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골짜기 정신에서 세계 사상 나온다

2021-03-1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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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⑧ 김흡영 교수<下>

조선 사회는 유교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본산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인 사회가 됐다. 유학의 지나친 보수성과 배타성으로 결국 조선 유교사회를 멸망시켰다고 김흡영 교수는 <가온찍기>에서 지적한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1,000년 동안 꽃을 피웠다. 조선에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왕실의 여인들까지도 불교 신앙에 의지했다. 조선은 국방의 중요 부문을 사찰과 승려에 의존할 정도였다. 개신교는 유교 불교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세계 최대의 교회가 한국에서 나왔다. 북한의 김일성교를 종교로 분리하는 학자들도 있다. 세계에서 공산주의가 멸종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이 과잉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본 주제입니다. 저는 이걸 골짜기 멘탈리티(mentality·사고방식)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골짜기 사람들이라 처음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대신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오랫동안 원형을 간직합니다. 세계에서 불교나 유교나 한국처럼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중국도 불경 원전이 없어져서 한국에 와서 원전을 받아간 적이 있고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중국엔 유교적 제사 같은 것이 사라져서 한국에서 배워갔죠. 한국의 이데올로기도 공산주의 자본주의 둘 다  원형에 가깝죠. 그런데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올 때부터 근본주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도 골짜기 멘탈리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경을 읽어보면 6장에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현빈지문 시위천지근(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골짜기의 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이것을 현빈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Mysterious Female(신비로운 여신)로 번역을 하지요. 이 현빈의 문이 천지만물의 근본이지요. 사실 모든 게 골짜기에서 시작하거든요. 사람도 현빈의 골짜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골짜기가 모든 것의 시작, 시원(始源)이에요(김 교수는 始源을 字로 쓰고 있다). 그런 의미로 바라보면 한반도가 세계의 골짜기라고 볼 수 있죠. 다석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살리는 사상과 영성은 한반도 골짜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흡영 교수가 소수서원 취한대를 찾았다. 그의 고향인 무섬마을은 여기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다. [사진=경향신문 제공]


-류영모 신학은 지나치게 금욕주의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요. 다석사상의 대중화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요?
“(웃음) 지금 이 질문이 다석의 제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참 치열하게 다석을 따라서 일일일식(一日一食)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석의 윤리와 일상은 몸서리치도록 치열합니다. 나도 몇 년 일식을 해봤는데, 나는 좋지만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해요. 내가 밥 먹었는지 여부를 아내와 자식이 신경 쓰기 시작해요. 밥 먹을 때와 배고플 때는 표정부터 다르니까…. 나는 도를 닦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주는 거예요. 학교에서도 배가 고플 땐 강의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고요. 물론 제가 도가 모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석은 귀한 도인이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율배반적이에요. 그분이 ‘빈탕한데’ 즉 텅빈 데를 주장하신 분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도 꽉 차 있거든요. 누가 들어설 틈이 없어요. 말은 ‘비워 두라’고 하지만 꽉 찬, 그래서 사실 몸과 이웃이 품어지는 공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는 그런 의문도 가질 수 있죠.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몸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생각을 갖게 됐을지도 모르죠.”
그는 여기서 다석의 큰아들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석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버클리대학 도서관에서 사서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다석 자료를 찾고 있으니까 그분이 관심을 표시하더라고요. 자기가 다석은 직접 못 만났지만 다석의 아들과 교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석의 아들이 워싱턴에 살 때 은퇴하고 세상을 뜰 때까지 거의 매일 워싱턴 대학 도서관에 나오셨대요. 그분은 언어에 천재적이었답니다. 대학을 안 나왔는데도 박사과정의 한국인 학생들을 많이 도와줬대요. 다석 어른의 고집 때문에 대학도 못 가고, 대학자가 될 만한 소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대학의 도서관에 앉아서 소일 삼아 후학들을 도와준 거죠.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다석이 우수한 아들에게 기회를 안 준 거죠. 과연 그런 교육이 옳은 것인가. 그러한 태도가 다석 사상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후학들은 그걸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다석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첫째아들 의상은 해방 후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다 6·25 전쟁이 나자 일본 맥아더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공문을 번역하고 미군방송에서 우리말 방송을 했다. 의상은 휴전 회담을 할 때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했을 만큼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 그는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김흡영 교수의 글에 나오는 다석의 아들은 의상이다. 둘째 자상은 평창에서 농사를 지으며 벌을 치고 젖양을 길렀다. 다석은 여름 8월 한달 동안 YMCA 강의가 쉬는 때면 매년 둘째 아들네 평창 농장에 갔다. 다석 부부와 자상의 묘소가 평창에 있다. 셋째 각상은 무선통신사를 하다 일본 여인과 결혼해 일본에 살았다.

몸 수행 중시한 다석 사상, 몸과 얼 이원론으로 나눠선 안돼

-그리스도교 신학이 종교개혁 이후 말과 글 중심으로 환원되어 몸을 망각했다고 ‘가온 찍기’ 책에 썼는데요. 서양 기독교사에서 종교개혁 이전 중세에는 실천수행이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중세까지는 수도원에서 몸을 쓰는 그런 수행 전통이 있었죠. 제도권과 수도원은 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제도권은 항상 부패하게 되고 그러면 기도원 운동이 일어나서 기독교가 새로워지는 식이죠. 루터가 위대한 종교개혁 사상을 펼쳤는데, 내가 보기에 큰 역할을 했지만 독이 되기도 했어요.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구원이 개인보다는 교회와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졌거든요.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Coram Deo)을 신학의 핵심으로 본 점은 엄청나지만, 개인주의적이고 영혼 중심주의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의 몸이 날아가 버렸죠. 나라는 것은 영혼일 뿐만 아니라 천지인 중에 몸과 함께 연결된 ‘점’입니다. 천지인이라는 큰 맥락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온찍기입니다. 그걸 분명히 해준 이가 다석이죠. 과거의 기독교에선 그러한 몸 수행이 있었지만, 근대에 와서는 상당히 약화했고 그것을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다석의 통찰이 굉장히 유의미합니다.”
실제로 다석은 요가 체조 등을 통해 몸을 단련했다. 그 때문인지 하루 한 끼만 먹고서도 91세까지 장수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워가 다석의 인간론, 몸신학의 핵심이라고 했는데요, 모든 경전이 이 세 가지의 가르침에 수렴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다석 몸신학을 요점만 쉽게 설명해보세요.
“몸을 성하게 한다는 것은 ‘참몸’을 만드는 거죠. 체조를 통해서. 다석이 체조(體操)라고 했어요. ‘맘놓이’는 정조(情操)라고 하세요. 참마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죠. ‘바탈태워’는 지조(志操)라고 하셨어요. 의지, 바탈을 닦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몸 고르기(調身), 마음 고르기(調心), 숨고르기(調息)와 연관이 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이분의 ‘성명쌍수(性命雙修)'에서 성을 고르는 것(바탈태워)만 볼 게 아니라 몸과 숨을 연마해서 명을 고르는 게(몸성히, 맘놓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에서 바울이 예배의 최고의 경지는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거라고 했어요(로마서 12장 1절). 다석이 그것을 기독자(基督者)라는 한시로 기막히게 표현했습니다.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내 몸이 숨을 쉬는 게 기도다. 기도란 생명의 원기인 하나님을 들이마시고 쉬는 것이라 했죠. 찬미반주건맥박은 성가대가 악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뿐 아니라 내 맥박이 뚝딱 뛰는 게 찬미반주라는 것입니다. 이게 몸신학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몸에 대한 통찰을 통해 얼나로 나아가는 것이 다석의 핵심이라고 하면 틀리진 않았지만, 몸의 중요성이 희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몸나가 곧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이기적인 나’라는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몸을 비하하고, 정신에 비해 육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서구 이원론에 맞닿게 될까 우려됩니다. 주역을 공부해보면 지천태(地天泰)라는 괘가 나옵니다. 지천태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은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삽니다. 하늘은 빛을 아래로 비추고 땅은 물을 올려주어야 합니다(水昇火降). 그래야 나무와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은 땅이고 얼은 하늘이죠. 성명(性命) 수행은 얼이 내려가고 몸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죠. 혼(얼)은 올라가고 몸이 내려가면 혼비백산이란 말 그대로 되는 파멸의 길입니다. 몸은 필요 없고 정신만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성적 문제는 어떻게 몸인 지구를 회복시키는가에 있어요. 우리의 몸을 살리자면 어떻게 독을 빼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거죠.
오늘날 인공지능이 나오고 코로나도 뛰쳐나왔습니다. 이 골치 아픈 몸을 없애고 수퍼 머신 바디(body)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개선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첨단 기술에 의해 완전히 성능이 증강된 인간 이후의 존재자인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등장을 예고하는 시대입니다. ‘영생을 꿈꾸는 초지성이 되어야 한다’ ‘몸을 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종교와 인류가 처한 최대 난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몸나’ ‘얼나’로 구분해 따지고 있으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거죠.

생태계 파괴한 근거 제공한 기독교 자성 나와야          

-다석의 한글 놀이는 재밌지만 어렵습니다. 그의 한글신학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한글창제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요? 다석의 한글 사랑에 대한 김흥호의 해설을 읽다보면 구약에 나오는 유태인의 선민(選民)사상을 닮은 것 같습니다. ‘한글은 우리 민족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한글은 하나님의 글이요. 정음은 복음이다. 한글만으로도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저도 다석 선생님의 한글놀이를 ‘참 재밌다’ ‘오묘하다’ ‘어떻게 이분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무릎을 칩니다. 기가 막힌 용어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한글을 다시 창제한 거죠. 다석의 한글 사용을 훈민정음 시대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서양어의 단어도 시대에 따라 바뀌지요. 다석이 한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묘하게도 한글은 철저하게 천(天) 지(地) 인(人)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이버 시대에 가장 잘 통용할 수 있는 글자라고 볼 수 있죠. 한글엔 틀림없이 그런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신 글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석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결국 철학 신학 특히 인문학은 언어의 싸움입니다. 현대의 대표적 철학자 하이데거는 모든 철학을 독일어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깊은 통찰, 철학, 사상을 알려면 먼저 우리의 언어의 지평으로 들어와라, 그러고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를 배우려면 독일어를 열심히 하고, 독일어 안에 들어가서 그 어원을 찾아내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하는 정도까지 갑니다. 다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생태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성경에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자연파괴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를 비롯한 어려운 위기를 가져온 종교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20세기 중반부터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생태신학은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서구와 세계를 지배한 로고스 신학은 철저하게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몸과 자연을 비하하고 억압하는 데 별 문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도(道)의 신학을 주장해왔습니다. 정신 중심의 로고스 신학에서 몸과 자연 친화적인 도의 신학으로 모형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여성의 소중함을 복구하고 생태계를 복구해야 한다는 것을 에코 페미니즘(eco feminism)이라고 합니다. 생태의 위기를 맞아 서양에서 내놓은 가장 유력한 신학이고 사상인데, 아직도 서양의 이원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 사상이나 태극 사상은 상극을 넘어 상생을 주장해왔습니다. 생태신학에 다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몸나 얼나로, 몸과 얼을 갈라놓으면 다석의 중요성이 희석될 수 있습니다.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서구의 영혼 중심적인 사유체계에서 몸과 숨의 영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것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다석 사상에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꾸로 몸과 얼을 자꾸 구분하려 드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염통 노래' '밥통 노래'는 왜 했겠습니까? 염통을 바라보면서, 염통이 몸에서 하는 무언가를 보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몸으로 수행하며 하는 얘기거든요. 몸통 노래, 밥통 노래를 이야기하는 분을 두고 몸과 얼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면 핀트가 어긋난 것이죠. 숨도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목숨, 말숨, 우숨으로 나뉘거든요. 그의 사상은 결국 몸과 숨으로 말과 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말과 글의 신앙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본래 신앙은 말을 넘어서 몸으로, 글을 넘어서 숨으로 하는 차원의 신앙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구 생태신학의 경우 몸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숨이라는 걸 모릅니다. 숨이 사실 가장 중요한데, 숨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기계 인간이 되고 인간이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 사이버 세계와 기계인간이 인간과 다른 점은 몸과 숨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이버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 아시죠? 게임을 할 때 자기 아바타 속에 들어가버려요. 아바타와 자기를 분리하지 못해요. 그건 고치기 힘든 병이 되어버립니다. 아바타는 몸과 숨이 없거든요. 그러한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성의 비밀이 몸과 숨에 있는데, 그걸 몸과 얼로 나누기 시작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의 책에서 다석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시기적으로 언제쯤입니까. 다석도 기독교에 대한 사상이 변화를 겪지 않습니까. 부활은 로마의 국교가 된 뒤 예수가 신격화하면서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던데요.
”동광원 마지막 강의 같은 것을 들으면, 분명히 그분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성육신 신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평신도들 앞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느라 그런지 모르지만 그 자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소수서원 강학당에서 미국의 동양계 신학교육자들이 유교예절 교육을 받았다. [사진=김흡영 교수 제공]


 

-다석은 “예수의 재림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고 정말 해야 할 일은 예수를 따라 자기의 생명완성에 정진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다석은 예수의 재림에 부정적이었나요?
“기독교 신앙과 예수를 얘기하면서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석도 예수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재림의 문제는 어느 신학자도 다 고민하는 거예요. 재림이 있다고 하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값싼 은총을 믿는 사람들에겐 굿 뉴스지요. 그러나 이미 천당 가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삶의 현장 속에서 윤리와 도덕을 간과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이 큰 것이죠. 우리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과 사회적 도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재림의 문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현재 이 시점에서 예수의 도를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데 방점을 찍어야지, 재림을 기다리면 된다는 식의 싸구려 신앙은 곤란하다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제목인 가온찍기를 쉽게 설명하면….
"‘가온찍기’라는 건, 기역은 하늘, 니은은 땅이고. 그 사이 ‘아래 아’는 천지인의 자리 속에서 자기의 참 자리를 찾아서 찍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천지인이라는 연결망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내는 거죠.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하늘(하나님)과 땅(자연), 그리고 나의 관계성 속에서 통합적이고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나’라는, 즉 ‘참나’를 찾는 것부터 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죠.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웃음)”
“어려운 얘기지만 쉽게 얘기하겠다”고 해놓고 더 어려워진 것 같다.
-학자로서 앞으로 구상을 말해주기 바랍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서울에 있습니다만 봄이 되면 다시 서울과 영주를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신학자로서 한국 기독교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과거와 단절되었거든요. 우리의 과거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과학기술의 시대입니다. 코로나와 기후변화 같은 것도 과학기술을 통해 또 해결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 시대에 우리의 신앙, 종교, 영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다석의 통찰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국내에서 도의 신학을 대중화하고 또 세계로 나아가 도의 신학 및 몸과 숨의 영성을 가지고 죽어가는 지구촌을 살리는 영성의 자료로써 이바지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는 “다석이라는 선지자는 내가 지금 발전시키고 있는 ‘도(道)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광맥의 하나”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 정리=이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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