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시크릿 선샤인'...물빛에 숨은 밀양의 가을빛

2021-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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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못 풍광을 바라보는 여행객 [사진=기수정 기자]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인 영남루
밀양강 절벽 위 웅장한 그림자 떨구다
어둠 내리면 찬란한 불빛에 되살아난다

통일신라 농업을 위해 축조된 위양못

흔들리는 햇살과 고목이 투영된 물빛
바람 그치면 한폭의 담채화가 펼쳐진다

물고기떼가 불법에 돌이 됐다는 만어사
검은 돌 두드리면 물고기가 깨어난 듯
맑은 종소리가 마법처럼 울려 퍼진다


영화 '밀양' 한 장면. 종찬(송강호)이 신애(전도연)에게 밀양을 '비밀 밀(密), 볕 양(陽)'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고보니 영화 영어 제목도 'Secret Sunshine'이다. ​슬픔 속에서도 그 안에 따뜻한 인정, 햇빛 같은 웃음이 숨어 있다는 말이 은유적으로 표현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밀양(경남)에 가면 슬픔 속에서 숨어든 인정, 따스한 빛을 찾을 수 있을까.' 괜스레 마음이 이끌렸다.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밀양 곳곳에는 코로나 확산세라는 '슬픔'에 따스한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잔잔한 풍광을 품은 위양못이 그랬고, 선선한 강바람 불어오는 영남루가 그랬다. 믿을 수 없이 기이한 전설을 품은 만어사도······.
 

해가 진 후, 형형색색의 불빛이 영남루를 환하게 비춘다. [사진=기수정 기자]

◆강바람 맞으며 쉬어가리···영남루

과거에 소리 명인을 만나기 위해 영남루를 찾은 적이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사방으로 탁 트인 누각에 올라앉아 살며시 눈을 감으니, 당시 명사가 전해왔던 소리가 찰나에 스친다. 가슴 속에 남았던 그 울림을 떠올리며 오롯이 잔잔한 풍광을 감상하기로 한다.

밀양강 줄기를 따라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영남루에 올라 선선한 강바람을 즐기는 이들도 적잖다. 오랜 세월의 더께를 품은 기둥에 기대어 앉아 쉬는 이들도, 서서 저 멀리 강줄기의 흐름을 지켜보는 이들도 더러 있다. 옛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와는 다른 정취에 푹 빠져든 듯하다. 

영남루는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동서 5간, 남북 4간의 팔작지붕에다 좌우로 2개의 딸린 누각을 거느린 이 거대한 2층 누각은 신라의 5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건물인 소루였으나, 영남사가 폐사되고 난 이후 고려 공민왕 때 그전부터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해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1884년에 밀양부사였던 이인재가 다시 세웠다. 

영남루 누각에는 역사의 흐름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당대 명필가들의 작품이 편액으로 즐비하게 남아 있다. 뜰에 깔린 석화 또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끈다.

영남루의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 모양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해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극대화했다.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전한다.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해 그 그림자는 퍽 웅장하고 경관은 수려하다. 그 덕에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선정한 조선의 16경에는 영남루도 포함됐다. 

영남루 자체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본루에는 당대 명필가들이 쓴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7세의 이현석이 썼다는 ‘영남루(嶺南樓)’와 10세의 이증석이 썼다는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에는 천재들의 호방한 기질이 엿보인다.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로 지정돼 저녁 6시면 입장이 제한된다. 관리인은 시곗바늘이 6시를 채 향하기도 전에 "나가 달라" 읍소한다. 천천히 내려온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리고, 형형색색의 불빛이 영남루와 그 주변을 장식한다. 밀양강변에 서서 강줄기가 품은 영남루의 반영을 눈과 마음에 오롯이 담아본다. 
 

위양못 풍경[사진=기수정 기자]

◆잔잔한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다···위양못

'시크릿 선샤인'이 위양못(경남문화재자료 167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던가. 가을빛 짙게 휘감은 고목 사이로 슬며시 내리쬐는 햇살, 하늘과 고목이 고스란히 투영된 물빛에서 어렴풋이 시크릿 선샤인의 형상이 그려진다. 영화 '밀양'과는 무관한 위양못이지만, 그 속뜻에는 제법 걸맞은 듯하다.

제법 서늘한 날씨 속에서도 위양못의 서정을 느긋하면서도 농밀하게 만끽하고 싶어진다. 

위양못은 통일신라 때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 축조했다. 양량지(陽良池)라고도 불리며, 임진왜란 때 훼손됐으나 1634년 밀양부사 이유달이 다시 쌓았다. 제방 둘레가 1.8km에 이르는 저수지였으며, 5개 섬이 있었다. 자연을 벗 삼은 이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지금의 위양못 역시 농지보다 사람의 마음에 풍류라는 물을 대는 여행지에 가깝다.

여행지로서 위양못의 절정은 보통 5월을 이야기한다. 5월에 위양못은 이팝나무꽃이 활짝 피는 덕이다. 사진작가들은 그 풍경을 담고자 물가에 삼각대를 세우고 저수지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셔터를 누른다.

위양못이 품은 아름다움은 계절이 흘러도 변함없다. 깊어가는 가을에도 위양못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저수지 위에 반짝이는 가을 햇살,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여유가 찾아든다. 

위양못 둘레길을 오롯이 걷는 시간은 설렘을 안긴다. 둘레길은 주차장 앞쪽에서 출발해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순환 코스다. 저수지 동쪽에는 안동 권씨 문중의 재실 완재정(경남문화재자료 633호)이 있다. 위양못 산책의 백미다.

둘레길은 느린 걸음으로 채 30분이 넘지 않는 호젓한 산책로다. 금세 그리고 자주 걸음이 멎는다. 단순한 코스라 여기기 쉽지만, 숲길은 위양못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다양한 고목이 어우러진 숲길의 풍경은 퍽 다채롭다.

초록의 오붓한 숲 터널을 이루기도 하고, 저수지를 담는 독특한 액자가 되기도 한다. 물론 위양못에 비치는 하늘과 숲의 반영이 둘레길의 매력을 더한다.

가끔 물가로 부는 바람이 그칠 때면 한 폭의 수묵담채화가 펼쳐진다. 자연스레 숨을 죽인 채,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물가로 가지를 드리운 버드나무의 형상 또한 시선을 빼앗는다. 호수 쪽으로 다가선 자리에는 벤치가 여럿 있어 편안하게 감상하기 좋다.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는 칠암교를 건너 저수지의 섬, 완재정으로 걸음을 뗀다. 이팝나무꽃이 만개한 5월에는 줄 서서 들어가야 하지만, 이맘땐 기다리는 수고 없이 수월하게, 그리고 찬찬히 둘러볼 수 있다. 

완재정은 1900년 학산 권삼변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팔작지붕 건물 주변으로 돌담을 쌓아 그 너머로 보이는 위양못이 둘레길과는 사뭇 다른 감흥을 안긴다. 특히 저수지 쪽으로 난 정자 앞 쪽문은 사진 촬영 명소로 인기다. 건립 당시에는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는 얘기는 완재정에 대한 흥미를 더 돋운다. 
 

만어사. 사찰 앞마당에서부터 산비탈을 뒤덮은 너덜겅 지대가 시선을 ㅇ[사진=기수정 기자]

◆물고기 만 마리 전설 품은 사찰···만어사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는 만어사의 창건 관련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의 양산지역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 한 마리와 다섯 나찰(羅刹)이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해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했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됐는데, 이들 돌에서 신비로운 경쇠소리가 났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했다.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萬魚寺)라 칭했다. 

부처님의 감화로 인해 수많은 물고기가 돌로 변해 법문을 듣는다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만어사.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법당 앞 널찍한 너덜지대에는 물고기 떼가 변했다는 돌무더기가 깔려 있다. 크고 작은 돌무더기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퍽 기이한 형상을 몸소 체험한다. 돌을 천천히 두드리니 맑은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덕에 이 돌을 종석(鐘石)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만어사는 고려 때의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과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절의 미륵전 안에는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이 자리한다. 미륵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돌을 만지면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이 득남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466호로 지정됐다. 1181년의 중창 때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견고하게 정제됐다. 

고색창연한 절의 자태는 없어도 바다를 이룬 너덜지대의 장관과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전망이 매우 좋아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자연스레 숨을 죽였고,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자연의 모든 형상이 마음을 빼앗았다. 그저 모든 것이 좋았다. 행복했고, 설렜다. 밀양 여행이 그랬다. 오래 견딘 슬픔에 내려앉은 따스한 빛, 그렇게 비로소 찾은 마음의 안정이 이번 여행이 안긴 선물이리라.
 

위양못. 저수지에 드리운 하늘과 나무의 반영이 지친 마음을 달랜다. [사진=기수정 기자]

 

사찰 앞마당부터 산비탈을 뒤덮은 너덜겅 지대[사진=기수정 기자]

영남루에서 바라본 밀양강 줄기[사진=기수정 기자]

영남루 전경[사진=기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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