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의 6남 5녀 중 4남으로 태어난 전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된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에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군사 반란)를 일으킨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까지 체포하고 전방 육군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키며 군 내 권력에서 사실상 최고 권력으로 등극했다.
국방부와 육본을 점거하고 군권을 잡은 전 전 대통령은 이듬해 자체적으로 중장 진급을 하고 정적 숙청에 나섰다. 이러한 전 전 대통령 행보를 본 국민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민심 달래기 대신 무력 진압을 택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조치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민 시위대를 유혈진압했다. 이러한 행위는 전 전 대통령이 사망 직전까지 국민적 비난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다.
전 전 대통령은 불합리한 당선과정을 거친 만큼 국민의 시선을 돌릴 것이 필요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부흥한 3S가 이를 위해 나온 대표적인 문화정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S란 영상(Screen)·스포츠(Sports)·성문화(Sex)를 의미한다.
전두환 정부는 문화정책을 통해 컬러TV 보급을 확대하고 영화 상영 검열을 파격적으로 완화했다. 또한 프로야구, 프로축구, 씨름 등 스포츠 리그를 대거 창설했다. 당시 한국 경제 상황도 문화정책 구현에 한몫했다. 저유가‧저금리‧저달러를 의미하는 ‘3저 호황’을 누린 한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잇달아 유치하며 위상을 높였다.
그 사이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국민의 분노는 더 커졌다. 대통령 취임 전 삼청교육대 등 사회보호법을 실시했던 전 전 대통령은 꾸준히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언론 통폐합 조치, 보도지침에 이어 각종 비리·부패를 일으키고 호헌조치까지 발표하며 독재 정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사망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는 극에 달했다. 이는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굴복했다. 전 전 대통령이 후임자로 점 찍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간선제 대신 직선제 개헌을 택하고 6월 항쟁이 일어나자 6‧29 선언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1995년에는 반란수괴죄와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무기 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2년 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특별사면됐다.
이후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상반된 행보를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2628억원을 완납했으며 유언으로 5·18 희생자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전 전 대통령은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며 항소심 재판 공판기일 6일을 앞두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