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말로 잘 알려진 신경영 선언은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오르게 된 중대 전환점이 됐다. 이 회장의 별세 이후 첫 번째 신경영 선언일을 맞았지만, 삼성은 올해 별도의 행사는커녕 그 어느 해보다 착잡한 분위기에서 하루를 보냈다.
◆李 회장 와병 중에도 신경영 선언 기념··· 2017년부터 ‘올스톱’
재계에 따르면 2014년 이 회장이 쓰러지기 전까지 삼성전자는 매년 신경영 선언 기념식을 열고 임직원 사기를 북돋웠다. 이 회장이 와병 중인 상황에서도 사내 방송 등을 통해 매년 이날을 기념하며 글로벌 기업을 향한 혁신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2017년 이 부회장과 주요 경영진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수사·재판을 받은 이후부터는 관련 행사를 일절 하지 않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신경영 선언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기념비적인 날이지만 계속된 사법 리스크로 인해 매년 조용히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특히 올해는 이 회장의 별세 이후 첫 번째 기념일이지만 이 부회장이 수감 중이라 더욱 침울한 분위기”라고 전했다.
◆마이크론, 삼성보다 D램·낸드 기술·투자 박차··· 파운드리 격차도 벌어져
신경영 선언 기념일이 그 어느 해보다 조용한 데는 삼성의 ‘반도체 초격차’ 아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한몫한다.
일례로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최첨단 D램·낸드플래시를 삼성전자보다 먼저 선보인 것도 모자라, 대규모 양산을 예고했다.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지난 2일 대만 ‘컴퓨텍스 2021’ 포럼 기조 강연을 통해 1α나노미터(㎚·1㎚는 10억분의1m) LPDDR4x D램의 대규모 양산을 발표했다. 마이크론의 1α나노 D램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14나노 D램에 해당하는데, 14나노 D램을 대규모로 양산하는 건 마이크론이 세계 최초다.
게다가 마이크론은 176단 3차원(3D) 낸드 기반의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신제품도 이날 공개했다. 메모리 양대 제품에서 사실상 삼성전자를 제치고 기술력을 뽐낸 셈이다. 내친김에 마이크론은 이달부터 대만의 첨단 A3 D램 공장 증설에 착수, 점유율 확대에 나설 계획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극자외선(EUV) 없이도 삼성전자와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는 점은 충분히 위협적”이라며 “총수 부재 상황인 삼성전자가 투자 적기를 놓치면서 경쟁사들의 추격을 허용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부문도 여전히 대만 TSMC가 투자와 기술력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로 인해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줄어드는 반면 TSMC의 점유율은 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초 미국 오스틴 공장 셧다운 영향으로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파운드리 매출은 41억800만 달러(약 4조5537억원)로 전 분기 대비 2%(약 765억원) 줄었다. 전 세계 파운드리 매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직전 분기 18%에서 17%로 1% 포인트가량 감소했다.
반면 대만 TSMC는 올해 1분기 129억200만 달러(약 14조3018억원)의 파운드리 매출을 기록, 직전 분기 대비 2%(약 2284억원) 늘었다. 전체 시장 점유율도 54%에서 55%로 1% 포인트 늘었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위기를 타개할 최대 분수령은 이 부회장의 사면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제 5단체장이 지난 4월 청와대에 사면을 건의한 이후 경제계와 종교계, 심지어 여권에서도 사면 긍정론이 거세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2일 4대 그룹 대표들의 사면 건의를 듣고 “기업의 고충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주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이어 이날 박범계 법무부 장관도 정치적 부담이 큰 사면 보다 ‘가석방’ 가능성을 언급해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을 두고 광복절 특사 유력설이 나오지만, 사면을 둘러싼 정치권의 셈법이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며 “그럼에도 현재 삼성의 위기를 타개할 해법은 총수의 귀환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