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이런게 '팩션 사극'...역사에 진심인 감독, 인물 살려낸 배우

2021-04-0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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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 31일 개봉[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가 뒤섞여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 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관객들도 필자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필자는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 '최씨네 리뷰'를 통해 좀 더 편안하게 접근해 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요지경 속이었다. 최근 역사에 상상력을 더한 이른바 '팩션(팩트+픽션) 드라마'가 각종 역사 왜곡과 문화 침탈적 내용을 포함했다는 이유로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드라마 '철인왕후'는 VOD 서비스를 중단했고, '조선구마사'는 첫 방송 후 5일 만에 폐지를 결정했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역사와 인물을 훼손하지 않고 그의 정신을 지키며 빈칸을 채워 나가야 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 '표현의 자유', '창작자 권리 침해' 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팩션 사극, 퓨전 사극은 결국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상상력에도 개연성과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상상력은 창작자가 실제 역사와 인물을 정확히 알고 이해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팩션 사극에 관한 대중의 불신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31일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의 사극에 관해 대중은 의심이나 우려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오랜 시간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상상력을 펼쳤어도 대중을 불편하게 하거나 역사 왜곡 등의 논란이 불거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역사에 진심인 감독이니. 역사적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우더라도 인물의 정신이나 메시지가 훼손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영화 '자산어보' 정약전 역의 배우 설경구.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섬 안에 덕순 장창대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독실하게 옛 서적을 좋아했다. (···) 결국 나는 그를 초청하고 함께 숙식하면서 함께 궁리한 뒤, 그 결과물을 차례 지워 책을 완성하고서 이를 '자산어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영화는 어류학서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시작됐다.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 분)은 바다 생물에 매료돼 책을 쓰기로 한다. 그는 흑산도에서 나고 자라 바다를 훤히 꿰고 있는 청년 창대(변요한 분)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그는 "사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누구보다 바다와 물고기에 관해 잘 알고 있지만, 창대는 글공부에 더 큰 욕심이 있다. 하지만 홀로 글공부하는 건 한계가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한다. 창대는 이를 받아들이고 정약전과 '자산어보'를 집필한다. 서로의 스승이자 벗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 길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며 그를 떠난다.

이준익 감독은 대척점에 서 있는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통해 근대성과 인물의 정신을 그려낸다. "개인의 관점으로 근대성을 보고자 한다"는 이준익 감독은 인물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근대성을 담아낸다.

영화 '동주', '박열'이 그랬듯 '자산어보' 또한 위대한 인물을 조명하기 전 그의 곁을 지킨 인물을 집중했다. "한 시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옆에는 그 못지않게 위대한 인물이 있다"는 이준익 감독의 뜻이 그대로 담긴 대목이다. 창대라는 인물을 통해 정약전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 개인을 통해 조선의 근대성을 담아낼 수 있었다.

영화 '자산어보' 창대 역의 변요한.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는 정약전과 그의 형제 정약용을 중심으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황사영·정약종 등 역사적 사실을 쌓으며 기반을 다졌고, 창대를 통해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저술서들의 집필 과정부터 정약용의 한시 등 곳곳에서 역사 속 일화들을 마주하는데, 알면 알수록 재미가 커지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영화 자체로도 즐기는 데 어려움이 없으나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 인물과 시대에 관한 호기심이 생긴다는 건 '팩션'에 필요한 덕목이다.

영화 '동주'에 이어 또 한 번 흑백 영화에 도전한 이준익 감독은 색채를 덜어내고 인물과 감정에 집중했다. "흑백이 주는 장점은 선명성"이라는 그의 말이 허투루 느껴지지 않게 영화는 인물과 그의 내면을 또렷하게 전달한다. 흑백으로 그린 풍광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 깊다. '자산어보'로 첫 사극에 도전했다는 설경구는 어떤 보탬도 없이 담백하게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이준익 감독이 말하는 '본질'에 가까워지고자 한 노력이다. 창대 역을 맡은 변요한도 안정적으로 연기, 믿음직하게 영화를 끌어간다. 정약전의 곁을 지키는 가거댁 역의 이정은은 영화의 감칠맛을 더한다.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작품의 온도와 딱 들어맞는다. 지난달 31일 개봉했으며 러닝타임은 126분,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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