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 프리즘]
탈원전 정책을 내세운 현 정부가 북한에 원전 건설을 검토한 사실이 전해졌다. 이런 검토 과정이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든 실질적인 정책 수립을 위한 작업이었든 상관없다. 대통령의 탈원전 대선 공약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업이 단순히 ‘브레인스토밍’ 차원이라 해도 문건화를 지시한 이나 이행한 이는 대통령의 정책과 입장을 거역했다. 그런데 2018년 우리의 외교를 복기하면 시계열상 이 작업을 ‘브레인스토밍’만으로 볼 수 없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한 USB에 북한 원전 건설과 관련한 문건이 포함됐는지의 여부를 놓고 정치권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다. 설전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이 드러났다. 유엔 대북제재가 유효한 가운데 어떻게 이런 발상이 나올 수가 있는가이다. 정부 측의 답변은 제재 때문에 ‘검토’만 했다는 것이다. 졸속 답변임이 분명하다. 왜냐면 그해 우리 정부와 대통령의 외교 행보가 이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있은 후에 이것이 ‘검토’ 수준이 아니라는 정황적 증거가 너무 많았다.
그해 7월 이후 정부는 대북제재 완화 또는 해제를 요청하는 외교에 대통령까지 적극 나섰다. 필자는 당시 본지에 기고한 칼럼(2018년 12월 18일자 '낙제점의 평화외교와 자승자박의 2019' 참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9월에는 대통령이 유엔에서 이를 호소했다. 10월의 유럽순방에서도 영국,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에게 대북제재 완화를 당부했다. 하지만 그들은 냉담했다. 12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과 이후 방문한 뉴질랜드에서도 대통령의 호소는 계속됐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모두가 북한의 비핵화 이전에는 제재 완화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대통령이 자신감을 가지고 이 같은 행보에 나선 배경을 보자. 우선 북한의 비핵화 의지이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특사의 평양 방문 과정에서 김정은이 비핵화를 약속했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주장이다. 그가 1년 내에 비핵화를 약속했다고 시간까지 정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약속을 우리는 대통령과 청와대 인사들이 고스란히 미국에 전달했다.
북한은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며 일단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면서 폐쇄했다. 그리고 7월에는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의 영구적 폐쇄조치 결정을 선언했다. 그러나 풍계리에 대한 외부 검증을 북한이 거절하면서 김정은의 약속은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대통령은 김정은의 약속을 확신했다. 대통령은 그해 10월 12일 BBC와 한 인터뷰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국제사회의 조치(제재 완화)가 있어야 비핵화에 진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더 나아가 대통령은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 완화를 검토해야 하는 근거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이 요구하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를 할 뜻을 폈다는 점”을 제시했다.
더 기막힌 사실은 대통령이 “북한이 요구하는 '상응 조치'에 대해서는 '종전선언'뿐 아니라 '평화협정 프로세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한 대목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출판된 당시 백악관 인사들의 회고록을 보면 현실은 달랐다. 이들은 종전선언을 북한이 요구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가령,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방에서 일어난 일>에서는 종전선언의 아이디어가 문재인 대통령의 것으로 보였으며 문 대통령이 원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의 판단은 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있기 직전 김정은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그가 종전선언에 관심이 없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대북제재 완화 외교는 2018년 11월 30일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르헨티나 G-20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강력한 경고 때문이었다. 비핵화 전까지 제재가 유지되어야 하는 입장을 트럼프가 강력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에 문 대통령도 미국과 일치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래도 북한 제재 완화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버리지 못한 듯했다. 다음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네덜란드 정상과의 만남에서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진행하면 유엔 차원에서 제재 완화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더 이상의 대북제재 완화 외교는 없었다.
정부의 대북제재 완화에 대한 안일한 문제의식도 실망스럽다. 북한이 설령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타결해도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는 쉽지 않다. 미 행정부로서도 미 의회에 이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정부는 아마도 유엔 제재의 완화를 강조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유엔 제재 역시 만만치 않은 과제다. 2006년 첫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을 주도했던 나라가 일본이다.
필자가 지적했듯이(본지 2020년 7월 23일자 '대북제재 풀 수 있다··· 일본을 움직여라' 참조) 일본이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 전제조건은 단거리·중거리 미사일과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재래식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다. 그야말로 핵무기와 함께 북한에 백기투항을 요구하는 의미다. 그래서 유엔제재의 완화나 해제 또한 정부에게는 난제일 수밖에 없다. 특히 한·일관계가 오늘날과 같이 경색된 국면에서는 말이다.
외교장관 내정자의 인사 청문회에서 북핵문제에 관한 그의 답변은 국민을 다시 한 번 실망시켰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다시 되새김질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 측에서 그런 의지가 북한에 없다고 반박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입증되었다. 정부는 이제 남은 기간만이라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고,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면서 더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원전 건설 논란 등 남남갈등 대립이 지속되면 ‘국력 낭비’를 막을 수 없다. 이를 위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