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돋보기] "선박 안에 생명 있어요"…수에즈 사태가 불 지핀 '동물권' 논란

2021-03-3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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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 '마비' 사태로 배에 실린 동물 수천 마리 아사 위기

동물권 옹호 단체 애니멀 인터내셔널 "식량 부족으로 가축에 재앙 닥칠 것"

지난 2019년에도 화물선 전복으로 양 1만4000마리 수장돼...되풀이 우려

동물복지그룹 "선박은 동물 수송에 부적합…질병과 스트레스 위험 높아"

수에즈 운하 제방에 뱃머리가 박혀 있는 컨테이너선. [사진=AFP·연합뉴스]


가축 약 9만2000마리가 망망대해에 갇혔다. 지난 일주일간 꽉 막혔던 '세계 해상 교역 핵심 통로' 수에즈 운하 얘기다.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Ever Given)호가 23일(현지시간) 수에즈 운하를 지나던 길에 좌초해 뱃길이 막히면서 가축을 태운 선박들의 발이 묶였다. 전날 에버 기븐호의 부양 작업 성공으로 운하 통행은 재개됐지만, 완전 정상화까지 열흘 이상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가축들이 바다 위에서 아사할 위기에 처했다. 동물권 단체는 3년 전 화물선 사고로 양 1만4000마리가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한 사고가 되풀이되는 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선박 운항정보 사이트 마린트래픽은 28일 가축을 싣고 운항 재개를 기다리는 선박이 13척에 달한다고 밝혔다. 영국 가디언은 자체 파악한 9척에 동물보호단체가 확인한 11척을 더해 최대 20척이라고 했다. 선박 대부분은 유럽에서 중동으로 가던 길이었으며, 운하 근처에 대기하던 배 여러 척은 루마니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는 배라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또 한 관계자의 말을 빌려 선박에 갇힌 가축 수는 9만2000마리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가축이 바다를 건너는 이유는 사우디가 세계 최대 양 수입국이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루마니아에서 살아있는 양을 수입해 이슬람 방식으로 도축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슬람식 도축방식인 '다비하'에 따라 도축된 고기만 할랄(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게 허용된 제품)로 인정한다.
 

[그래픽=김한상 기자]


전날 에버기븐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사상 초유의 수에즈 운하 항로 중단 사태는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지만, 배에 실린 가축들은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막혔던 수에즈 운하의 물길은 뚫렸지만, 어느 선박을 먼저 통과시킬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재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대기 중인 선박은 367척으로, 데이터회사 리피니티브는 수에즈 운하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선박이 정리되는 데만 열흘 이상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가축을 실은 선박 대부분은 열흘 이상을 버틸 사료와 물 여분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수많은 가축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고 전문가는 우려하고 있다. 동물권 옹호단체 '애니멀 인터내셔널'의 가브리엘 파운 유럽국장은 "이틀 안에 (가축용) 물과 사료가 떨어지는 배들이 있다. 24시간 이내에 운하가 열리지 않으면 중대한 비극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수에즈 운하 사태로 가축이 위험에 처하자 산 가축을 배로 운송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도 나온다. 동물복지단체 '컴패션 인 월드파밍'의 피터 스티븐슨은 "배에 수천 마리 가축을 빽빽이 싣고 장기간 운송하는 방식은 가축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질병에 걸릴 위험을 높인다. 일부 배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다가 전용돼 가축 운송에 완벽히 적합하지도 않다"라고 지적했다.
 
3년 전, 양 1만4600마리 떼죽음···수에즈 운하 사태로 되풀이될라
살아있는 가축에 대한 장거리 운송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9년 루마니아 해상에서 양 1만4600마리를 실은 화물선이 전복돼 양 대부분이 수장되자 가축 장거리 운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마니아 가축사육 및 수출협회 마리 파나 회장은 "장거리 수송에서 가축을 보호할 수 없다면 이를 금지할 수밖에 없다. 화물선 전복 사고로 충격을 받았으며 즉시 긴급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9년 11월 24일(현지 시간) 루마니아 미디아 항을 떠난 화물선 퀸힌드호가 출항 몇 시간 만에 전복됐다. 이 사고로 양 1만4000마리가 희생됐다. [사진=YTN 영상 갈무리]


가디언은 "매년 (양을 실은) 약 100척의 화물선이 루마니아에서 출발하는데, 운동가들은 이를 '죽은 배'라고 칭한다. 더운 여름에는 양들이 선상에서 산 채로 익을 위험이 있다고도 말해왔다"고 전했다. 또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보고서를 인용해 "가축을 해상으로 운송할 때 각 지점마다 가축에 대한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 (책임소재가) 불확실하다"고 꼬집었다.

국제동물권단체 페타(PETA)도 "살아있는 가축을 장시간 운송하는 일은 (가축에게) 극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불필요한 관행이다. 또 운송 중에 화재나 침몰 등의 사고로 가축들의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비위생적인 가축 운송은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 사스 등 동물 바이러스 확산의 주요 원인"이라며 가축 운송 금지를 촉구했다.
 

화물선을 가득 채운 양들의 모습 [사진=호주 동물보호단체 'Animals Australia' 유튜브 영상 갈무리]


한편, 이번 수에즈 사태로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식용 목적의 가축에 대한 동물권의 필요성이 제기된 가운데, 영국은 유럽 국가 중 최초로 살아있는 가축의 수출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영국 당국은 지난해 12월 도축 등을 위해 가축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출 금지 계획'을 내놨다. 정부는 올해 여름쯤 관련 법안을 의회에 상정할 계획이다.

영국 환경부는 "살아있는 가축들은 수출 과정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면서 고통과 부상을 겪는다"며 이번 개선안이 동물복지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영국 정부는 수출뿐만 아니라 영국 국내에서도 가축이 일정 시간 이상을 트럭에 실려 이동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다.
 

[사진=아주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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