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호찌민은 국부로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이면서 사회주의 혁명가다. 현재 정치지도자들은 여전히 호찌민의 사상, 도덕, 태도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자들은 연구논문 앞부분의 이론적 기반에 호찌민사상을 넣기도 한다. 호찌민이 했던 ‘말씀’은 지금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렇게 호찌민은 현재 베트남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최근 비슷한 생각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 그것은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다. 베트남 연구의 대가인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쓰고, 이정희 교수(인천대)가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도쿄 대학 부총장을 지냈고, 현재 하노이 소재 베트남국가대학교 산하 일본-베트남 대학 총장을 맡고 있다. 1996년 출판된 일본어판 제목은 <호찌민-민족 해방과 도이머이>였는데, 한글 번역본의 제목은 이리 달렸다.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는 베트남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호찌민의 역정을 주로 그렸다. 더불어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베트남의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의 역사도 담았다. 기본적으로 호찌민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가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프랑스사회당에 가입한 1919년쯤이었다. 그는 1920년 레닌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로부터 베트남을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킬 빛을 보았다. 그는 이를 보고 “울고 싶을 정도의 기쁨”을 느꼈고 “이것이 우리의 해방의 길”이라고 하였다. 호찌민은 반식민지 투쟁과정에서 일관되게 사회주의를 민족주의의 기반 위에 세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고 과감하게 전술적 양보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시기별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았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호찌민을 균형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한편, 이 저자는 베트남이 1980년대 후반 개혁정책을 채택한 후 베트남에서 ‘호찌민사상’이 등장한 정황을 적었다. 베트남의 정치지도자들은 1990년대 초부터 ‘호찌민사상’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1991년 베트남공산당 제7차 대회에서 개정한 당 조례에 “마르크스-레닌주의, 호찌민사상을 사상적 기초로 삼는다”는 문구를 넣은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전에 ‘호찌민의 사상’으로 일반명사였는데 이제 ‘호찌민사상’으로 고유명사가 됐다. 베트남은 1945년 독립 후 사회주의 국가를 설립한 후 초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마오쩌둥사상 이외에 어느 베트남인 개인의 ‘사상’도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사상’이 공공연히 언급된 것과 대비된다. 마오쩌둥이 ‘모순론’, ‘실천론’, ‘신민주주의론’ 등 저작들을 통해 독자적 이론체계를 갖췄지만, 호찌민이 이에 버금가는 이론체계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호찌민이 어느 한 사상을 교조적으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유연성이 돋보인다.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에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이론’을 붙여 사상의 전개과정을 정식화했다. 최근 중국의 통치자들이 ‘덩샤오핑이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되돌려 ‘시진핑사상’을 부르짖으며, 시진핑을 마오쩌둥의 반열에 올리려고 하고 있다. 베트남은 ‘호찌민사상’에 그쳐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에서 1980년대 후반 개혁에 착수한 이후에도 호찌민사상을 강조한 것은 국민들이 호찌민을 존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 지도자들이 호찌민의 후광에 힘입어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보려는 전략 때문이기도 하다. 현 공산당 지도자들이 호찌민사상을 강조하자, 현 체제에 비판적 인사들은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베트남 헌법은 공산당이 국가와 사회를 지도하는 세력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비판론자들은 호찌민이 헌법에 공산당의 지도에 대해 명기하지 않았는데, 현 헌법에 그대로 두는 것은 호찌민사상에 위배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의 저자는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개혁정책이 채택된 이후 가계의 가보와 족보가 속속 재발견되고 있다. 개혁 이전에는 가정에서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게 위험한 일이었는데, 그때에는 이를 호찌민 사진 뒤에 숨겨뒀었다고 한다. 상점에서는 호찌민 사진만 걸어두면 공무원에게 트집잡힐 일도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호찌민사상’을 만든 베트남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창조적’ 사고에 베트남 일반인들이 대응하는 ‘창조적’ 행동방식이다. 그런데 호찌민이 일어나 현대 베트남을 본다면 ‘호찌민사상’의 공식화를 즐거워할지 모르겠다. 칼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일어나 현 사회를 본다면 자기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라는 농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상’이 아닌 ‘인간’ 호찌민
베트남의 이념적 경직성은 호찌민 이후 레주언(Le Duan)을 비롯한 후배 지도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찌민이 1911년 6월 베트남을 떠나 30년을 해외에 머물렀는데, 베트남의 관변 학자들은 1911년 호찌민의 출국을 ‘구국의 길’을 떠난 것으로 공식화했다. 그런데 호찌민은 그해 9월 프랑스 본국에 있던 식민지관리양성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었다. 이 두 사건 간의 모순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그 후 호찌민이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지극한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일본인은 조선인을 일본화하려 한다. 이것과 반대로 프랑스는 안남(베트남)인과 프랑스인 사이의 불평등을 영원히 유지하려 하고 있다. 프랑스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행한 대담함을 인도차이나에서 보여줄 수 있을까?”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호찌민이 일제 강점기 한국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미흡했다고 할 수도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호찌민은 사망하면 유해를 화장해 북·중·남부에 매장해달라고 했지만, 후배 지도자들은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유리관 안에 모셔 놓았다. 이는 국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 일이라고 여겨지나, 호찌민의 소박한 마음을 애써 외면한 결과가 됐다.
무릇 사람들은 일생에서 성과와 함께 과오도 있게 마련이다. 호찌민이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국가의 통일을 위해 헌신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나 일방적 칭송은 어떤 인물을 우상으로 만들기 쉽다. 우상이 아닌 인간 호찌민이 그가 바라던 것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억은 후대 지도자들의 뜻에 따라 변하기 쉽다. 김남일 작가는 <어제 그곳 오늘 여기>에서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앞 광장에 세워진 호찌민 동상이 바뀐 걸 몹시 안타까워했다.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는 통일 이후 그곳에 호찌민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좌상을 세웠는데, 2015년 5월 그것을 치우고 호찌민이 사이공 강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치켜든 모습으로 서 있는 입상을 세웠다. 전에 거기에 있던 좌상은 호찌민시 아동 센터 앞으로 잘 옮겨지긴 했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베트남의 국부가 어린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호찌민시를 방문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줬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사회건 후대의 사람들이 자기 이해에 맞춰 이를 왜곡하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현 정치지도자들은 호찌민의 후광에 기대려고 하기보다, 호찌민의 뜻에 따라 국민들의 복리를 더 증진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더 진전시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어야 한다. 호찌민을 있는 그대로 국부로서 존경하면서도, 이제 호찌민이 편히 쉬게 그를 놓아줘야 한다.
이한우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서강대 정치학박사 ▷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