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26일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은 독일의 분할점령과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분할점령을 구상했다. 그 실행은 9월 이후 몰락 작전을 통해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상륙 점령하면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만주 전략공세작전 실행 직후 일본의 항복이 이뤄졌고, 당초 계획안에서는 미·영·중·소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일본 본토(혼슈, 시코쿠, 규슈, 홋카이도)와 주변 도서를 분할 통치하도록 했다.
분할 점령 계획이 수정된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원인에 대한 추측으로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따른 영향력 확대 △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데다가 내전으로 인한 중화민국의 참여 불가능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소련에 대한 불신 △소련에 대해 북일본 대신 북한을 넘겨주는 그랜드바겐설 등이 있다.
1. 미·영·중·소 4국 분할점령 JWPC385/1
1945년 8월 11일 미국 합동참모본부 내 합동전쟁계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 JWPC)는 '일본에 대한 연합국관리 및 점령군 계획(JWPC385/1)'에서 다음과 같은 일본의 4국 분할점령 계획을 작성했다.
일본 점령 초기는 미국이 단독으로 점령한다. 23개 사단 85만명의 미군을 투입한다. 조직적 저항과 반란을 진압을 위해 1년간 주둔한다.
<점령통치지역>
*미국 : 혼슈 중부, 류큐 군도
*영국 : 큐슈와 혼슈 남부
*소련 : 홋카이도, 동북지방(북일본)
*중국 : 시코쿠.
도쿄는 미·영·중·소 4개국 공동 점령. 오사카는 미국과 중국 공동점령
1년 후, 각국 주둔 병력을 절반 이하로 감축하고, 미군은 13만5000명 정도 주둔한다.
◆트루먼 대통령 서명, 4국분할안 SWNCC 70/5
1945년 8월 13일 미국 국무부에서 작성된 '종전 이후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National Composition of Forces to Occupy Japan, SWNCC 70/5)'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미국이 간토 지방과 긴키 지방을 점령하고 소련은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을, 영국은 규슈와 긴키 지방을, 중화민국은 시코쿠를 각각 점령해 통치하는 분할점령안을 기획했다. 8월 18일 트루먼 대통령은 이 극비문건에 서명했다. 계획안은 미·영·중·소 4개 연합국의 일본 점령 참여를 명시하고 있다
c. 영국, 중국과 소련은 미국과 함께 일본의 점령 및 군사적 통제에 참여할 책임과 그로 인한 부담을 분담할 의무가 있다.(1)*
◆일본열도의 4국분할을 한반도의 미소 분할로 전환
JWPC385/5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 참전의 대가로 사할린 탈환과 북방4개도서를 점령하는 것이 인정됐다.
일본이 항복한 다음날 8월 16일 스탈린은 소련군이 홋카이도와 북일본지역을 점령을 허용하도록 트루먼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이것이 실행됐다면, 소련군이 루모이에 상륙해 홋카이도를 점령하고, 결국 소련 점령지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됐을 것이다.
8월 22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는 대신 'JWPC385/3 일본 정부를 통한 미국의 단독 간접 통치방식을 전환했다. 나아가 9월 22일 변경 확정된 'JWPC385/5’에서 일본열도의 미영주소 4국분할 대신 한반도의 미국과 소련 양국의 분할 점령안에 최종서명했다.(2)*
결과적으로 소련은 북일본 대신 북한을 넘겨받은 것이다. 소련이 꿈에도 그리던 북한지역의 부동항 청진항과 원산항을 확보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완전 장악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소련으로서는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이었다.
패전후 미·영·불·소 4개국의 점령지로 변해 국토가 거열형에 처해저 사지가 찢겨진 마냥 처참하게 전쟁도발 죄에 대가를 치른 대가를 치른 독일과 비교한다면 일본은 저지른 만행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전범국인 일본은 통일된 자유국가로 남고, 식민지로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한반도는 갈라져 지금까지도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으니...이처럼 행한 대로 업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는 ‘인과응보’ 도리가 작동되지 않는 사례가 세계사에 두 번다시 찾기 힘들 것 같다.
◆북일본(닭) 대신 북한(꿩)을 차지한 소련, 단순한 결과론인가?
1945년 7월, 미육군 (현 미국방부) 작전실 (OPD)은 연합군이 한반도를 분할하고 점령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분할 점령 계획을 초안을 수립했다. 미국은 경기도, 강원도 (함경남도 원산, 안변 포함), 충청북도, 경상북도를, 소련은 함경 남북 (원산, 안변 제외)을 점령하고 영국은 평안 북도와 황해도, 중국은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분할 점령. 다만 이는 일본에 대한 분할점령과 차원이 다른 일개 미육군 작전실의 구상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미국합동 참모본부 (JWPC) 내의 합동 전쟁 기획위원회(JWPC)는 '일본 열도 및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 관리 및 점령군 계획 (JWPC385 / 1)을 수립했다. 일본군을 무장 해제 한 후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은 서울, 청진, 원산, 평양, 군산, 제주 등 주요 전략지점에 연합군을 주둔하고 한국이 독립 될 때까지 한반도를 관리하는 공동 방안이었다. 그러나 9월 22일 최종 개정된 'JWPC385/5'에서 일본의 미영중소 4국 분할 대신 한반도의 미국과 소련의 분단 점령 계획으로 변경했다.
◆3·8선 분할점령- 맥아더 사령관 ‘일반 명령 제1호’
38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국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됐다.(3)*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한반도의 분단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22일 38선을 따라 한반도를 분단하여 점령했다. 해주항이 위치한 해주 용당포는 38선의 남쪽이지만 미군과 소련 군사정부는 이를 38선의 북쪽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미군정은 춘천군 파주군과 양구군 38선 남쪽에 연천군을 배치했다.
인제군은 홍천군으로, 양양군은 강릉 군으로, 벽성군은 해주 서부를 옹진군으로, 동부는 연백군으로 편입했다. 소련 군정은 38선 북쪽 춘천 군에 새 내면 (가평군 포함)을 편입했다. 김화군 등 춘천 군 일대는 화천군으로 편입, 38선 이북 장 단군 일대는 장풍군으로 편입되었고, 옹진군 일대는 38선 이북 지역이 벽성군으로 편입됐다
◆◇◆◇◆◇◆◇각주
(1)*c. The United Kingdom, China and the Soviet Union have a responsibility to participate with the United States in the occupation and military control of Japan and the obligation to assume a share in the burden thereof.
(2)*트루먼 도서관 trumanlibrary.gov/library/personal-papers/dale-m-hellegers-papers
(3)*this plan w the President and delivered to Commander General MacArthur as 'General Order No. 1'.
분할 점령 계획이 수정된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원인에 대한 추측으로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따른 영향력 확대 △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데다가 내전으로 인한 중화민국의 참여 불가능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소련에 대한 불신 △소련에 대해 북일본 대신 북한을 넘겨주는 그랜드바겐설 등이 있다.
1. 미·영·중·소 4국 분할점령 JWPC385/1
일본 점령 초기는 미국이 단독으로 점령한다. 23개 사단 85만명의 미군을 투입한다. 조직적 저항과 반란을 진압을 위해 1년간 주둔한다.
*미국 : 혼슈 중부, 류큐 군도
*영국 : 큐슈와 혼슈 남부
*소련 : 홋카이도, 동북지방(북일본)
*중국 : 시코쿠.
도쿄는 미·영·중·소 4개국 공동 점령. 오사카는 미국과 중국 공동점령
1년 후, 각국 주둔 병력을 절반 이하로 감축하고, 미군은 13만5000명 정도 주둔한다.
◆트루먼 대통령 서명, 4국분할안 SWNCC 70/5
c. 영국, 중국과 소련은 미국과 함께 일본의 점령 및 군사적 통제에 참여할 책임과 그로 인한 부담을 분담할 의무가 있다.(1)*
◆일본열도의 4국분할을 한반도의 미소 분할로 전환
JWPC385/5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 참전의 대가로 사할린 탈환과 북방4개도서를 점령하는 것이 인정됐다.
일본이 항복한 다음날 8월 16일 스탈린은 소련군이 홋카이도와 북일본지역을 점령을 허용하도록 트루먼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이것이 실행됐다면, 소련군이 루모이에 상륙해 홋카이도를 점령하고, 결국 소련 점령지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됐을 것이다.
8월 22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는 대신 'JWPC385/3 일본 정부를 통한 미국의 단독 간접 통치방식을 전환했다. 나아가 9월 22일 변경 확정된 'JWPC385/5’에서 일본열도의 미영주소 4국분할 대신 한반도의 미국과 소련 양국의 분할 점령안에 최종서명했다.(2)*
결과적으로 소련은 북일본 대신 북한을 넘겨받은 것이다. 소련이 꿈에도 그리던 북한지역의 부동항 청진항과 원산항을 확보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완전 장악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소련으로서는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이었다.
패전후 미·영·불·소 4개국의 점령지로 변해 국토가 거열형에 처해저 사지가 찢겨진 마냥 처참하게 전쟁도발 죄에 대가를 치른 대가를 치른 독일과 비교한다면 일본은 저지른 만행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전범국인 일본은 통일된 자유국가로 남고, 식민지로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한반도는 갈라져 지금까지도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으니...이처럼 행한 대로 업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는 ‘인과응보’ 도리가 작동되지 않는 사례가 세계사에 두 번다시 찾기 힘들 것 같다.
◆북일본(닭) 대신 북한(꿩)을 차지한 소련, 단순한 결과론인가?
1945년 7월, 미육군 (현 미국방부) 작전실 (OPD)은 연합군이 한반도를 분할하고 점령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분할 점령 계획을 초안을 수립했다. 미국은 경기도, 강원도 (함경남도 원산, 안변 포함), 충청북도, 경상북도를, 소련은 함경 남북 (원산, 안변 제외)을 점령하고 영국은 평안 북도와 황해도, 중국은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분할 점령. 다만 이는 일본에 대한 분할점령과 차원이 다른 일개 미육군 작전실의 구상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미국합동 참모본부 (JWPC) 내의 합동 전쟁 기획위원회(JWPC)는 '일본 열도 및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 관리 및 점령군 계획 (JWPC385 / 1)을 수립했다. 일본군을 무장 해제 한 후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은 서울, 청진, 원산, 평양, 군산, 제주 등 주요 전략지점에 연합군을 주둔하고 한국이 독립 될 때까지 한반도를 관리하는 공동 방안이었다. 그러나 9월 22일 최종 개정된 'JWPC385/5'에서 일본의 미영중소 4국 분할 대신 한반도의 미국과 소련의 분단 점령 계획으로 변경했다.
◆3·8선 분할점령- 맥아더 사령관 ‘일반 명령 제1호’
38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국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됐다.(3)*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한반도의 분단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22일 38선을 따라 한반도를 분단하여 점령했다. 해주항이 위치한 해주 용당포는 38선의 남쪽이지만 미군과 소련 군사정부는 이를 38선의 북쪽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미군정은 춘천군 파주군과 양구군 38선 남쪽에 연천군을 배치했다.
인제군은 홍천군으로, 양양군은 강릉 군으로, 벽성군은 해주 서부를 옹진군으로, 동부는 연백군으로 편입했다. 소련 군정은 38선 북쪽 춘천 군에 새 내면 (가평군 포함)을 편입했다. 김화군 등 춘천 군 일대는 화천군으로 편입, 38선 이북 장 단군 일대는 장풍군으로 편입되었고, 옹진군 일대는 38선 이북 지역이 벽성군으로 편입됐다
◆◇◆◇◆◇◆◇각주
(1)*c. The United Kingdom, China and the Soviet Union have a responsibility to participate with the United States in the occupation and military control of Japan and the obligation to assume a share in the burden thereof.
(2)*트루먼 도서관 trumanlibrary.gov/library/personal-papers/dale-m-hellegers-papers
(3)*this plan w the President and delivered to Commander General MacArthur as 'General Order No.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