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한 세기 만에 최악의 전염병 대유행,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침체, 남북전쟁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최악의 공격.
취임 100일 하루 전인 지난달 28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물려받은 미국의 암울한 상황을 이렇게 3가지로 요약했다. 이날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연설 대부분은 미국이 왜 4조 달러(약 4500조원)가 넘는 2개의 초대형 포퓰리스트 예산이 필요한지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미 역사상 최고령인 만 78세에 임기를 시작한 바이든 대통령.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미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유년 시절 넉넉지 못한 집안 탓에 '알바'를 전전하며 학비를 마련했던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 뿌리를 '블루 칼라'(blue collar)', 즉 생산직 노동자라고 말해왔다. 그는 이날 의회 연설에서도 민주당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와 중하류층 가정을 향해 강렬한 포퓰리스트 메시지를 내놓았다. "Wall Street didn't build this country. The middle class built this country. And unions built the middle class."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중산층이 이 나라를 건설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중산층을 세웠다") 이날 대통령 연설에서 언급된 대로 미국은 "역사상 거대한 변곡점(a great inflection point in history)"에 서있다.
의회에서 지출안이 원안대로 통과된다해도 천문학적 재원조달이 관건이다. 이리하여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의 코로나19 구제지원으로 재정적자가 100%를 이미 넘어선 가운데 바이든이 꺼내든 카드는 기업과 고소득층의 '부자 증세'이다. "I think you should be able to become a billionaire and a millionaire. But pay your fair share." (당신들은 억만장자나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정한 몫을 지불하라"). 이날 바이든의 연설에서 가장 주목받은 대목이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8년간 부통령을 지낸 노회한 정치9단 바이든 대통령. 그는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뉴딜'이라는 정부의 적극 개입정책을 펼쳤던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가 택한 길은 펜데믹 종식, '미국의 재건' 그리고 부의 양극화 해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루스벨트 대통령 스타일의 '큰 정부' 부활이다. 40년 전 '작은 정부' 선언과 함께 미국 경제산업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11~2004)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정부가 바로 그 문제입니다
"현재의 위기에서, 정부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부가 바로 그 문제입니다 (government is not the solution to our problem, government is the problem)." 1981년 1월 20일 레이건이 70세 나이로 미국의 40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강조한 대목이다. 그는 미국경제가 처한 어려움의 근본 원인이 ‘큰 정부’에 있고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감세와 탈규제, 시장을 중시하는 정책기조를 부르짖은 레이건의 등장은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 이후 백악관을 주도하던 리버럴 시대의 맥을 끊었다.
그렇다면 바이든의 등장으로 레이건이 쏘아올린 '작은 정부' 시대는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까? 코로나 백신 접종 확대 등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100일 행보는 미국인들로부터 무난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오랜 기간 미국식 자본주의의 주류였던 '작은 정부'와 감세기조 철학을 잠재우는 건 그에겐 결코 쉽지않은 도전이다. 첫째, 물가상승이 심상치 않다. 초대형 돈풀기로 지난 12일 발표된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대비 4.2% 올랐다. 13년 만의 가장 높은 수치로 미국 경제에 대한 인플레이션 경고음이 날로 커지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정치적 환경으로 루스벨트 시대와 비교해서 우호적이지 못하다. 지난해 대선에서 패배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의 의회 공격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분열적 미국의 모습은 더욱 큰 변수이다.
루스벨트 집권시대(1933~1945),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 다수당 지위를 임기 내내 유지하면서 행정부가 일관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민주당은 현재 하원에서 다수당이지만, 상원에서는 공화당과 동석인 50석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상 의회에서 권력을 분점하는 공화당의 기본정책은 상당부분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 억제를 기본으로 하는 '레이거니즘'에 기초하고 있다. 공화당 의원들뿐 아니라 일부 민주당 의원들조차도 바이든의 '부자 증세' 정책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며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민주당이 내년 11월 치러지는 중간선거에서 패배한다면 바이드노믹스(바이든의 경제정책)은 동력을 크게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집권 2년차 중간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임기 내내 정책 추진에 애를 먹었다.
아무튼 바이든의 '큰정부' 실험 성공여부는 유권자들에게 가장 민감한 증세문제와 관련 어떻게 야당과 국민의 지지를 얻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연간 40만 달러 미만 소득자에게는 어떤 세금 인상도 없을 것임을 강조했다. 증세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증세 대상자를 상위 1%로 제한한 것이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지난 1993년 이후 거의 30년 만에 첫 포괄적 증세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부자 증세를 위한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낙수경제효과 (trickle-down economics)'를 거론했다. 낙수 효과란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부를 늘리면 경기가 부양되어 궁극적으로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의 소득이 증가한다는 이론으로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의 기초가 된 이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낙수경제효과는 결코 작동한 적이 없다"면서 "이제 경제는 바닥에서 위로, 중심에서 바깥 쪽으로 성장시켜야할 때"라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바이든의 주장에 미국인 51%가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4월 29일,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 결과) 바이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여론은 26%에 그쳤다. 이제는 경제를 위가 아닌 밑바닥부터, 중간부터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 형국임은 부정할 수 없다.
레이건 행정부는 '작은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스타워스'와 같은 국방비 외에는 정부 예산을 대폭 축소하고 소득세 최고 한계세율을 1981년 70%에서 1986년에는 28% 수준까지 인하했다. 아울러 규제완화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이러한 감세기조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트럼프 행정부 시대에도 이어지면서 미국 최고 부유층 1%가 차지하는 미국 전체 부의 비중은 레이건 취임 직전 23%에서 2019년에는 35% 수준으로 올라간 반면 저소득층이 차지하는 부의 비중은 크게 감소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이러한 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부의 재분배 정책이 힘을 받는 모습이다.
레이거니즘에 대한 상반된 평가
사실, 레이거니즘(레이거노믹스)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크게 갈린다.지지자들은 미국에서 스태그플레이션(경제불황 속에서 물가상승이 발생하는 상태)이 사라지고 경제성장과 기업혁명이 촉진되었다고 말한다. 반대자들은 빈부간 소득격차가 심화되고 개인주의와 경쟁제일주의가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한국에서 건너온 재미교포가 온갖 고통과 비극을 극복하며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도 1980년대 레이건이 대통령이던 시절을 배경으로 했다. 레이건의 취임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성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증가에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시카고학파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1970년대 이후 장기적 스태그플레이션이 케인스 이론에 기반한 경제정책이 실패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또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공복지 제도 확대로 근로의욕을 감퇴시켜 이른바 '복지병'을 야기한다는 주장도 편다.
레이건의 집권 8년간 경제성적표를 보면, GDP는 1/3 확대되고(연평균 3.6%, 이전 8년 평균 2.7%) 실업률은 1980년 7.2%에서 1988년 5.5%로 내려갔다. 무엇보다도 인플레이션이 13.5%(1980년)에서 4.1%로 진정되었는데, 이는 폴 볼커 당시 연준의장이 레이건 행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플레를 잡기 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고수한 덕분이라는 분석이 주류이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정책으로 그의 집권기간 고소득층의 소득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비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연소득 7만5000달러 이상의 가계가 1980년 20.2%에서 1988년에는 25.7%로 늘어났다. 연소득 1만 달러 이하의 저소득층은 1980년 8.8%에서 1988년 8.3%로 소폭 줄었다. 레이건의 정책이 현재 미국 경제부흥을 위해 땀을 흘렸던 하위계층에게 몫을 돌리는 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집권 당시 미국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삶이 크게 향상된 것은 레이건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을 합해 계량화한 소위 고통지수(misery index)가 19.33에서 9.72로 대폭 내려갔다.
레이거노믹스 성과에 대한 계속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그의 뛰어난 의사소통능력이다. 비록 3류 배우 출신이지만 섬세한 유머감각과 편안하고 친근감 있는 말솜씨는 레이거노믹스의 그늘에서 허덕이던 국민들까지도 희망에 부풀리게 만들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자신의 '뉴딜 정책'이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공산주의라는 비난까지 받았으나 당시 가정마다 보급된 라디오를 통한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수십차례 각종 정책을 설명하면서 인기를 모았다. 그의 대국민 담화는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다운 이야기라는 의미인 '노변정담(fireside chat)'으로 불린다. 뉴딜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지만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미국 대통령 중 전무후무하게 4차례 연임을 했다.
40년 만에 미국은 레이건이 추구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제부흥을 꿈꾸고 있다. 그리하여 레이거니즘의 임종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바이든 대통령이 루스벨트나 레이건처럼 미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지 여부는 적어도 1~2년은 더 지켜봐야할 듯하다. 부자증세안과 좌클릭 정책에 반대하는 공화당 보수주의자들과의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승리한다면 단순히 코로나 위기를 극복한 '소방수'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