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다 소유했던 리어왕은 모든 것을 잃고서야 인생의 본질을 깨닫는다.
연기 인생 65년의 대배우 이순재(86)는 심오한 메시지를 연극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전달했다. 80대의 리어왕이 살아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표정과 말이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은 삶의 비극과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담아낸 걸작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숭고하고 압도적인 예술성과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는 작품이다.
행복한 은퇴를 꿈꾸었던 리어가 왕관을 내려놓은 후 겪게 되는 처절한 비극과 힘겨운 여정을 통해 권력 앞에서 자취를 감춘 진실의 가치를 조명하고, 나아가 인간 본연의 냉혹함과 인생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이순재 배우는 공연시간 3시간 20분에 달하는 ‘리어왕’의 23회 전회차를 홀로 감당해낸다. 65년의 내공이 느껴지는 연기에 관객들은 숨죽였다. 때로는 배신에 치를 떨며 격한 분노를 토해냈고, 때로는 할아버지 같은 포근한 위로를 건냈다.
2021년이라 이 작품은 더욱 특별하다. ‘리어왕’은 1606년경 셰익스피어가 대규모 흑사병의 만연으로 격리된 상태에서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이순재 배우는 “흑사병이 휩쓸던 유럽에서도, 코로나19로 전 세계의 시름이 깊어지는 요즘도 소수자, 가난한 자에게 그 피해가 더 혹독하다”라며 “너무나 가혹한 죽음의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리어왕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삶들의 고통도 안고 가는 리더십이 오늘 우리들에게 발휘되기를 희망한다”라고 공연 안내 책자에 적었다.
리어왕이 모든 사람이 같이 하기를 꺼리는 미치광이 거지 톰을 ‘현자’라고 일컬으며, 격의 없이 대화하는 장면은 지도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이순재 배우가 중심을 잡은 가운데 이연희(코딜리아&광대 역), 박용수(켄트 백작 역), 박재민(에드가&톰 역), 박영주(에드먼드 역) 등의 배우는 인상 깊은 연기로 극을 끌고 나갔다.
‘리어왕’을 거대한 산과 같은 작품이라고 표현한 이현우 연출은 ‘원작에 충실한 셰익스피어 본연의 리어왕’이라는 나침반과 함께 높은 산을 힘차게 올랐다.
운문 70% 산문 30%로 이뤄진 작품의 번역에 중점을 둔 이 연출은 “셰익스피어의 대개의 극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리어왕’도 몇 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이번엔 가장 정교하게 출판되어 흔히 정전본이라 일컬어지는 ‘제 1이절판본’(1623년)을 선택했다”라며 “아마도 이번 공연은 ‘제1 이절판본 리어왕’을 국내에 선보이는 최초의 시도가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코딜리아 공주와 광대를 같은 인물로 일치 시킨 설정도 설득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