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사회·지배구조를 중시하는 ESG가 지금까지 논의돼온 과정을 보면, 산업 부문별로 그리고 지역별로 깃발을 든 선두주자가 있다. 산업 부문에서는 투자기관이 앞장섰다. 이들 기관은 ESG 평가가 나쁜 기업은 리스크가 크다고 보고 기업에 ESG 경영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단연 유럽연합(EU). 기후변화 억제 등에 대해 회원국 간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관련 제도를 차근차근 마련해왔다. 미국은 트럼프가 지구 온난화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한 후 역주행을 했다. 하지만 친환경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ESG의 가치를 향해 스퍼트를 시작했다. 세계 최대 탄소 배출국인 중국은 어정쩡한 상황이다. 글로벌 2위 경제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의식해 2060년 탄소중립을 약속했지만, 탄소 의존도가 높은 ‘중속(中速) 성장’을 지속하는 게 불가피해 갈 길이 멀다. 이런 상황에서 ‘선발대’인 EU에 미국이 합류하면서 미·EU ‘ESG 동맹’이 뜰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해 중국이 취약한 ESG를 압박 수단으로 추가하는 게 효과적인 ‘수(手)’이기 때문이다. ESG를 둘러싼 미국과 EU, 그리고 중국의 계산법을 들여다보자.
ESG에 관한 한 퍼스트 무버는 EU이다.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탄소 배출량을 55% 줄이기로 한 EU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법안 ‘핏포 55(Fit for 55)’를 최근 발표했다. 핵심은 2026년부터 철강, 알루미늄, 비료, 전기, 시멘트 수입 제품을 대상으로 역내 제품보다 탄소배출량이 많은 만큼 ‘탄소국경조정세’를 부담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 등 10여개 유럽 국가는 탄소세(탄소 배출량에 대해 일정액의 세금 부과)를 이미 시행하고 있다.
EU는 무엇보다 ESG를 착근시키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인프라를 선도적으로 ‘장착’해 왔다. 먼저 환경 등 비재무 정보의 공개가 의무화돼 있다. 2017회계연도부터 EU 내 근로자 500명 이상의 상장법인과 은행, 보험회사 등이 이 조치의 적용을 받고 있다. 특히 EU 의회는 지난해 11월에 기업 공급망 안에서 환경과 인권 등을 침해하는 활동이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고 문제가 파악될 땐 이를 개선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표했다. 이 법안은 연내에 확정돼 2024년부터 시행될 예정인데, EU 기업의 공급망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 등 외국기업에 커다란 부담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무역협회는 “공급망 내 기업이 비재무 정보 제공을 거부하면 공급망 선정에서 제외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투자 상품에 대한 규제도 촘촘하다. 금융기관들은 투자 상품을 판매할 때 해당 자산 운용이 온실가스 배출, 유해폐기물, 인권 보호 등 18개 지속가능 지표에 미치는 영향을 공시하는 게 의무화돼 있다. 금융기관 자금이 ESG를 잘하는 기업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목적이다. EU는 또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을 판별하기 위한 분류 기준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기준은 모두 6가지로, 기후변화 완화, 해양자원의 보호, 오염방지,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보호 등이다.
이렇듯 EU가 글로벌 ESG 흐름을 견인하고 있는데 비해 미국은 뒤늦게 시동이 걸린 ‘후발주자’다.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기후변화나 환경, ESG 같은 말은 입도 뻥끗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친ESG, 친환경’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6월 16일 미 하원에서는 의미가 큰 법안이 통과됐다. ‘2021 ESG 공시 단순화 법’이 바로 그것. 이 법안은 상장사들이 경영과 공급체인 전반에 ESG가 반영돼 있음을 공시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해마다 주주총회에서 ESG가 기업의 장기 사업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설명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특히 이 법안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ESG 측정 지표와 공시 과정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준을 활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EU와 ESG 연대를 하기 위한 포석을 깔아놓은 조항이다. EU가 추진 중인 탄소국경조정세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민주당은 2024년부터 화석연료, 알루미늄, 철강, 시멘트 등 수입품에 탄소세를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정거래 및 경쟁법안을 최근 공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증시 정책을 총괄하는 SEC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SEC는 ESG가 국제적 이슈라고 규정하고 글로벌 지속가능 회계 표준을 마련하고 있는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SEC는 이와 별도로 기후 및 ESG 태스크포스를 가동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ESG 관련 기업 공시를 크게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사령탑인 백악관도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발 빠르게 행정명령을 통해 현안 해결에 속도를 내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20일에는 기후변화가 금융시스템과 연방정부, 주택 소유자, 소비자, 기업, 그리고 근로자에 미치는 리스크를 분석하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대책을 120일 안에 세울 것을 관련 기관에 지시했다. 특히 기후 관련 공시를 개선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 행정부의 종합 대책이 나오면 ESG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미국의 수위와 속도도 크게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비해 ESG에 대한 중국의 속내는 선명하지 않다. 탄소중립이라는 국제적 대의에는 동참했지만, 탄소 의존도가 높은 산업 구조상 현실적 발걸음은 머뭇머뭇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목표와 실제의 괴리는 석탄발전 현장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NGO인 글로벌 에너지 모니터는 지난해 중국이 발주한 석탄발전량은 38.4기가와트(GW)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다른 국가들이 가동을 중단한 석탄발전량이 37.8GW에 이르는 것과 대조적이다. 중국은 탄소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석탄발전량을 계속 늘리고 있다. 이는 지방정부의 성적표가 성장 실적치에 좌우되는 구조여서 이들이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은 기온 상승폭 1.5℃ 억제를 내건 파리기후협약의 조건에서 더욱 멀어졌다고 이코노미스트지는 평가하고 있다.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중국은 국제적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신장위구르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 탄압이 ESG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공적연금이 인권 침해와 관련이 있는 중국 기업에 투자를 하는 데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의 지배구조도 글로벌 기준과는 거리가 있다. 세계은행이 평가한 거버넌스 지수를 보면 중국은 상위권에 오른 정부 효율성을 제외하곤 부패 통제, 법의 지배, 규제의 질 등에서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기업지배구조에 있어서도 국영 기업이 많은 상태인 데다 이사회의 독립성이 결여돼 있고 소수주주권이 보호되지 않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 결과 ESG 평가가 취약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대표적 지표인 FTSE포굿(4Good)을 보면 중국은 5점 만점에 불과 1.5점으로 선진국의 3점은 물론 개도국의 2.1점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ESG를 중시하는 유엔 책임투자원칙(PRI)에 서명한 기업 수도 미국(786개), 영국과 아일랜드(699개), 프랑스(313개)에 크게 밑도는 58개에 불과하다. 중국 정부가 최근 ESG 공시기준을 개선하고 기업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적지 않은 것이다.
결국 ESG에 대해 미국과 EU, 중국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온도차는 뚜렷하다. 미국과 EU는 공세, 중국은 수세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EU는 ESG와 기후변화에 대해 공감 폭을 넓히면서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ESG를 새로운 국제질서를 짜기 위한 도구로 추가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EU가 선수를 친 탄소국경조정세에 대해서는 미국도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중국은 반발하고 있다. 미국은 압박의 강도를 높일 태세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를 앞세워 탄소중립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포린 폴리시 최근 호는 미국과 EU가 의욕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한 다음 탈탄소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면서, 특히 철강·자동차·항공기 등 산업에서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공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미국과 EU는 이 같은 기후 변화 대응은 물론 ESG 평가기준 표준화와 공시기준, 녹색경제 분류 체계, 지속가능 금융 등 국제적 규칙을 정하기 위해 ’환대서양 동맹체제‘를 가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ESG의 대부분 항목에서 약세인 중국으로선 미국의 기술 견제에 이어 또 하나의 방어막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 입장에서는 ESG가 새로운 기업 경영의 패러다임을 넘어 신(新 )국제 경제질서로 굳어질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글로벌 규칙이 확정되기 전에 논의 과정에 적극 참여해 한국 경제와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피하기 위한 선제 대응을 하는 게 긴요하다. 최근 전경련이 지속가능보고서 국제기준 제정 작업에 들어간 IFRS의 움직임과 관련해 비재무 정보를 무리하게 재무 정보화하면 기업이 심각한 소송 리스크에 노출된다면서 자율 공시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이렇듯 필요한 목소리를 내고 토의 테이블에 같이 앉아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 국제 표준이 만들어지도록 노력해 나가는 게 큰 과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