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경제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파월 의장이 드디어 디지털화폐 패권 전쟁에 참여했다. 그동안 미국은 CBDC 즉 디지털달러 발행에 조금은 모호한 입장을 보여왔다. 파월 의장의 이날 발언은 사실상 디지털달러 발행을 전제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날 청문회에서 파월 의장은 디지털달러가 결제시스템에서 가상화폐나 스테이블코인보다 더 실행 가능한 대안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9월 초 공개 예정인 연구보고서는 "CBDC를 발행할 것인지 결정하려는 연준의 노력을 가속하는 핵심 단계”라고도 했다.
이로써 파월은 디지털달러 발행을 통해 기존 금융시스템 밖에 있는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제도권으로 흡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보통 혁신이나 혁명은 기존 규범을 따르지 않는 파괴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지배적 위치에 오르면 혁신·혁명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현재까지는 비트코인도 화폐시장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거나 기대한다. 여전히 비트코인의 가치 변동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이 역시 기존 질서와 새 질서의 충돌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기존 질서 대변자들은 처음엔 이런 존재를 애써 무시한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면 제도권으로 흡수해 관리하는 방법으로 기존 질서의 유지를 선택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떤 것은 혁신이 되고, 또 어떤 것은 혁명이 되기도 한다. 달러패권의 최고 관리자인 파월의 이날 발언도 그동안 무시 전략에서 흡수·관리 모드로의 전환을 밝힌 것이다.
이런 전략 변화의 이유는 ①실생활에서 쓰임새를 넓히는 비트코인 ②G2의 한 축인 중국의 CBDC 속도전 ③언택트 디지털 세상에서 복제 불가능한 인증 시스템으로서 블록체인의 가치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CNBC 등에 따르면 지난 21일(현지 시간) 열린 암호화폐 콘퍼런스 ‘더 B 워드(The B Word)’에서 글로벌 코인시장의 변덕쟁이 일론 머스크는 “비트코인 가격이 내려가면 나는 돈을 잃는다. 아마도 내가 (비트코인 가격을 위·아래로) 펌프질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비트코인을) 팔지는 않는다. 비트코인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비트코인의 성공은 실생활에서 화폐로 쓰이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역사적으로 화폐는 물건의 교환을 더 쉽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동의한 그 무엇이었다. 자본주의 시대엔 레버리지를 일으켜 부채(빚)의 기능을 극대화한 현대적 의미의 화폐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패권을 다투는 경쟁은 지배적 화폐가 되기 위한 전쟁이다.
머스크가 테슬라의 결제통화에 비트코인을 추가하면서 그 역할은 더 선명해졌다. 중앙아메리카 엘살바도르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정했다. 엘살바도르와 비슷하게 화폐시장이 불안정한 나라들에선 자연발생적으로 비트코인이 현실의 화폐로 쓰이고 있다.
지난 5월엔 애플도 가상화폐를 포함한 결제 협력사와의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로 했다. 애플은 ‘애플페이’로 북미 간편결제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가상화폐도 결제 수단의 하나로 검토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한다.
G2의 지위를 굳힌 중국의 CBDC 속도전도 파월에겐 신경 쓰일 만하다. 중국은 디지털위안화 시범 운영을 통해 이미 320만건의 거래와 거래 규모 11억 위안(약 2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전해진다. 날로 악화하는 미·중 관계는 중국이 디지털화폐 도입 속도를 높이는 가장 큰 이유로 설명한다.
달러가 무역, 투자 등 글로벌 경제의 패권을 쥔 상황에서 미·중 충돌은 중국에 부담이다. 미국은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을 계기로 홍콩 특별지위를 박탈했다. 나아가 홍콩 은행들의 달러 조달 제한 방안이 회자되고 있다. 이 경우 홍콩달러와 위안화 변동성을 키워 충격이 커질 수 있다. 중국은 디지털위안화 확산을 통해 홍콩을 포함한 역내에서 달러 영향력을 줄일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은 이미 2009년 7월부터 위안화 국제화 프로젝트를 통해 달러 결제시스템을 조금씩 허물었다. 중국의 경제 고성장으로 무역 결제가 늘어나고, 이 결제를 위안화로 강제하면서 보폭을 넓혔다. 지난해 7월엔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으로부터 이라크산 원유 300만 배럴을 수입하면서 '위안화'로 결제했다. '원유는 달러로만 결제한다'는 불문율을 깬 첫 사례다.
중국이 디지털위안화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면, 통화 패권 전쟁은 더 속도가 붙는다. 무엇보다 CBDC 거래시스템의 표준이 중국 방식으로 굳어지면, 달러 지위가 어느 정도는 흔들릴 수도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도 2019년 10월 미 의회 청문회에서 디지털위안화가 앞으로 달러패권의 근간을 흔들 잠재적 위험 변수로 지목했다.
◆ 자본주의 5.0 vs 메타-캐피털리즘
디지털화폐 시장에서 각국 CBDC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 현재의 달러 패권은 크게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위안화가 주도권을 잡아 달러 패권을 위협하더라도, 세계 화폐시장의 구조 변화는 크게 바뀔 것이 없다. 그저 일부의 달러가 위안화로 대체될 뿐이다.
기존 화폐를 제치고 디지털화폐가 주류로 서면, 세계 경제는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디지털화폐 주류화가 자본주의 5.0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기존 화폐금융시스템에서 터부시하는 중앙은행의 통제 밖 디지털화폐가 기존 화폐와 경쟁하며 주류로 서는 경우다. 비트코인의 보편화가 기존 화폐금융시장을 파괴하는 모습일지, 공존 형태일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불안정한 가치 변동을 비롯한 비트코인의 몇몇 약점은 실생활에서 사용 빈도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파월은 디지털달러를 발행하면 가상화폐(비트코인)가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현재 화폐금융시스템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위기를 맞았다. 해법으로 제시된 양적완화가 여전히 부(富)의 편중을 더 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화폐금융시스템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긴 위기 극복의 터널을 빠져나올 때쯤 화폐금융시스템은 자본주의 5.0으로 불릴까?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의 '메타-캐피털리즘(Meta-Capitalism)으로 불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