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아방강역고-43] ‘근역’의 극성기는 일제강점기, 중흥기는 박정희 시대

2021-08-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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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일역(日域)’으로 자타칭 비칭했던 까닭

‘근역’은 ‘일역’에 대한 보복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 ‘근역’ 최초 출현

‘근역’의 빈출도와 왜색의 농후도는 반비례

‘근역’이라는 왜식 조어를 사용해서는 안되는 까닭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 짐(메이지 일왕)이 생각건대, 이강 및 이희는 이왕의 의친으로 명성이 일찍부터 두드러졌고 근역(槿域)이 우러러 보고 있으니 –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 1910년 8월 29일
 
∙ “어대(1)*에 어대에 어둠에 근역(槿域)에 마귀도 가고 저 무궁화 고흔꽃에 나비가 안는다.” - 마스야마(松山)의 축시, 『동아일보』 창간호 1920년 4월 1일 3면
 
∙ 조선을 근역(槿域)이라고까지 하지만 과연 두견화(진달래)를 압도하도록 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 언어의 남은 흔적으로만 본다면 조선사람이 꽃의 대표로 알던 것은 두견화요, 결코 근화(무궁화)가 아닌가 한다. -『조선일보』 1935년 4월 9일 7면
 
 
일본을 ‘일역(日域)’으로 자타칭 비칭했던 까닭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일본을 가리켜 일본, 왜국(倭國), 부상(扶桑), 일역(日域) 순으로 불렀다.

키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의미의 왜국은 『삼국사기』 45회, 『삼국유사』 8회, 『고려사』 6회, 『고려사절요』 3회, 『조선왕조실록』 239회 게재되어 있다.

무궁화 나무 나라인 ‘부상’은 『고려사』 6회, 『조선왕조실록』 97회 나온다.

즉 ‘부상’은 ‘왜국’ 다음으로 많이 불린 일본의 흔한 별칭이었다. 일본 스스로 고려와 조선에 보내온 국서나 사신들을 통하여 ‘부상(扶桑) ’이라고 칭했다.
 
"인월(引月)에서 공격하여 부상(扶桑) 〈일본〉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고려사』, 세가 제45권 1390년 4월 1일
 
"부상(扶桑) : 동해 가운데 있다는 신목(神木)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595년 2월 10일)
 
‘부상’ 다음으로 자주 나오는 일본의 별칭은 ‘일역’이다. 해 뜨는 지역이라는 뜻이지만 일본은 국가로서의 자격이 미달하는 지역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깔려 있었다. ‘일역’은 『고려사』16회, 『고려사절요』2회, 『조선왕조실록』에 29회가 나온다. 중국과 유구등에서도 일역이라 부르고 일본 스스로 비칭했다. (2)* 

 

(왼쪽)일본은 지금도 자국을 부상(扶桑)이라고 쓴다. (오른쪽)유구국(오키나와) 왕궁 동종에 새겨진 문구 한국을 삼한, 일본을 일역(日域)으로 칭했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 북방 사신이 와서 축수의 잔을 올리며 일역(日域)에서도 보물을 바치어 황제를 칭송하도다. 『고려사』 1170년 (의종 24년) 1월 1일(음)
 
∙ 박초(朴礎는 시도 잘 짓고 글도 잘 지으므로, 일역(日域)으로 사신을 보냄이 무방할 한 듯
「 태종실록』 1413년 (태종 13년) 6월 16일
 
∙일본 국왕 등의 서계를 보고하다 저의 일역의 고을(我日域之州)이 비록 이웃 지경을 접하였으나, 해양 만리에 치우쳐 동쪽 끝에 있어 「세종실록」 1440년(세종22년) 5월 22일
 
∙ 일본 국왕 원의정(源義政)(3)*이 토산물을 바쳤다. 귀국에서 보낸 선박이 험한 풍파를 만나 일역日域에 이르기 전에 행방을 잃었다고 하니, 『세조실록』 1462년(세조8년) 10월 9일
 
∙ 황제 폐하(성종)의 수(壽)가 남산처럼 높고, 덕은 동해에 젖으시어, 신은 선조 이래로 대대로 일역日域에서 관리가 되니, 『성종실록』 1473년 성종 4년 3월 13일
 
∙ 대판에 근거를 둔 평수뢰가 역모의 뜻을 품어 일역日域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가강이 이를 서쪽으로 토벌을 나가 일역日域을 태산같은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 『광해군일기』 1617년 광해 9년 5월 30일
 
"일역(日域)에 사신으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한 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
『숙종실록』 1718년 숙종 44년 12월 7일
 
‘근역’은 ‘일역’에 대한 보복
일본을 뜻하는 ‘일역’과 달리 근역(槿域)은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국조보감',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 역대 6대 관찬사서(정사)와 일연이 쓴 사찬 사서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한국 대표 8대 사서 약 7000여만자에는 ‘근역’이란 낱말은 단 한 자도 나오지 않는다.
 
'대통령 비서실 일지'라 할 수 있는 '승정원 일기' 2억3000만자 중 ‘근역’은 단 세 번 나오는데, 우리나라를 특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라말기 최치원(崔致遠, 857~미상)이 발해를 멸망 시켜 달라고 당나라 조정에 보냈다는 공문서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만 자국 신라를 '근화지향(槿花之鄕, 무궁화의 마을 이라는 뜻)'이라 가리킨 것, 단 한 건 뿐이다.
 
그것마저도 무궁화 원산지이자 자생지인 중국의 동남부처럼 신라도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순후한 지역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중국 현대 온·오프라인에 발견되는 '근역' 근화향 등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헌을 역번역한 것이다.
 
요컨대 무궁화 나라 부상 일본이 한국을 ‘무궁화지역(근역)’으로 변조한 목적은 무궁화의 한국의 나라꽃으로 신분세탁과정을 통하여 한국병탄과 내선일체 작업의 매개체로 삼으려는 제국주의적 행위로 파악된다. 이러한 목적외에도 한국과 중국, 유규 등 동아시아 주변 국가가 자국을 국가도 아닌 지역 ‘일역’으로 불러왔던 수모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 ‘근역’ 최초 출현
정사와 공식문서로는 '조선왕조실록∙순종실록'의 1910년 8월 29일 '대일본천황이 조서를 내리다' 의 문건 속에 ‘근역(槿域)’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난다.(4)*

조선총독부 관보 제0001호
발행일 1910년 8월 29일 (明治43年 8月 29日
분야: 명치천황 조서
 
"짐이 생각건대, 이강(李堈) 및 이희(李熹)는 이왕(李王)의 의친(懿親)으로 명성이 일찍부터 두드러졌고 근역(槿域)이 우러러 보고 있으니 마땅히 특별한 대우를 가석하여 그 의칭을 풍부하게 해야 할 것이다.(5)* 
 

동아일보 창간호 1920년 4월 1일 3면.[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근역’의 빈출도와 왜색의 농후도는 반비례
경술국치 이전에 없던 거의 없던 낱말이 경술국치 이후 빈출어가 된 어휘가 많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 기준 10대 빈출어는 다음과 같다.
무궁화, 삼천리, 근역, 근화, 황국신민, 천양무궁, 팔굉일우, 내선일체, 성수무궁, 봉황
 
‘근역’은 『조선일보』 1920년 3월 9일(제5호)부터 1940년 7월 13일 219회(6)*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 창간호부터 1940년 4월 2일까지 207회(7)* 출연한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 창간호 3면에 일본인 마스야마(松山)는 <새봄>이라는 축시를 게재한다.

“어대에 어대에 어둠에 근역(槿域)에 마귀도 가고 ~저 무궁화 고흔꽃에 나비가 안는다.”

그러자 익일 식민지 조선인은 최병헌은 익일 (1920년 4월 2일) 5면에 축시로 답사한다. 
동아건곤 욱일홍 부상(부상 무궁화나라 일본) 준인목택귀 근역(무궁화지역 조선)
 
‘근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을 기준으로 1920~1940년 20년간 426회 출현(연평균 21.3회 )한다. 이는 1945년부터 1999년말까지 약 55년간 343회(연평균 6.2회꼴)보다 3.4배 이상 높은 빈출도다.
 
‘근역’의 빈출도를 해방이후 1999년말까지 좀 더 세분해서 파악해보자. ‘근역’은 해방공간부터 이승만 제1공화국 민주당 제2공화국에 이르기까지 1945년부터 1960년까지 101회로 급감(연평균 7회꼴)한다. 그러나 ‘근역’은 부활한다. 박정희 시대 일제강점기 못지않은 중흥기를 구가한다.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로 집권해서 1979.10.26. 김재규에 암살될 때까지 재패니즈 프랜드리(종일매국의 순화어)박정희 18년 집권기간 ‘근역’은 무려 172회나 출현한다(연 평균 10회꼴).
 
그러나 1980년부터 ‘근역’은 우리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왜색의 퇴조로 감소한다.

1980~1999년 20년간 ‘근역’의 출현회수는 80회(연 평균 4회)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에서 우리는 ‘근역’의 빈출도는 왜색의 농후도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근역’이라는 왜식 조어를 사용해서는 안되는 까닭은

1920~1940년대 일제강점기가 근역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반민특위가 해산된 1949년 근역의 출현빈도가 대폭 늘었다. 1945년 이후 막대는 조선과 동아에다가 경향, 매경 한겨레 신문을 포함한 것. 도편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뉴스검색 프로그램 캡처.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1811년)가 다산 정약용이 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나라 강역을 고증해 쓴 역사지리서라면 이 연재 시리즈 제목 『신아방강역고(新我邦疆域考)는 필자가 주로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강역에 관한 역사지리서다.
 
‘아방강역’ 우리나라의 영역 지역을 말한다. 역(域)은 국가( country;state;nation) 의미인 방(邦)과 달리 영토내의지방,세력범위, 봉국, 판도( region;area; domain)를 의미한다.(8)* 
 
‘근역’은 문자 그대로 무궁화 지역이라는 뜻이다. 무궁화 나라 부상 일본 영토내의 지방, 세력범위를 뜻한다. 다시말하여 ‘근역’은 일본이 과거 나라도 아닌 지역 ‘일역’으로 칭한 데 대한 보복이자

부상(무궁화 나라)일본의 세력범위 즉 근역(무궁화지역)이라는 고약한 일본식 조어다. 이런데도 모든 경제지표가 일본보다 앞선 21세기 세계선도국 대한민국이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나라도 아닌 지역 ‘근역’이라는 치욕스러운 단어를 쓰면 쓰겠는가?


◆◇◆◇◆◇◆◇◆◇각주


(1)*어데御代: 천황의 치세 또는 그 재위기간 ( 天皇の治世。また、その在位期間。)이라는 의미

(2)*日の照らす地域。 転じて、天下。 2 太陽の出る所。 3 《日の出る国の意から》日本の異称。

(3)*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4)*1909년 7월 5일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돌아가며 함녕전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이 시제를 내렸다. 이토히로부미, 모리오노리(森大來), 소네아라스케(曾彌荒助), 이완용이 연회장에서 다음과 같은 합작시를 지었다.
단비가 처음내려 만사람을 적셔주니(甘雨初來霑萬人-이토)
부상(일본)과 근역(한국)을 어찌다르다 논하리오 (扶桑槿域何論態 - 소네)
함녕전위에 이슬빛이 새로워지니 (咸寧殿上露革新 -모리)
두 땅이 하나가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兩地一家天下春 - 이완용)

(5)*[朕惟フニ李堈及李熹ハ李王ノ懿親ニシテ令問夙ニ彰ハレ근역ノ妄タリ宜ク殊遇ヲ加錫シ其ノ儀稱ヲ豊ニスヘシ玆ニ…]

(6)*1940년 8월 10일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준비를 위해 조선·동아 등 한글신문을 폐간시켰다.

(7)* 1928년에만 7회 등장한다. 
동아일보 1928-03-25 문맹퇴치 선전일 순서 3천리 근역에 고양할
동아일보 1928-05-31 근역서화징
동아일보 1928-06-02 근역서화징
동아일보 1928-12-17 최남선 오세창씨 「근역서화징}예술중심
동아일보 1928-12-17 안세창 씨 「근역서화정」예술중심
동아일보 1928-12-18 최남선 오세상씨 「근역서화징」예술중심
동아일보 1928-12-19 오세창씨 「근역서화징」예술중심의 일부조선인

(8)*《汉书·陈汤传》:“出百死,入绝域。”《韩非子·难一》:“是管仲亦在所去之域矣。”
音域;境域;域名;定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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