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파르헤지아] ​반도체 웨이퍼 쥐고 흔든 바이든이 노려본 곳

2021-04-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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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반도체를 지배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왼손에 쥔 반도체 웨이퍼를 쥐고 흔들었다. 눈은 부릅뜨고 화상의 저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했다. 그 모니터 한곳엔 최시영 삼성전자 반도체부문 사장이 있었다. 이전에는 보기 드물었던 단호한 어조로, 대통령의 입술은 낱말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었다. 

 

[사진=연합뉴스]

2021년 4월12일 미국 백악관이 주재한 '반도체 및 공급망 회복 최고경영자 화상회의' 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 최사장을 비롯해, 대만 파운드리업체 TSMC의 마크리우 회장, 팻 갤싱어 인텔CEO, 메리 바라 GM회장, 순다르 파차이 알파벳/구글 CEO, 미 항공방산업체 노스롭그루먼의 캐시 워든 회장 등 19개 기업 대표가 참석했다.

바이든은 이 자리에서 상하원 65명 의원으로부터 받은 반도체 투자 지지서한을 언급한 뒤에 중국의 움직임부터 설명하며 운을 뗐다. "중국 공산당은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공격적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10월 내수 진작과 기술 자립의 쌍순환전략을 내세우며 기술 패권 확보에 올인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이후 바이든은 트럼프 전정부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중국을 경계하는 발언을 내놓기 시작했다.

"반도체 지배력, 중국에 넘어가면 끝장"

그 경계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는 분야가 바로 반도체다.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 상품이 아니다. 반도체 칩은 시민의 삶을 지배하는 디지털 첨단제품과 서비스, 그리고 공공 인프라를 움직이는 필수품이다. 그뿐만 아니라 첨단 무기 시스템을 운용하는데 반도체는 빠질 수 없다. 그러니까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초핵심 안보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의 글로벌 지배력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날, 모든 게 끝"이라는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박영준 교수(서울대 전기공학부)는 진단한다. 이런 위기의식이 미국 내부의 여론을 결집시키고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바이든이 의회 지지서한을 먼저 내보인 까닭은, 초당적으로 기술패권을 지켜야 한다는 미국 내부 합의가 이뤄져 있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반도체 인프라를 수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제의 인프라를 수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 세계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계를 주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쟁력은 여러분들(회의 참석자들)이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이든의 이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비록 화상이지만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미국 내의 투자를 늘리라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구체적인 산업 분야에서 이렇게 투자 요구에 공개적으로 팔을 걷은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우리의 경우, 삼성전자를 향한 직격탄이기도 했다. 백악관은 회의가 끝난 뒤 "다시는 반도체 부족에 직면하지 않도록 미국에 추가 반도체 제조역량을 장려해야 한다는 논의를 했다"고 다시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미, 반도체 자체생산 국가로 바꾸겠다

바이든이 이런 자리까지 만들어 강력한 입장을 전달한 속내는 뭘까. 그 핵심은 '바이든의 반도체 그림'이다. 미 정부는 외국기업과 공생관계로 이뤄져온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바꾸고자 한다. 미국은 반도체 개발 및 설계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확보하고 있지만, 자체 생산은 세계 생산량의 12% 뿐이다. 주요 생산국은 동아시아 국가들로 대만(22%), 한국(21%), 중국(15%), 일본(15%)이 생산한다.

그간 '설계는 미국, 생산은 동아시아'라는 분업 공식이 만들어져 있었다. 미국은 이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해외 의존적인 생산시스템을 미국 내부로 옮겨와 '자기 완결성'을 갖춘 공급망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중국을 제외한 주요 생산국가 기업들을 채근해 미국 현지 투자를 대폭 확대하는 전략을 짜놓고 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의 '진영(陣營)'을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설득과 압박을 집중하고 있다.

"일개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상황 아니다"

한국 기업으로서 바이든의 이런 요구가 곤혹스러운 까닭은, 하나로 연결된 글로벌 공급 사슬(GVC)이 무너지면서 기업 스스로 섣불리 어떤 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 때문이다. 기술 패권을 지키겠다는 미국에 대해서 동조할 필요도 있지만, 거대한 시장을 지닌 중국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아직도 이 시급하고 엄혹한 문제에 대해 어떤 뚜렷한 방향도 내놓고 있지 않고, 국가로서 어떤 발언을 한 적도 없다. 미국은 이미 2조5000억 달러의 인프라 건설투자를 계획하고 있고, 그 가운데 500억 달러는 반도체 생산과 연구 예산으로 잡아놓았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핵심 재산권들을 미국이 대부분 가지고 있기에 한국을 비롯한 반도체 생산국의 기업들은 극심한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없다.

중국내 메모리공장 첨단화 계획 어쩌나

향후 반도체는 첨단기술력을 이끄는 지렛대로 미중대결은 안보경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기에 반도체 기업들은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 당장, 바이든은 대중국 수출 봉쇄 대상을 차세대 반도체 장비 뿐 아니라, 주력 장비로까지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파랗게 질렸다. 중국에서 가동하는 메모리공장을 첨단화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관련 국내기업들의 무기력감은 지금 이루 말할 수 없다. 1달러 짜리 반도체칩이 동나자 현대차가 공장을 일부 멈춰세웠다. 이런 비명이 앞으론 더 커질 판이다.

반도체 관련, 한국 정부의 얼굴이 안 보였다 

한국 전체 수출의 20%를 반도체 한 품목에 의존하는 나라가, 미국 현지투자를 종용받는 사태 앞에서 제대로 의견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정부의 얼굴이 거의 안 보인다. 재계에서도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작년말 자동차 칩 대란이 일어났을 때도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넉달 뒤인 최근에 업체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한 게 전부다.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반도체 관련 기업 CEO들을 부른 것도 그런 비판을 의식한 뒤늦은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 등 한미일 3국의 안보실장 회의의 의제도, 북핵과 반도체였다.

국내기업 반도체 생산 주력, 미국 내줄 판

미국의 압박에 국내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투자를 서두르고 있는 형편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내에 170억 달러 추가 투자를 결정한 바 있고, SK하이닉스도 공장을 더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바이든이 반도체를 쥐고 흔드는 장면은,우리 기업의 주력 반도체 생산라인이 미국으로 건너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된다는 신호다. 충격적인 미래가 곧 현실이 된다는 암시가 저 사진 한 장 속에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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