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慕賢館·근대문화유산 769호)은 보물 제260호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연못 안에 지은 수장고(收藏庫)다. 미암일기와 목판은 원래 사당에 보관하다가 1957년 화재와 도난을 막기 위해 후손들이 모현관을 세워 옮겼다. 사람들은 섬 안의 도서관을 작은 다리로 드나들었다. 모현관 편액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의 글씨다.
연못 남쪽으로 수령 600년이 된 느티나무들이 모현관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다. 바로 위 산비탈에서 미암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연계정(連溪亭)이 노거수(老巨樹)들을 내려다본다. 모현관은 주위 풍광과 어울리는 멋진 건물이지만 책과 목판이 습기에 약하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2012년 준공된 미암박물관은 모현관에서 옮겨온 미암집 목판 369편과 미암일기 11책, 미암이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탔던 초헌(가마) 등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표류기 《표해록》의 최부가 외조부
집안과 조정의 대소사를 적은 미암의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1,800여명. 아내가 집을 나간 종을 비롯해 김인후 기대승 송순 이황 허준 정철 등 미암과 교유했던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미암의 외조부는 《표해록(漂海錄)》의 저자 최부(崔溥· 1454~1504).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임지인 제주를 떠나 고향 나주(羅州)로 향하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중국의 저장성(浙江省) 해안에 닿는다. 표해록은 필담(筆談)으로 현지 관리와 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베이징(北京) 랴오둥(遼東) 의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겪은 이야기다. 성종의 명을 받아 한문으로 지어 올렸다. 최부는 정치적으로는 불운해 연산군 때 처형을 당했다. 표해록은 일본에서 널리 읽혔고 1769년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번역본까지 간행되었다. 외손자인 미암은 표해록 간행을 주도하고 발문을 썼는데 발문에서 ‘일기(日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26세에 문과 별시 병과로 급제한 미암은 벼슬살이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홍문관 수찬이 되었을 때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수렴첨정이 시작되었다. 을사사화 2년 뒤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이 말을 갈아타던 양재역에 문정왕후와 그 일파를 비난하는 벽서(壁書)가 나붙었다.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 사건을 이용해 정적들을 제거했다. 미암도 이 사건에 휘말려 제주도에 유배갔다가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됐다.
종성은 세종 때 여진족의 공격에 대비해 설치한 육진의 하나. 종성 사람들은 활 쏘고 말타는 것을 좋아했지만 문자를 아는 이가 적었다. 미암이 이곳에 가자 많은 사람들이 글을 배우러 찾아왔다. 여기서 그는 1만권에 이르는 서적을 독파했다고 옛 문헌은 전한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하면서 미암은 종성에서 충청도 은진으로 이배됐고 1567년 선조 즉위와 함께 길고긴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선조는 신하들과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고 토론하는 경연(經筵)을 중시했다. 선조는 경연 중에 궁금한 것이 생기면 미암에게 자주 물었고 미암이 막힘 없이 대답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선조) 여러 군데에 나와 있다.
선조는 미암의 저술 중에서 ‘유합(類合)’에 대해 정밀하고 깊이가 있다고 칭찬하면서도 글자 뜻풀이에 사투리를 쓴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 전라도 해남이 고향인 미암은 자신이 본래 외방 고을에서 태어나 사투리는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다.
미암은 족질(足疾)과 소갈증(당뇨)이 심했다. 유배기에 운동을 하지 않고 고되게 학문을 했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미암일기에는 미암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미암은 아플 때면 허준(1539~1615)을 가정의처럼 불러 처방을 받았다. 가까운 사람들이 아플 때도 허준을 보내 진료를 받게 했다.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궁중의 내의원(內醫院)으로 천거한 사람도 미암이었다(미암일기 1569.6.3.). 허준은 미암일기에 30여 차례 등장한다.
미암의 정치 철학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중정(中正)함으로 존심(存心)하며 편당(偏黨)한 바가 없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미암은 “두 붕당 중에서 한쪽이 패하면 중립한 자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하고 사사로운 뜻으로 해하려는 자에게는 정색으로 쳐내고 두려워서 혹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암일기 1576.10.4). 미암은 당대의 사림(士林)으로부터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중정 철학은 정치적 양극화로 극단으로 치닫는 현 세태에서도 소중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 미암은 “비록 올바른 노여움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절도에 맞게 해야지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미암은 성균관 시절에 동문수학했던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1510~1560)와 가깝게 교유했다. 미암의 둘째 아들 경렴은 총명하지 못한 편이었다. 미암이 종성에 유배 갔을 때 하서가 경렴을 사위로 맞아 우정을 보였다. 미암은 과거에 붙을 능력이 없는 이 아들을 음서(蔭敍) 제도로 참봉을 시켜주려고 가까운 사람들과 의논했다. 음서는 전ㆍ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관행이다. 경렴이 영릉(英陵) 참봉이 된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사표를 내고 해남에 내려가 자손이나 가르치며 어둡고 졸렬함을 지키고 한가하게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는 뜻을 밝히자 미암은 ‘자식이 자신을 안다’고 평했다(미암일기 1571.5.20). 능참봉은 ‘나이 60에 능참봉’이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변변찮은 벼슬이었다.
덕봉이 남편 만나러 마천령 넘다
미암에게는 20년 피바람이 이는 당쟁에 휘말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가정을 지키고 남편에게 쓴소리로 실수를 막아주는 아내가 있었다. 미암이 아내 송덕봉(宋德峰·!521~1578)에게 홍문관 관리로 한양에서 벼슬하며 4개월 동안 홀로 살면서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생색내는 편지를 보냈다.
덕봉의 답신은 따끔했다. ‘군자는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성현의 가르침이니 어찌 나 같은 아녀자를 위해 억지로 힘쓸 일이겠습니까. 만일 속마음이 확고해져서 물욕(物慾)이 가리기 어려우면 저절로 마음의 찌꺼기도 없어질 것인데 어찌 안방 아녀자의 보은을 바라십니까.’
덕봉은 이어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당신은 만리 밖에 있었고. 내가 지성으로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르자, 곁에 있던 사람은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더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남편을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19년 독수공방하며 부모 모시고 자식 길렀는데 당신은 바람 안 피운 것이 자량이냐’는 마지막 한방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시어머니의 3년상을 치른 덕봉은 조선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 종성, 남편의 유배지를 향했다. 그녀는 열여섯의 나이로 여덟 살 위의 남편을 만나 스물일곱 살에 생이별을 했다. 덕봉은 함경도 마천령을 넘어가다가 ‘마천령에서 읊다’(摩天嶺上吟)라는 시를 남겼다.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마천령에 이르니(行行遂至摩天嶺)
동해가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구나(東海無涯鏡面平)
부인의 몸으로 만리 길을 어이 왔는고(萬里婦人何事到)
삼종의 의리 무겁고 이 한 몸 가벼워서지(三從義重一身輕)
미암이 제주에서 종성으로 옮겨갈 때 수발을 드는 여종이 따라갔다. 미암은 이 비첩과의 사이에서 네 자녀를 두었다. 덕봉은 첩의 딸 혼사도 두루 보살폈다. 미암은 이런 덕봉의 주장이나 충고, 일처리에 대하여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덕봉의 한시 38수가 시집으로 묶여졌으나 산일(散逸)되고 ‘미암일기’ 말미에 25수만 남았다. ‘중양일(음력 9월9일)에 가족이 모여’(重陽日族會)는 조금 부족한 둘째 아들이 미관말직 ‘능참봉’이 되어 돌아온 소회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오늘 중양절의 가족 모임인데(今日重陽會)
국화가 안 피어 참으로 서운하네(眞嫌菊未開)
우리 아들 말직이기는 하다만(吾兒雖末職)
백의로 돌아온 것보다는 낫구나(猶勝白衣來)
덕봉은 가양주 담그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 시대 부녀자들은 술이 잘 익었는지 맛을 보다 술을 배웠다. 덕봉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스트레스를 가끔 술로 풀었다. 많지 않은 시 중에 취흥에 겨워 지은 시가 여러 편이다. 그중 ‘술에 취하여(醉裏吟)’는 규방에 갇혀사는 조선 여인네의 감상(感傷)을 적어놓았다.
천지가 비록 넓다고 말들 하지만(天地雖云廣)
깊은 규방에선 그 모습 다 못보네(幽閨未見盡)
오늘 마침 반쯤 취하고 보니(今朝因半醉)
사해는 넓고 가없기만 한 것을(四海闊無津)
미암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데릴사위)을 해 담양 처가에 살았다. 덕봉은 담양 친정부모와 함께 살며 친정부모의 전답을 물려받았다. 친정 아버지는 “내가 죽은 뒤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한 글이 덕봉의 ‘착석문(斲石文)’이다.
덕봉은 남편이 유배 중일 때는 말도 꺼내지 않다가 전라감사가 되어 부임하자 염원을 풀 수 있으리라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미암은 누적된 폐단을 없앤다며 사사로운 일은 돌보지 않았다. 그는 덕봉에게 편지를 보내 “당신 오누이들끼리 사비를 들여 준비하면 내가 마땅히 그밖의 일을 도와주겠소”라고 말했다.
안동교 조선대 교수는 “덕봉은 여성의 신분적 제한을 뛰어넘으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유교적 덕목을 바탕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각인시킨 여성문인”이라고 평가했다.
한양에서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한 미암은 후학 양성에 뜻을 두고 사직하고 담양으로 내려왔다. 부부가 함께 장기를 두고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선조는 1577년 미암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발령을 내고 경연에 참석하라고 했다. 미암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급히 상경했으나 용안을 뵙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아들 경렴이 담양으로 운구해 장사 지냈다. 덕봉은 미암이 별세한 지 7개월 뒤인 1578년 설날에 세상을 떴다.
김영찬의 서암일기(棲巖日記)
미암 서거 282년 뒤에 태어난 담양의 선비는 자신의 일기 곳곳에 ‘미암 선생 재실에 들어가 고적(古籍)을 열람했다’라고 적을 정도로 미암일기를 애독했다.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문암마을에 사는 서암(棲巖) 김영찬(金永粲·1859~1945)이 일기를 쓴 시기는 53세 때인 1912년 1월1일부터 71세 때인 1930년 6월 15일까지.
서암의 학문 영역은 폭이 매우 넓어 경서와 사서, 예서는 물론이고 시문에도 능하여 일기 곳곳에 135수의 시문과 28편의 문장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1913년 12월 27일에는 미암 유희춘의 후손 유희적(柳羲迪)의 딸 혼례식에서 빈객이 되어 양반가의 신랑과 신부가 치르는 의식을 순서대로 상세히 기록한 민속 자료를 남겨 놓았다.
그의 일기에서는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가 통치를 시작한 시대의 모습과 함께 백성들의 반일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백성에게 고통을 준 조선총독부의 정책 중에는 공동묘지와 담배의 전매(專賣)가 있었다. 공동묘지는 우리 풍속에 맞지 않아 사람들이 밤에 몰래 묘를 쓰면서 오래지 않아 흐지부지됐으나 담배 전매는 공분을 샀다.
‘담배는 평생 즐기던 것인데 신식 담배를 전매한 이후로는 항상 그만두려고 했다. 금년 가을에 전매국 사람들이 봉초를 피우지 않는가 의심하고 어디에서 한 개비를 주워 와서 나에게 묻고 싶어 했으나 내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날카롭게 꾸짖어 보냈다. 이후 소문에 담양에서 범금자(犯禁者)가 오백명에 이르렀다는 것을 들었다…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구석에 앉아 세상을 탄식하며 절초(絶草)를 맹세했다(서암일기 1928.10.26).’
고종 때 김홍집 내각이 1895년 위생에 좋고 작업하기 편리하다는 이유로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일제는 천황이 먼저 단발하고 단발령을 내린 자국을 본받아 고종에게 일본 같은 조치를 하라고 종용했다. 일제는 단발령에 반발하는 민란에 대비해 궁궐 경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단발령으로 생긴 반감은 개화가 곧 ‘일본화’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반일 의식으로 이어졌다. 조선을 병탄한 뒤 총독부는 단발을 강요하지 않았으나 경찰서와 주재소에 따라서는 강제 단발로 인권을 유린하는 사례가 있었다. 의병장과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수록한 《염재야록(念齋野錄)》을 펴낸 조희제 씨는 1936년 임실경찰서에서 《염재야록》과 관련해 10여일 동안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단발을 종용당하자 자결해 순국했다. 서암의 아들도 강제로 단발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3일 동안 석고대죄했다는 일화가 집안에 내려온다.
서암은 어떤 순사가 매화 한 가지를 꺾어 들고서 대덕면 금산리 수남(水南)에 사는 양우(梁友)에게 시를 지으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단발령을 풍자하는 시를 일기에 적었다(서암일기 1912.4.7.).
매화 한 가지를 꺾어 손에 드니(手取梅花第一枝)
가엾게도 봄소식을 벌이 먼저 아네(可憐春色蜂先知)
머리에 꽂고 노는 것은 아이 일만은 아닌데(揷頭嬉戱非童事)
단발이라 마땅히 꽂을 데가 없구나(頭髮無因妥導爲)
육촌동생이 서암을 찾아와 마을 사람이 선산의 묘지 옆에 심은 나무 7그루를 함부로 베어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서암이 초동과 목동들을 불러놓고 추궁했더니 스스로 "다섯 그루는 내가 벴고 두 그루는 다른 사람의 짓"이라고 자백하는 자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일본인이 통치하고 있어서 법률이 엄중한데 같은 민족으로서 그들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하는 것도 인정이 아닌 것 같아서 각자가 스스로 매질을 하라는 벌을 내리고 풀어주었다(서암일기 1912.12.30).
서당에서 학동들을 교육하는 일이 주업이었던 저자는 장성, 장동, 옥과(곡성의 옛지명), 월산 등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19년 4월 8일의 일기는 고종황제(1919년 1월 21일 붕어)의 국상 기간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이웃 학당에서 어린 학생이 두세 번이나 찾아와 청하기에 가봤더니 그 학당의 스승이 한창 시를 노래하고 있었다. 이에 서암은 “옛날의 예악이 좋다면 좋은 것이지만 국상 기간에는 불가하니 깊이 양해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양자로 입적한 서암은 양부(養父)가 위독하자 단지(斷指)를 했다. 양부는 고비를 넘기고 3년을 더 살았다. 서암은 그러나 단지로 소생하지 못하면 더 큰 불효과 된다는 이유로 후손들에게 단지를 금했다. 이같은 이야기는 서암의 비문에 들어가 있다.
서암은 이 지역의 양대 학자인 미암과 하서 김인후의 제사를 챙겼다. 서암은 일기에서 우리나라 부인 중에 문장가가 3명 있다며 미암의 부인 송덕봉, 조원의 첩실 이옥봉(李玉峰),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許蘭雪軒)을 꼽고 덕봉과 옥봉의 시를 서암일기에 소개했다.
서암일기는 나라를 잃은 시기에 교육자로 살던 지식인의 고뇌와 인문사상, 그리고 시대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문적인 연구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김영찬 《서암일기》 한국학호남진흥원, 2019
2.노기춘 《미암박물관 도록》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2019
3.담양군 주최, 한국학호남진흥원 주관 ‘조선의 여성작가 송덕봉의 삶과 문학 학술대회’(2017) 발표 논문. 안동교 ‘송덕봉의 생애와 시문 활동’, 문희순 ‘16세기 조선의 여성문인과 송덕봉’, 김영 ‘한일 고대 여성문학에 나타난 혼인제와 여성’
4.문희순 안동교 오석환 《국역 덕봉집》 심미안, 2012
5.이연순 《미암 유희춘의 일기문학》 혜안, 2012
6.《여행자의 도시 담양》 담양군 녹색관광과, 2020
7.《조선왕조실록(선조 최부 단발령 조희제)》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