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제22회 세계철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대회 주제는 ‘오늘 철학을 다시 생각함(Rethinking Philosophy Today)’이었다.
이 대회는 이제껏 서양철학 중심으로 치렀던 행사를 동양철학으로까지 아우르는 의미를 지녔다. 이 대회에서 우리 철학자로 내세운 사람이 조선의 유학자인 이황, 이이, 송시열, 정약용과 근현대 사상가 류영모 그리고 그의 제자 함석헌이었다.
이즈음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류영모를 제외한 나머지 철학자들만이 친숙한 이름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류영모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출판사 메디치미디어는 최근 다산 류영모 평전 <저녁의 참사람>을 발간했다. 저자 빈섬 이상국은 한국 현대 사상의 참스승 류영모의 삶과 사상이 널리 알려지고, 그 가르침을 통해 많은 이들이 지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고 설명했다.
다석 류영모는 어떤 사람인가? 함석헌이 가장 존경했던 스승으로 한국 민주화의 개념을 이루는 ‘씨알’의 의미를 전수했던 사람, 일제 강점기 기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김교신이 우러렀던 스승으로 기독교의 참 종교화를 위해 30년간 YMCA 강연을 했던 인물, 한국 민주화·산업화·종교가치 운동에서 정신적 기반을 일궈낸 독보적 선구자,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절 광주의 빈민·고아·질환자 구호운동을 지원하고 이 지역을 ‘빛고을’이라 명명했던 사람, 북한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있는 재산을 털어 남을 돕는데 앞장섰던 실천적 삶으로 ‘북한산 성자’라 불린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왜 한국 민주화, 산업화, 종교가치 운동에서 정신적 기반을 일궈낸 독보적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식인들이 왜 그에게 열광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류영모가 이룩한 ‘다석(多夕)사상’은 현대 사상과 신학 영역에서 재발견되면서, 코로나 시대의 정신적 위축과 가치 상실기에 의미 있는 ‘K-영성(Spirituality)’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신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속에 ‘얼(성령)’로 들어와 있다. 이것이 류영모가 말하는 ‘얼나’다. 얼나는 인간 개개인의 생각 속에 들어있지만, 신과 개인을 잇는 매체다. 류영모는 인간과의 대면으로 신과의 대면을 대체하려는 종교에 대해 경고했다. 신앙은 철저히 신과 나의 단독자 대면일 뿐이며, 스스로 찾아나서는 자율행위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시대 교회들이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면서까지 집회와 행사를 강행하는 까닭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종교가 비즈니스화하고 집단의 권력으로 바뀌어 갑자기 그 생존의 기반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종교가 갖고 있는 그런 측면이 정작 종교가 해야 할 참을 행하지 않게 된 비극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그것은 코로나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노출일 뿐이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서도 선각자였다.
한국 철학계의 거장 최진석 교수는 추천사에서 “류영모는 근대 대한민국 정신의 주춧돌이며, 영성의 빛이 가득한 삶으로 자신의 시절을 성숙시키고 싶은 사람은 다석 류영모를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
다석 류영모는 한국 최고의 사상가이자 삶과 내면의 혁명을 제시한 영성의 큰 스승이다. 그는 동서양의 영성을 성찰해 기독교의 참사상을 일깨우고 ‘얼의 삶’을 실천했다.
코로나의 세계적 유행과 디지털 문명이라는 대전환기의 혼란 속에서, 우리가 지닌 최고의 ‘사상과 영성의 가치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정권의 집권이라는 한민족의 고난과 혼란의 시대에 그가 우리 곁에 다녀간 것만큼 위대한 축복이 또 있을까.
저자 빈섬 이상국은 1960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매일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 아시아경제 기자 생활을 거쳐 아주경제에서 논설실장을 맡아 글을 쓰고 있다.
시와 인물과 고전과 예술에 관심이 많아 <남자현 평전>·<옛시 속에 숨은 인문학>·<미인별곡>·<옛사람들의 걷기>·<눈물이 빗물처럼>·<추사에 미치다>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이후 다석 관련 저술에 집중하여 <다석문답: MZ세대와 K영성을 논하다>·<다석의 노래> 등을 준비 중이다.
공저 및 감수를 한 박영호는 다석의 직계 제자다. 1970년경 스승으로부터 졸업증서라 할 수 있는 ‘마침보람’을 받았다. 다석에게서 졸업장을 받은 제자는 박영호가 유일하다.
류영모가 박영호에게 사상의 성숙을 인정하고 독립을 후원해준 까닭은, 그의 치열한 공부와 한결같은 수신과 학문적인 전진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듯 박영호는 1971년부터 1985년까지 14년의 분투 끝에 다석 전기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를 펴냈다.
이 대회는 이제껏 서양철학 중심으로 치렀던 행사를 동양철학으로까지 아우르는 의미를 지녔다. 이 대회에서 우리 철학자로 내세운 사람이 조선의 유학자인 이황, 이이, 송시열, 정약용과 근현대 사상가 류영모 그리고 그의 제자 함석헌이었다.
이즈음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류영모를 제외한 나머지 철학자들만이 친숙한 이름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류영모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다석 류영모는 어떤 사람인가? 함석헌이 가장 존경했던 스승으로 한국 민주화의 개념을 이루는 ‘씨알’의 의미를 전수했던 사람, 일제 강점기 기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김교신이 우러렀던 스승으로 기독교의 참 종교화를 위해 30년간 YMCA 강연을 했던 인물, 한국 민주화·산업화·종교가치 운동에서 정신적 기반을 일궈낸 독보적 선구자,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절 광주의 빈민·고아·질환자 구호운동을 지원하고 이 지역을 ‘빛고을’이라 명명했던 사람, 북한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있는 재산을 털어 남을 돕는데 앞장섰던 실천적 삶으로 ‘북한산 성자’라 불린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왜 한국 민주화, 산업화, 종교가치 운동에서 정신적 기반을 일궈낸 독보적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식인들이 왜 그에게 열광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류영모가 이룩한 ‘다석(多夕)사상’은 현대 사상과 신학 영역에서 재발견되면서, 코로나 시대의 정신적 위축과 가치 상실기에 의미 있는 ‘K-영성(Spirituality)’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신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속에 ‘얼(성령)’로 들어와 있다. 이것이 류영모가 말하는 ‘얼나’다. 얼나는 인간 개개인의 생각 속에 들어있지만, 신과 개인을 잇는 매체다. 류영모는 인간과의 대면으로 신과의 대면을 대체하려는 종교에 대해 경고했다. 신앙은 철저히 신과 나의 단독자 대면일 뿐이며, 스스로 찾아나서는 자율행위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시대 교회들이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면서까지 집회와 행사를 강행하는 까닭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종교가 비즈니스화하고 집단의 권력으로 바뀌어 갑자기 그 생존의 기반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종교가 갖고 있는 그런 측면이 정작 종교가 해야 할 참을 행하지 않게 된 비극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그것은 코로나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노출일 뿐이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서도 선각자였다.
한국 철학계의 거장 최진석 교수는 추천사에서 “류영모는 근대 대한민국 정신의 주춧돌이며, 영성의 빛이 가득한 삶으로 자신의 시절을 성숙시키고 싶은 사람은 다석 류영모를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
다석 류영모는 한국 최고의 사상가이자 삶과 내면의 혁명을 제시한 영성의 큰 스승이다. 그는 동서양의 영성을 성찰해 기독교의 참사상을 일깨우고 ‘얼의 삶’을 실천했다.
코로나의 세계적 유행과 디지털 문명이라는 대전환기의 혼란 속에서, 우리가 지닌 최고의 ‘사상과 영성의 가치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정권의 집권이라는 한민족의 고난과 혼란의 시대에 그가 우리 곁에 다녀간 것만큼 위대한 축복이 또 있을까.
저자 빈섬 이상국은 1960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매일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 아시아경제 기자 생활을 거쳐 아주경제에서 논설실장을 맡아 글을 쓰고 있다.
시와 인물과 고전과 예술에 관심이 많아 <남자현 평전>·<옛시 속에 숨은 인문학>·<미인별곡>·<옛사람들의 걷기>·<눈물이 빗물처럼>·<추사에 미치다>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이후 다석 관련 저술에 집중하여 <다석문답: MZ세대와 K영성을 논하다>·<다석의 노래> 등을 준비 중이다.
공저 및 감수를 한 박영호는 다석의 직계 제자다. 1970년경 스승으로부터 졸업증서라 할 수 있는 ‘마침보람’을 받았다. 다석에게서 졸업장을 받은 제자는 박영호가 유일하다.
류영모가 박영호에게 사상의 성숙을 인정하고 독립을 후원해준 까닭은, 그의 치열한 공부와 한결같은 수신과 학문적인 전진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듯 박영호는 1971년부터 1985년까지 14년의 분투 끝에 다석 전기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