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채 채무를 국가보증채무에 포함해 채권 발행 시 국회의 타당성 동의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가 나왔다. 공기업과 정부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은행과 같은 자본규제를 도입해 채권자가 공기업의 손실을 분담하는 형태의 채권을 발행해야 한다는 제언도 제시됐다.
황순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0일 '공기업 부채와 공사채 문제의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공기업 부채의 구조적 취약성을 지적하며 이같이 밝혔다.
황 연구위원은 "공기업은 정부의 암묵적 지급보증에 힘입어 자체 상환능력과 상관없이 항상 국채 수준의 낮은 금리로 부채를 일으킬 수 있는데 이 경우 이중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추정치에 따르면 비금융공기업 부채는 2017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23.5%다. 추정치가 존재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국 중 가장 많으며 33개국 평균(12.8%)을 크게 상회한다.
이러한 공기업 부채의 취약성은 암묵적인 정부의 보증 때문이라는 게 황 연구위원의 분석이다. 한국의 공기업은 기업 자체의 펀더멘탈이 아무리 취약하더라도 세계에서 초일류로 인정받는 민간기업보다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다.
한국석유공사는 지난해 상반기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는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석유공사의 독자적인 신용등급은 'B1'으로 투기등급이지만 최종 신용등급은 'Aa2'를 받았다. 이는 Aa3 등급을 받은 삼성전자보다 한 계단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정부의 암묵적 지급 보증이 보장되기 때문에 공기업은 재무 건전성이나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정부도 재정 부담을 초래하는 정책 사업을 무리하게 할당하기 위해 손쉽게 공기업 부채를 일으키게 된다. 채권자들도 정부의 암묵적 지급보증을 믿고 공기업의 펀더멘털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황 연구위원은 "도덕적 해이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공사채 채무를 국가보증채무에 산입해 공식적으로 관리하고 자본비율 규제와 더불어 '채권자-손실부담형(베일인)' 공사채를 도입해 공기업 부채의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가보증채무는 국회의 동의를 거쳐 기획재정부 장관이 명시적으로 보증하는 공사채다. 현재는 예금보험기금상환기금채권, 한국장학재단채권, 기간산업안정기금채권 등 세 종만이 국가보증채무에 포함된다.
황 연구위원은 "국가보증채무로 관리를 받으면 보증을 받기 위해 타당성이 충분하지 않은 사업을 위해 빚을 지는 행위를 걸러질 수 있다"며 "공기업 위험 수준을 평가한 후 위험에 연동한 보증료를 부과하면 공기업 재무구조 개선 유인을 부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본규제는 공기업과 은행의 유사성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다. 공기업이 파산하면 은행의 파산과 비슷하게 공적 서비스 제공 중단, 국가 신용도 문제가 발생한다. 황 연구위원은 "시중은행의 국제 신용등급과 독자신용등급의 차이는 3단계인 반면 공기업은 이 차이가 6~11단계까지 확대돼 있다"며 "은행보다 강력한 국가의 보호를 받는 만큼 자본규제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베일인 채권은 평상시에는 일반 채권과 같이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지만, 발행기관의 재무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면 해당 채권이 그 기관의 자본으로 전환되거나 원리금 지급 의무가 소멸된다. 즉 펀더멘털이 좋지 않은 회사에 투자한 채권자들은 일부 손실을 부담하게 되므로 정부 보증만 믿는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다. 산업은행 등 일부 금융공기업은 베일인채권을 발행 중이다.
황 연구위원은 "이 제도들이 마련되면 무리한 정책사업이 할당되더라도 국회의 국가보증심사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제동이 걸리고, 국회 통과 후에도 자본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자본을 확충하고 공기업은 사업을 적극적으로 합리화할 것"이라며 "최악의 경우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채권자가 손실을 부담하므로 국민과 정부의 부담은 줄어든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