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이 돌아왔다고?
백지화(白紙化)라는 말이 있다. 무엇인가를 없던 것으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모색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말은, 화가에게 딱 어울릴 것 같다. 어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거기에 덧대고 수정할 생각을 버리고 아예 백지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삶에도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확 걷어치우고 다시 새출발할 수 없을까 하는 심정 말이다. 나같은 보통 사람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 스스로를 화수(畵手, 화가 가수)라 불렀던 조영남이 다시 그림을 내거는 심경은, 백지화가 아닌 것 같다. 묵묵히 어수선해진 자리를 목장갑 따위로 털고, 멈춰섰던 자리에서 붓질을 시작하는 듯한 풍경이다.
화투짝과 바둑판, 그리고 오브제와 콜라쥬
조영남의 작업은, 얼핏 봐도 특이하고 기이하다. 그는 세상의 사물과 인간을 재현하려는 회화의 본능적 방향에 비교적 무심해 보인다. 무엇인가와 닮게 그리는 일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것의 역방향이라 할 수 있는 추상으로 내달리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근현대 한국사회의 삶 속에 무심히 내던져져 있던 것들을 가져와 불쑥 대담하게 오브제로 제시한다.
화폭 내의 공간이 유지해야할 것만 같은 일종의 진지하거나 근엄한 분위기가 휙 달아나버리는 듯한, 오브제의 충격을 그는 좀 즐기는 것 같다. 소쿠리, 노끈, 초가집은 맥락없이 화면에 등장해 스스로가 자리를 잡으면서 긴장감 있는 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림들을 가장 조영남답게 만든 것은, 태극기와 바둑판과 화투짝일 것이다. 이런 사물들은 이미 그 자체가 상당한 질서를 갖춘 회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태극기는 국가라는 묵직한 담론과 그 철학을 담은 상징물이자 일종의 추상회화라 할 수 있고, 바둑판과 화투판은 게임을 위해 정해놓은 규칙들을 기표화한 도구들이다. 그는 특유의 콜라쥬로 전체적인 생기와 기발한 미감(美感)을 자아내고, 그 기발하거나 낯선 결합들에서 빚어지는 상징과 언어들을 즐긴다. 콜라쥬는 설치물로 이어지면서 입체화하기도 한다.
2005년 늦가을 서울 정동의 경향갤러리에서 열렸던 ‘파란만장 조영남 그림전’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거기에, 어린 학생들 단체 관람객들도 있었다. 거기 조영남은 학생들을 불러 모아 간단한 미술 강연을 했다. 어린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멋있는 작품 만들고 싶죠? 그러면, 우선 집에 가서 앨범을 꺼내서 사진들을 꺼내요.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큰 화판에 자기가 붙이고 싶은 대로 붙여봐요. 자기 마음대로, 기분대로. 그러면 여러분들도 화가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붙인 것이 작품이 될 수 있어요. 왜냐고? 그건 여러분들만이 가진 마음으로 만든 것이니까. 바로 세계에서 유일한 작품이지. 이렇게 강의를 했다. 아이들이 신난다는 듯 박수를 쳤던 그 풍경이 떠오른다. 이 생각은 그가 작품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견지해온 예술적 독창성의 비밀이기도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의식과 원형(原型)
조영남의 오브제들은, 몹시 낯익으면서도 우리가 미처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았던 엉뚱한 대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영남의 화투그림은 그 낯선 파격 때문에 곧, 그의 브랜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화투가 지닌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기호, 예를 들어 노름과 도박이 빚은 비극들이나 비생산적이거나 불건전한 삶의 양상들이 풍기는 뉘앙스를, 에두르지 않고 강렬하게 소환하는 그 분위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격(格)’을 의심받는 빌미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너털웃음이나 특유의 싱거운 농담이나 잦은 구설과 결합되면서 그런 불리함을 더 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진지하고 단호한 듯 하다.
조영남의 화업(畫業)은 50년에 이른다. 1970년대 미국 체류 시절 그는 회화를 시작했다. 1976년 그의 기록에는 “향수 달래기 겸, 취미 겸, 유화에 손을 댐. 본업이어야할 음악이나 신학보다 훨씬 강도 높은 열정으로 미술작업에 고군분투”라고 적어놓았다. 향수(鄕愁)는, 그의 고국(故國)에 대한 원형적인 것들에 천착하게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시골의 풍경 속에 있던 사물들도 떠올랐고, 국경일에 펄럭이던 태극기도 생각났을 것이다. 고단한 일상 속에서, 손쉬운 재미를 찾았던 손 끝에 놓여있던 바둑알과 화투짝은 그런 궁리와 연상의 결론으로 채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의 생각 끝에 닿은 것들은 단순히 익숙한 사물이 아니라, 그 익숙함 때문에 복잡하고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지닌 ‘이 땅의 집단무의식’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바둑판을 노려보며 패배를 맛보던 사람의 내면, 혹은 재산을 통째로 날린 노름판에서 참담하게 풀려가던 화투판의 절망. 거기에는 결코 연출하거나 가식할 수 없는, 우리네 감정의 원형(原型)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는 그 무의식의 패를 넘기고 알을 굴리며, 쌓고 무너뜨리며 이 땅의 내면을 기웃거려온 눈길이었다. 이제, 그만큼의 깊이와 치열과 공력과 시간의 값을 매겨주는 진지한 딜(deal)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6년간의 유배생활, 그림 그리고 책 썼다
초대전을 여는 조영남의 말을 들어보자.
- 재판 이야기부터 좀 해달라.
“미술 대작사건 얘기부터 좀 하자면, 조수와 함께 만든 작품을 판매했다는 사기사건이었다. 이런 판례는 없었기에 세계 최초의 미술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심에서 유죄(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를 받았고 2심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되었다. 검찰에서 3심으로 옮겨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되었다. 재판 기간은 총 6년이었다.”
- 재판 6년간 어땠는가.
“재판,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6년은 그래도 괜찮은 유배였다. 그림을 더 진지하게 그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불교에 관한 노래 20곡도 만들었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서 책도 2권 썼다. 현대미술에 대한 책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 ‘시인 이상과 5인의 아해들’이다. 5인의 아해들은, 이상과 피카소, 니체, 아인슈타인, 구스타브 말러다.”
- 음악과 미술을 다 했는데, 그 차이를 묻는다면.
“음악은 처음부터 규칙으로 시작해 규칙으로 끝난다. 음악은 매우 수학적이다. 미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다. 나는 자유로움 때문에 미술에 매료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미술 대표선수였고, 용문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미술부장을 맡기도 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있는가.
“계획은 없다. 지금처럼 다시 살아갈 것이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