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거나 고기를 굽는 걸 즐겨 왔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좀 더 나아갔다. 요리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뭔가 먹을 걸 ‘만들기’ 시작했다. 유튜브 덕분이다.
집에서 만든 김치가 귀해지는 한여름, 큰 양배추 한 통을 소금에 절여 담근 김치도 나름 괜찮았다. 먼저 겉절이로, 두고두고 익혀서도 맛있게 먹었다.
‘먹거리 만드는 노동’이라는 새로운, 행복한 세계를 경험 중이다.
한국의 중년 이상 남성 중에 이런 신세계를 발견한 선험자들은 무수히 많다. 요즘 더 많아지고 있다. 직장을 접고, 본인의 업(業)을 바꾸는 결단을 내린 이들도 있다. 은퇴·퇴사 후 생계를 위해 식당을 차리는 것과는 많이 다른 접근·차원이다.
요리사·셰프·작가 등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음식을 만들고, 관련 글을 쓰는 일로 인생 행로를 바꾼 사람들도 몇몇 있다. 그들 중 파스타 덕후, 오대남(50대 남성) 권은중 작가는 ‘최신상’이다. 덕후는 일본말인 오타쿠(otaku·御宅)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인데, 한 분야에 미칠 정도로 빠진 사람을 일컫는다. 이탈리아식 면(麵)을 총칭하는 파스타(스파게티는 파스타의 한 종류)와 사랑에 빠진 중년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나직하면서도 진중하게 말했지만 스토리는 흥미진진했다. 문화일보-한겨레신문에서 기자로 20년 넘게 일한 전직 기자 권은중 작가는 동료로 지냈던 시절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줬다.
‘메디치 미디어’가 펴낸 이 책에 대해 작가 편성준은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요리를 배우러 이탈리아에 갔다가 이탈리아 음식은 물론 그들의 역사까지 살핀 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라는 휴머니즘적 가치까지 깨닫고 온 중년 남성의 황홀한 고백인 것이다.
이 책을 쓰게 되기까지 한국 ‘오대남’의 인생 행로 변경에 대해 묻고 듣고 살펴봤다.
힘든 직장생활에서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맛있는 음식이었다. 30대 후반, 사 먹는 음식에서 벗어나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첫 단추는 엄마표 김치칼국수였다. 파스타 덕후의 시작이 칼국수라니~! 하긴 면으로 만드는 요리는 ‘만국공통어’ 아닌가. 멸치로 국물 내고 김치와 김칫국물을 넣고 끓이다가 칼국수를 넣으면 뚝딱 나오는 김치칼국수를 ‘초간단 요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멸치로 육수 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발견한 초보요리사는 '더' 쉬운 요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파스타가 우르르 쾅쾅, 번쩍하며 등장했다.
가장 많이 먹는 스파게티, 마카로니는 물론 펜네, 링귀니 등 다양한 파스타를 공부했다. 이를 기본으로 고기, 조개, 굴, 새우 등 재료와 토마토, 올리브 오일, 치즈, 크림 등 소스를 ‘변주’했다. 수십 가지 파스타가 뚝딱 나왔다. 마치 수학공식처럼 면과 재료, 소스를 조합하면 그 답을 바로 얻을 수 있었다. 이 공식을 한식에도 적용해 보니 엄마표 김치칼국수 맛도 낼 수 있게 됐다. 오래 걸리지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다.
미친 듯이 파스타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글로 옮기게 됐다. 첫 책 <독학 파스타-남자, 면으로 요리를 깨치다>도 파스타 만들듯이 순식간에 냈다. 그때가 지금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11년 8월이었다.
이후 기자라는 ‘본캐(본래 캐릭터)', 파스타 요리사라는 ‘부캐(부수 캐릭터)'를 병행하며 음식과 글을 지었다. <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혀로 배우는 인간과 생명의 역사>, <음식 경제사-음식이 만든 인류의 역사>를 잇따라 내놨다.
파스타 세계에 빠진 지 10여년, 드디어 그는 본캐를 버리고 부캐를 본캐로 선택했다. 권 기자에서 권 작가, 셰프 권의 길을 택한다. 2019년 그는 파스타의 고향, 이탈리아로 떠난다.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를 들어가게 된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주의 아스티에 있는 이 학교에서 그는 1년 동안 수습기자 시절처럼 엄청나게 깨져야 했다.
토리노의 레스토랑 ‘라 베툴라’(자작나무)에서의 인턴 실습에서는 하루 13시간 일하며 두 달 만에 몸무게가 10㎏이나 빠지기도 했다. 하루 종일 채소를 다듬고 생선 포를 뜨고 새우껍질을 깠다. 그 어려운 인턴을 마치고 파스타를 더 공부하려고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 최대 섬인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와 아스티 인근의 볼로냐에서 각각 한 달씩 머물렀다. 시칠리아는 ‘미식(美食)의 조국’, 볼로냐는 ‘미식의 수도’라고 불린다고 한다.
권 작가는 당초 1년 유학을 마치고 2020년 3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지금은 일단 한국에 머물고 있다.
그와의 다음 인터뷰는 7월 중순 일주일에 걸쳐 화상회의 시스템 줌, 전화 통화, 카카오톡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작가이기 이전에 기자 생활을 했다. 기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졸업 후 대기업을 잠시 다녔다. 대기업은 틀에 짜여 있는데 그게 적성에 안 맞았다, 그래서 그만두고 기자 공부를 해서 기자가 됐다. 기자가 자유롭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공부보다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진짜 많이 다녔다. 그래서 기자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리에 빠지게 된 계기는.
"기자도 지금은 주 52시간인데 우리 때는 잠도 거의 기자실에서 잤다. 24시간 동안 일했던 거다. 탄광 광부처럼 일해서. 30대 때는 괜찮았는데 40대가 되면서부터 너무 몸이 안 좋아지고 힘드니까, 그래서 재밌는 걸 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몸이 안 좋아진 상태여서 등산이나 운동은 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하다 ‘그럼 나에게 스스로 맛있는 밥을 차려주자’ 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음식 만드는 걸 좋아했나.
"(웃으며) 전혀 아니다. 요리를 시작할 때가 2006년쯤이었는데 이때는 ‘혼밥’을 하면 좀 딱하게 보던 시절이었다. 혼자 밥 먹으러 갈 수 있는 데가 24시간 하는 해장국집 정도밖에 없었고 또 그런 데 가면 사람들 눈도 좀 그렇고 해서 ‘내가 해 먹자’ 하고 요리를 하기 시작한 거다."
-왜 파스타였나.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를 좀 찾아봤다. 맨 처음에는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아서 어머니가 해주신 김치칼국수 같은 걸 해보려고 했다. 지금은 아주 쉬운 요리인데 그때는 그걸 다 실패했다. 한식이 정말 어려운 요리라는 걸 처음 느꼈다. 그래서 좀 쉬운 걸 찾다가 보니 파스타가 생각보다 쉽고 맛도 좋고 다양하게 변주도 가능하더라. 그 이후로 파스타에 꽂히게 됐다."
-40~50대가 입문하기 가장 좋은 재료 또는 요리가 파스타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그리고 볶음 우동과 짬뽕, 파스타는 사실 레시피가 똑같다. 국물을 넣으면 짬뽕이 되고, 카레 가루를 넣으면 야끼 우동이 되고, 토마토 소스를 넣으면 파스타가 된다. 공식은 다 똑같다. 어느 나라나 식생과 조리법이 비슷하다. 탄수화물이나 채소나 고기 등을 한 프라이팬에 볶는 것은 거의 비슷하니까, 그것만 변주할 수 있으면 다 만들 수 있다. 파스타나 볶음 우동이 요리의 가장 기본이라고 볼 수 있다."
-제일 쉬운 음식이 라면인데, 거기서 눈만 조금 돌려도 그런 무궁무진한 세계로 빠질 수 있나 보다.
"(커진 목소리로) 그렇다. 메밀국수를 활용하면 볶음 우동 말고 볶음 소바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카레를 넣느냐 후추를 넣느냐 또는 어떤 다른 소스를 넣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면 음식이 나온다. 그런 것들을 맨 처음에 배웠을 때는 나도 놀라웠다. 이런 신세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파스타 말고 관심이 있거나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곧바로) 중국 요리를 제일 좋아한다. 가장 매력적인 건 지금도 중식과 이탈리아 요리라고 생각한다. 근데 중식도 아까 잠깐 말했듯, 공식이 똑같다. 비슷한 거지만 재료나 그 나라의 문화에 따라서 달라지니까 매우 흥미롭다."
-요리로 세계사, 인류학 등을 다루기도 한다. 요리나 음식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 계기가 있나.
"아무래도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음식을 하더라도 기자적 기질이 작동했던 것 같다. ‘칼로리랑 조리 방법은 비슷한데 어떻게 먹는 것에 따라서 역사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우연히 하게 됐다. 밀을 먹는 서구가 쌀을 먹는 동양과 옥수수를 먹는 중남미를 지배한 이유가 문득 궁금했다. 그 해답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당시에는 요리에 대한 블로그나 동영상이 거의 없었다. 결국은 도서관에 갔고 아까 말했던 그런 고민(왜 먹는 것에 따라서 역사가 달랐을까)을 풀 수 있는 책들을 쭉 봤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두 개가 연결이 잘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책도 쓰게 됐다. 그런데 요리 관련 책을 내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웃으며)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독학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던 사람의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인문학적으로 계속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기자’라는 본캐에서 요리와 음식 쪽으로 완전히 전환한 과정이 궁금하다.
"한 10~12년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전혀 의식한 게 아니다. (웃으며) 기자는 사람 이름 틀리면 한 번이어도 끝이다. 그리고 매일 새벽 1시에 들어가고 다음 날 아침에 또 나오고, 낙종하거나 이름 틀리면 매번 시말서 쓰고. 이런 생활을 하다가 꿈틀거리고 살아 움직이는 생선으로 한 상 딱 차려서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내놓았다. 그들이 행복해하는 걸 보니 당연히 요리 쪽에 비중이 더 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요리는 사실 고난이다. 그래도 훨씬 많이 즐거웠다. 거의 미쳐 있었던 거다."
-10년 넘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 (단호한 목소리로) 나는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다. 기자 일은 누가 내 신발에 가죽신을 신겨놓고 ‘이 가죽신이 닳으면 너를 면천시켜 주겠다’라는 느낌이었다. 근데 가죽신은 잘 안 해지지 않나. 그냥 그렇게 10년 넘게 시간을 보낸 거다. 아무래도 가장이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까 내가 스스로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과 요리를 꾸준히 했더니 이곳저곳에서 제안이 많이 왔다. "
-기자 관두고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아내가 유학을 권했다. 나도 좀 초조하기도 하고 ‘나중에 프라이팬을 들 힘도 없을 텐데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아내가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많이 설득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고 가게 됐다. 하하."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걸 찾아가는 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했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은 20대가 느끼는 거나 50대가 느끼는 거나 똑같다. 다만 50대는 좀 여유로운 것 같다. 지금 안 하면 못 한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얼마나 절박하냐에 달려 있는데. 그게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겼던 것 같다."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나.
"유학 간 건 재미있었다. 유학은 잘 갔다 온 것 같다. 왜냐하면 유학을 안 갔다 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서양요리는 소스가 중심이지 않나. 한국이나 일본은 탄수화물이나 국물이 중심이고. 근데 서양 요리를 배우지 않으면 왜 서양은 소스가 중심인지 알기 어렵다. 이탈리아에 가보니 이탈리아 사람들은 일단 계절 따라 나오는 과일과 채소로 소스를 먼저 만든다. 소스를 만들고 거기에 탄수화물과 고기를 입힌다. 우리와 전혀 생각이 다르다."
-소스 문화와 우리나라 장(醬) 문화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좀 다르고 프랑스와 영국이 또 다르다. 이탈리아는 기후가 온화하고 따뜻하니까 소금에 절인 염장 식품을 대량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때그때 토마토와 레몬이 나오니까 그걸로 매일 아침에 신선한 소스를 만들 수가 있는 거다. 근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겨울에 날씨가 상당히 춥다. 그 겨울을 견디려면 염장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거다. 이탈리아도 치즈나 앤초비(서양식 멸치젓) 등은 염장한다. 하지만 발효 식품이 식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우리나라가 상당히 높다. 우리나라가 콩 문화권인데, 이건 만주 쪽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 전통이 한국으로 내려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내려간 것이다. 이탈리아나 유럽은 이러한 것과 또 다른 소스 문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진 않다. 요리를 하고 싶었기에 원래는 레스토랑을 내고 싶었다. 갔다 오면 무조건 ’권은중 레스토랑’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운이 좋게 나이 쉰에 기자를 그만두고 유학을 한다니까 좋은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유학 생활할 때 기고를 계속하게 됐고, 와서는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라는 제안을 또 받았다."
-유학 가서 고생 많았겠다.
"공부한 곳의 셰프들이 대부분 30~40대다. 나보다 나이 많은 셰프를 많이 못 봤다. 인턴 레스토랑을 정할 때 수석셰프가 58년생 개띠라는 얘기를 듣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나보다 5살이 어리더라.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가면 혹독하게 시키지 않을 거라고 해서 갔는데, 주방에서는 진짜 봐주는 거 하나도 없더라. 지시는 이탈리아어로 하는데 지시를 잘 못 알아들으면 욕은 영어로 한다. 영화에 나오는 그런 욕을 끝도 없이 한다(웃음). 바로 위 셰프는 28살이었다. 나를 지휘하는 1진인데 엄청나게 일을 시켰다. 특히 겨자라는 말을 못 알아 들어서 진짜 많이 당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못 가져오면 셰프가 거의 칼을 던질 것 같은··· 거의 매일매일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렇지만 수석쉐프, 1진 선배 모두 주방 밖에선 천사 같은 친구들이었다."
-요리와 글쓰기, 어떤 걸 ’본캐‘로 여기나.
"셰프는 이탈리아에서 접었다. 인턴을 4개월 했는데 하루에 15시간씩 노동을 하면 체중이 10㎏이나 빠진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요리는 좋아하는데 계속 요리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를 모색하는 단계다. (잠시 생각하다) 레스토랑을 해도 일주일에 2~3일만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고민하고 있다. 와인 수입 비즈니스는 시작했다."
-다시 이탈리아 가는 건 열려 있나.
"출판사가 시칠리아에 대해 써달라고 하는데 유학 시절 한 달 동안 시칠리아 서부에만 있었다. 시칠리아가 제주도의 50배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상도 크기라서 한 달 만에 도는 게 불가능하더라. 시칠리아 동부도 좋은 곳이 꽤 많아서 서부만 가지고는 책을 쓸 수 없으니까 다시 가려고 한다. 지금으로 봐서는 내년 초에나 가능할 것 같다." <정리=김성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