의 맥을 이으면서도 독공(獨功)으로 동편제 소리를 섞어서 자신만의 소리 세계를 구축했다. 판소리 연구자 김기형은 “박동실은 특정 유파에 섞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과 완성된 예술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했다.
판소리는 '방안 소리'와 '무대 소리'로 구분할 수 있는데, 박동실은 '무대 소리'에 능했다. 그만큼 성량이 풍부하고 청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박동실이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 것은 1934년 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에 정착하면서. 이 마을에는 박석기(朴錫驥·1900~1953)라는 후원자가 있었다. 박석기의 부친은 아전 집안 출신으로 부를 축적해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박석기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화려한 학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 하에서 출세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박석기는 민족의식에서 국악 쪽에 열정을 보였다. 명창 김소희가 그의 부인이다.
당시에는 박석기 처럼 지방 향리(鄕吏) 집안 출신들이 판소리를 후원함으로써 전승과 보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창(高敞)현의 이방과 호장을 하며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소리꾼을 후원한 신재효(申在孝)가 대표적인 사례다. 고을의 향리(鄕吏)들은 관아의 행사를 하며 판소리와 소리꾼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대를 물려 구실아치를 하며 축적한 경제력으로 판소리의 패트론이 될 수 있었다.
전통예술을 사랑해 보존과 전승에 관심을 기울인 박석기는 지실 마을에 초당을 짓고 송만갑과 정정렬이 추천한 명창들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선생을 정했다. 박석기가 최종 낙점한 사람은 박동실이었다.
지실 초당에서 박동실이 판소리를 가르치고 거문고는 거문고 산조(散調)의 대가인 박석기가 직접 맡았다. 가사문학관 뒤 지실마을 초입에 이 초당이 지금도 옛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본래 이곳은 삼간 겹집의 초가 본채와 초당, 문간채, 마구간으로 구성돼 있고 마당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초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과 연못은 사라졌다. 지실초당 시기에 박동실로부터 배워 명창이 된 제자는 김소희 한승호 임춘앵 한애순 장월중선 등이다.
지실초당은 가사문학관 바로 뒤에 있다. 이런 연유로 2001년 봄 가사문학관 경내에 박동실 기념비가 서게 됐다.
지실마을에서 소리꾼 제자 길러
판소리는 서편제 동편제 중고제로 나뉜다. 서편제는 섬진강의 서편 지역, 광주 담양 보성 나주 고창 등이 전승지이다.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편지역 운봉 순창 구례 흥덕에서 전승됐다. 중고제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불려졌다. 서편제는 특히 임권택 감독의 동명 영화가 서울에서 최초로 100만 관객을 끌면서 이름이 높아졌다.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이런 민족의식과 소리광대로서 신분차별에 대한 반감이 사회주의 의식 형성의 계기가 된 것 같다. 미군정하에서 체포령이 떨어지자 숨어지내다 전쟁 중에 북으로 넘어갔다. 판소리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 됐다. 그에게 소리를 배운 제자들조차 한동안 스승의 이름을 드러내기를 주저했다.
북한 인민배우로 '민족음악대전집' 수록
그는 북에서 공훈배우를 거쳐 1961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중국에서 베이징 셴양 옌볜 등 조선족이 많이 사는 지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창극 춘향전을 현대화 하는 사업을 진행, 탁성을 제거하고 남녀 성부를 구분하며 가사에서 한문투를 없애는 사업을 했다.
그가 완성한 ‘판소리 5가’는 북한에서 국보처럼 여기는 ‘민족음악대전집’에 실렸다. 그는 북한에서 독신으로 살며 수양딸 박영선(본명 오영선·평양음악무용대학 교원), 사위 김철현(4.25 예술영화촬영소 공훈배우)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월북 후 서편제 소리의 고향 담양 땅을 밟지 못하고 1968년 12월 4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김기형 《판소리 유파와 명창의 세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20
2.명현 편저 《개정판 명창을 알면 판소리가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 2010
3.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담양군의 민속문화》 담양군, 2003
4.이규섭 《판소리 답사기행》 민예원, 1994
5.정노식 지음, 정병헌 교주 《교주 조선창극사》 태학사, 2020
6.최동현 《명창이야기》 신아출판사, 2011
7.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만순 박석기) 한국학중앙연구원
8.한명석 <담양출신 판소리 명창 박동실의 북한에서의 행적> 《담양人신문》 2005.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