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 측은 지난 4월 28일 이 회장의 소장품 1만1023건,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나눠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가지정문화재 등 예술성·사료적 가치가 높은 주요 미술품을 대규모로 국가에 기증한 것은 사실상 국내에서 최초다. 이는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현존하는 고려 유일의 ‘고려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단원 김홍도(1757~1806?)의 마지막 그림인 ‘김홍도필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등을 직접 볼 수 있게 됐다는 소식에 대중은 기뻐했다.
황희 문체부 장관은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방안’을 발표했다.
문체부는 가칭 ‘이건희 기증관’을 통합된 별도 공간으로 건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기증관을 건립할 후보지까지 발표했다. 후보지는 총 2곳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부지와 국립현대미술관 인근 송현동 부지였다. 문체부는 이들 후보지 중 한 곳을 최종 선정해 기증관을 지을 계획임을 밝혔다.
문체부는 기증품 활용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별도 전담팀과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운영, 총 10차례 논의를 거쳤다고도 부연했다.
하지만 문체부의 발표는 정작 ‘이건희 기증관’ 유치를 희망해온 지자체 40여곳, 그리고 미술계의 분노를 샀다. 지자체와 미술계를 대상으로 한 공청회나 토론회가 단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불통’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황 장관은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처음부터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정말 어렵게 결정했다”라며 “지방 40여 곳에서 유치를 희망하는 요청이 왔다. 어느 쪽으로 기증관 유치를 결정해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유치에 성공한 1곳을 뺀 나머지 지자체는 실망하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할 때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미술계는 ‘이건희 기증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미흡하다는 점을 크게 아쉬워했다.
무엇보다 이번에 기증된 미술품과 문화재의 조사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최소한 기증품의 연대별·유형별·재질별 분류와 함께 그 구성비라도 먼저 따져 봐야 했다는 게 미술계의 의견이다. 문체부는 등록과 조사, 연구가 완료된 기증품을 2022년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2023년 기증품 등록 절차를 완료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증품을 파악하는 것은 기증관의 뼈대를 세우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이 작업을 건너뛰고, 문화재와 미술품을 한곳에 모으는 ‘통합 전시관’으로 결정한 것은 성급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짬짜면’이라는 비유까지 했다.
박물관 또는 미술관 하나를 짓기 위해서는 수많은 것을 결정해야 한다. ‘기관의 성격을 분명하게 할 소장품의 확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얼마의 비용이 필요할까’, ‘조직과 필요한 인력은 확보 가능한가’ 같은 다양한 질문에 명확히 답을 해야 한다.
‘통합 전시관’을 운영하려면, 고전과 서양, 현대 등 다양한 전시 기획자(큐레이터)와 전문가를 뽑아야 한다. 또 그들이 함께 어떤 상승효과를 낼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세밀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미술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