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나는 한국의 과학자를 한 사람씩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첫해는 대전 대덕 연구개발특구의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을 만났다. 대덕에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산하의 정부출연연구소 16곳이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에서 전자통신연구원(ETRI)까지 최고의 박사들을 두루 만났다. 그 다음에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하는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를 찾아갔다. 물리-천문학자는 60여명을 한 사람씩 만나 그들의 연구와 연구자로서 사는 법 얘기를 들었다. 지난해와 올 초까지는 화학자 46명을 만났고, 올해는 생명과학자를 만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으나, 한국의 과학자를 참 많이 만나게 되었다. 나 자신을 ‘한국인에게 한국과학자를 가장 많이 소개한 기자’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싶다.
최상위 과학학술지로는 네이처(Nature)와 사이언스(Science)가 있다. 네이처는 영국에서 발행하고, 사이언스는 미국에서 나온다. 네이처는 1869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기 시작했고, 창립자 중 한 명은 노먼 로키어(Joseph Norman Lokyer)다. 노먼 로키어는 헬륨 원소를 발견한 과학자다. 사이언스는 1880년부터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가 발행한다. 여기에 생명과학 분야의 최상위 저널인 ‘셀’(Cell)을 포함시켜, 3대 과학 학술지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네이처, 사이언스에 논문이 나오는 게 연구자의 꿈이다. 이 학술지들에 자신의 연구가 한 번이라도 출판되는 걸 보는 게 많은 과학자의 평생 꿈이다. 과학자 연구실에 갈 일이 있으면, 방 앞 게시판이나, 방안에 혹시 네이처, 사이언스 논문들이 붙어있는지를 보라. 그렇다면, 그는 정상의 과학자인 거다. 네이처, 사이언스, 셀에 논문을 쓴 대학원생이나 박사후연구원은 대학이 뽑고 싶어하는 신임 교수 1순위가 된다. 그들에게는 금의환향의 길이 열린다.
미국인 지도교수 아래에서 연구를 해서 좋은 곳에 논문을 내기는 비교적 쉽다. 교수들의 지명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미국에서 연구할 때 수준의 논문을 썼다고 생각하더라도, 네이처 사이언스에 논문을 보내면 퇴짜 맞는 경우가 있다. 한국은 여전히 학문의 변방지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연구자를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러니 한국 대학이나 연구소 소속으로 일하면서,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을 내는 사람은 대단한 거다.
입자가속기를 갖고 연구하는 물리학자를 고에너지 물리학자라고 한다. 이들을 만나서는 ‘피지컬 리뷰 레터스‘(PRL, Physical Review Letters)라는 학술지를 알게 되었다. ’피지컬 리뷰 레터스‘는 미국 물리학회가 발행하며, 물리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다. 고등과학원(KIAS) 고병원 교수는 내게 “물리학자는 중요한 연구를 하면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논문을 보내는 게 오랜 전통”이라고 얘기해줬다. 고 교수는 이론물리학자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쓴 논문은 네이처, 사이언스보다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실린 게 많다는 얘기가 있다.
고에너지 물리학은 대규모 사이언스 실험이 유명하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입자가속기인 LHC(거대강입자충돌기)는 지상 최대의 사이언스 실험이다. 건설비가 수조원이었고, 수천, 수만명이 달려들어 일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연구하는 고에너지물리학자들이 쓰는 논문은 논문 저자가 수백명, 수천명인 경우도 있다. 논문 저자 수가 이렇게 많은 건, 논문의 제1저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가 때로 힘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5년 5월 15일에 나온 힉스 입자 질량을 측정한 논문은 저자가 5154명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인 물리학자도 들어 있다. 스위스 제네바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LHC에는 27㎞ 링의 몇 곳에 입자검출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두 개의 실험 그룹인 애틀러스와 CMS 그룹이 자신들의 입자검출기를 갖고 힉스 입자 질량을 측정했다. LHC의 진공관 안에서 양성자 다발과 양성자 다발이 정면 충돌했을 때 만들어지는 입자들을 분석해 이들은 힉스 입자의 질량을 측정했다. 이들은 연구 결과를 공동으로 냈고, 이들이 측정한 힉스 입자 질량은 125.09±0.21(stat)±0.11(syst) GeV였다. 논문 제목은 ‘애틀러스와 CMS실험에서 8 테라 전자볼트로 양성자와 양성자 충돌을 시켰을 때의 힉스 입자 질량 측정’(Combined Measurement of the Higgs Boson Mass in pp Collisions at √s=7 and 8 TeV with the ATLAS and CMS Experiments)이었다. 이 논문이 실린 물리학 학술지가 바로 ‘피지컬 리뷰 레터스’였다. 물리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결과는 네이처, 사이언스보다는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실린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한 장면이다.
화학자들을 만나면서는 ‘JACS’(미국화학회지)와 ‘앙게반테 케미’(독일 화학회지)라는 화학 분야 학술지를 알게 되었다. JACS(‘잭스’라고 발음한다)와 앙게반테 케미는 화학자들에게 네이처요, 사이언스이다. JACS와 앙게반테 케미에 논문을 보고하면, 이들은 날아갈듯한 기분이 된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뒤에 나는 화학과 교수들을 만나면 “JACS나 앙게반테 케미에 쓴 논문이 뭐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가혹한지 안다. 두 화학회지에 논문을 무수히 쓴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질문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건 기자인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어떤 특종을 했는가. 어떤 칼럼으로 기억되는가? 누가 묻는다면, 내 얼굴이 화끈거릴 것이다.
한국의 화학자들을 취재하면서 ‘리뷰 논문’이라는 게 있는 줄을 알았다. ‘리뷰 논문’은 특정 분야의 주제에 관한 연구 현황을 정리하기 위해 학술지가 기획해서 싣는 논문이다. 중앙대 조은진 교수로부터는 ‘리뷰 논문’의 하나인 ‘어카운트(account) 논문’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카운트 논문’은 특정 분야 연구를 정리하는 건 같으나, 연구자가 자기 연구를 정리해 논문으로 작성한다는 게 다르다. 조 교수 논문이 실린 학술지는 ACR(Accounts of Chemical Research)이다. ACR은 2016년 가시광 촉매 분야를 정리하기 위해 이 분야 연구자 20명에게 자신들의 연구를 정리해 보내주도록 요청했고, 조 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필자였다.
나중에 만난 천진우 연세대 교수(IBS 나노의학 연구단 단장)는 ACR의 시니어 편집자(senior editor) 중 한 사람이었다. ACR은 미국 화학회(ACS)가 발행하는데, 미국 화학회는 50여종 학술지 중에서 미국화학회지(JACS), 케미컬리뷰(Chem. Rev), ACR이 3대 간판 학술지라고 했다.
한국 화학자들이 어카운트 논문을 쓰고, 어카운트 저널의 시니어 편집자로 일한다는 건 한국 화학의 위상이 세계 정상에 대단히 근접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연과학 분야의 노벨상 후보로 한국인 이름이 가끔 오르내리는데, 그들은 모두 화학자다. 지난해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노벨상 후보로, 영국 정보 분석 기업 클래리베이트가 예측한 현택환 서울대 교수(화학생물공학부)는 네이처에 표지로 논문을 내는 연구자다. 이걸 보아도 한국 화학이 자연과학의 다른 분야에 비해 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균관대의 한 화학자는 “왜 LG화학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겠는가? 한국 화학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화학과의 우수한 학생들이 LG화학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명과학 분야에는 네이처, 사이언스에 논문을 쓴 학자들이 많이 보인다.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이정호 교수,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정인경 교수, 서울대 생명과학부 윤태영 교수, 포항공대의 줄기세포 연구자 신근유 교수는 네이처, 사이언스에 논문을 몇 편씩 쓴 연구자들이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한국 연구자의 수준은 세계 정상에 얼마나 근접해 있을까? 생명과학자를 이제 10여명 만났기에 정확히 분위기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세계 수준과 비교할 수 있는 척도가 노벨생리의학상이다.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을 만한 한국인 연구자는 얼마나 있을까? 매년 10월 노벨상 발표 시즌이 되면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연구자도 있으나, 생명과학자들은 많은 이름을 내놓지 않았다. 생명과학 분야가 약진하고 있으나, 노벨상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논문은 학생들이 쓴다. 대학 교수는 자신이 직접 연구를 수행하기보다는 학생을 통해 연구를 한다. 내가 만난 학자 중 상당수 교수는 직접 연구를 하기보다는, 학생들이 맘 놓고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비를 만들어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일하는 과정이 이러니 특정 교수 방에서 논문이 나오면 연구를 수행한 학생이 제1저자가 되고, 지도교수는 교신저자가 되는 것이었다. 논문에 저자 이름이 여러 명 있을 경우,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제1저자이고, 맨 뒤에 있는 사람이 교신저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1저자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놓고 같은 실험실 연구자 간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때로 누구의 기여가 가장 큰지 애매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교수는 같은 팀인 경우,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제1저자를 해라, 하는 원칙을 제시한다. 이처럼 논문은 신성하고, 최상위 저널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리려는 경쟁은 치열하다. 오늘도 과학자는 땀을 찔찔 흘리며 논문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는 엉터리 논문을 생산하고, 그걸 갖고 학위를 주고 있다. 수준 이하의 박사를 만들어내는 지도교수와 대학에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쓰는 논문 이야기를 길게 하게 되었다.
최준석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뉴델리 특파원 ▷카이로특파원 ▷주간조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