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7)] 나 어디 좀 간다, 다석 실종사건

2020-12-2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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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찾아 떠난 길…

[다석 류영모]



과식하는 건, 밥 먹을 줄 모르는 것

낙상으로 입원한 지 29일 만에 서울대학병원에서 퇴원했다. 1961년 12월19일의 일이다. 71세의 몸이 의식을 잃은 채 실려갔다가, 근 한달 만에 돌아온 이 사건은 류영모의 사상과 믿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육신은 결코 섬길 대상이 아니며 정신을 실어나르는 캐리어 정도로 인식했던 류영모에게, 사경(死境)을 방불하는 신체 위기는 삶과 죽음에 관해 더욱 깊이 음미할 만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는 불교적 개념인 탐진치(貪瞋痴), 즉 탐욕(貪欲)과 진에(瞋恚, 성내는 일)와 우치(愚癡, 어리석음으로 저지르는 일)를 인간 육신이 불러일으키는 근원적인 문제의 핵심으로 보고, 본능에 붙어있는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인간짐승(獸性)을 벗는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탐욕의 핵심은 식욕이며, 진에는 승부욕이며, 우치는 색욕으로 압축했다. 가장 아끼는 제자와의 결별까지 부른 일은 색욕이었고 그가 짐승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기에 같은 길을 동행할 수 없다는 '파계(破戒)'로 규정한 바 있다. 류영모가 그토록 단호했던 까닭은, 색욕이 그만큼 질기고 집요한 '인간짐승'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낙상 이후 1962년 3월 2일 류영모 금요강좌가 다시 시작됐다. YMCA로 지팡이를 짚고 나와, 이런 말을 했다.

"흔히들 식욕보다 색욕을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낳은 지 첫돌만 되는 아기도 숟가락질로 밥 먹을 줄 안다고 하는데 환갑 진갑 다 지낸 내가 밥 먹을 줄 모른다고 하면 모두 웃겠지만, 생각해 보면 밥 먹을 줄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과식하지 않도록 먹어야 밥 먹을 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 안에 밥통(위)은 하느님이 주신 도시락인데 우리가 다 쓸 때까지 상하지 않도록 잘 쓰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지금 약국에 소화제가 약의 반을 차지하다시피 하는 것은 이 도시락을 함부로 쓰기 때문입니다. 회갑이 되도록 밥 먹을 줄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 옛날부터 겨울에는 한끼 빼고 두끼만 먹는 것이 내려오는 습관입니다. 일하는 이는 하루 두끼만 먹으면 됩니다. 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먹어야 합니다. 나는 밥 한 그릇을 찬 없이도 곧 잘 먹습니다."

류영모는 1941년 2월 17일부터 하루 한끼를 먹기 시작했다. 1962년은 일식(一食)을 한 지 20년이 넘어가는 때였다. 그런데도 '내가 아직 밥 먹을 줄 모른다'고 말을 한 것이다. 즉 소식(小食)의 투철한 실천이 모자라다고 여긴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했을까.

색욕보다 식욕이 더 질기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링거를 빼고 식사를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루 한끼씩 먹는 재미를 알고 있는데 불교에서 모르니 우습지요. 살기 위해 한끼씩 먹는데 참 좋은 거예요. 나는 먹는 데는 급하지 않는 사람이야." 병원에서도 그는 한끼만 먹겠다고 했고, 의사들이 그것을 말렸다. 원기회복을 위해서는 병원에서 주는 식사를 다 먹어야 하고 완전히 몸이 돌아오면 그때부터 일식을 하라고 권했다. 퇴원한 뒤 그는 입맛이 돌아오지 않아 팥죽과 고구마로 연명을 했다. 그때 그는 죽을 때 몸 속에 음식이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말을 했다. 몸을 비운 채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그는 격렬할 만큼 강한 식욕이 돌아오는 때를 겪었을 것이다. 비어있는 육신을 채우려는, 몸의 메시지들을 느끼며 식욕이 얼마나 무섭고 강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식욕에 휘둘리지 않고 절제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짐승이 되지 않고 '사람답게 밥 먹을 줄 아는 일'이라는 진실을 대면한 것이다. 탐진치 중에서 왜 식욕에 해당하는 탐(貪)이 맨 앞에 있는지를, YMCA 강의에서 치열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설명했다.

몸성히, 말놓이, 뜻태우의 실천론

류영모는 탐진치를 극복하는 실천을 '살림'이라고 표현했다. 육체는, 살림을 끌어내려 '죽임'으로 치닫게 하는 뿌리깊은 수성(獸性)으로 유혹하지만, 인간은 수행을 통해 하늘로 나아가는 '살림'을 할 수 있다. 그것을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라는 우리말 표현으로 요약했다. 그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자.

"몸성히를 위해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자꾸 먹고 싶은 욕심을 경계하고 많이 먹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점심(點心)이라고 합니다. 석가는 대낮에 한번 먹었다고 해서 일중식(日中食) 혹은 24시간에 한번 먹는다고 해서 점심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루 한끼를 먹어보니 몸성히의 비결이 점심에 있습니다. 하루 한끼만 먹으면 온갖 병이 없어집니다. 모든 병은 입으로 들어갑니다. 감당 못할 음식을 너무 집어 넣기 때문에 병이 납니다."

"맘놓이를 가지려면 치정(癡情, 교접의 욕망)을 끊는 것입니다. 정조(貞操)라고 하지만 참으로 정조를 지키는 것은 아주 치정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석가의 출가는 맘놓이게 하는 가장 곧은 길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이는 것은 남녀관계입니다. 남녀관계를 끊으면 마음은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석가가 앉아 있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합니다. 석가가 언제나 곧이 곧장 앉아 있는 것도 치정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뜻태우는 지혜의 빛입니다. 광명(光明)이란 직관력을 의미합니다. 만물을 직관하여 볼 수 있는 힘입니다. 정신의 광명으로 만물을 비춰 보는 세계가 지혜의 세계입니다. 마치 등잔불을 계속 태워 만물을 비추듯이 뜻을 태워 지혜의 광명으로 세상만물을 비추게 합니다. 지혜의 빛을 사방에 비추는 것이 설법입니다. 정신의 광명을 흐리게 하는 것이 진에(瞋恚, 분노)입니다. 불만의 성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현이 머무는 세계는 성령이 충만하고 광명이 넘치는 얼의 세계입니다. 샘물이 차별 없이 만물을 살려 가듯이 성현의 지혜는 일체를 살려 내는 생명의 불입니다. 뜻을 태워(연소) 만인을 살리는데 성을 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탐욕(貪慾)을 버리고 치정(癡情)을 버리고 진에(瞋恚)를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만남의 동행자

1977년 봄 이후 류영모의 말수가 줄었다. 가족들과도 대화를 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해 6월 19일 아들 류자상에게 전병호(全炳浩)를 만나고 싶으니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는 독립문 근처의 영천동에 살고 있었다. 류영모는 전병호와 마주 앉아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한참 머물다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남대문 쪽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남대문 부근은 류영모가 태어난 곳이고 어린 시절 자랐던 곳이다.

87세의 류영모가 갑자기 만나고 싶어했던 전병호는 누구인가. 그는 류영모의 YMCA강좌에 자주 참석했던 제자다. 류영모는 1967년 광주 무등산 산양목장에 1년간 머문 적이 있다. 이때 그는 아예 구기동 집을 팔고 광주로 내려가 김정호와 이웃해서 살려고 했다. 류영모는 당시 제자 전병호에게 같이 광주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만큼 그를 각별한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이때의 이사 계획은, 부인 김효정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전병호는, 류영모와 제자 박영호 사이에서도 메신저로 등장한다. 1970년 4월 전병호가 박영호의 집으로 찾아왔다. 박영호는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류영모 강좌에서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찾아왔을 때까지 이름도 알지 못했고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다. 당시 박영호는, 5년전 류영모가 '단사(斷辭, 가르침을 거둠)'를 선언한 뒤로 결별하여 스승과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전병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석 선생님이 박영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으니 수고스럽지만 찾아서 근황을 알아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몹시 궁금해 하니 한번 찾아뵙는 게 좋겠습니다." 박영호는, 이 말을 전해듣고 과연 스승 앞에 나아갈 만큼 갖춘 게 있는지 고민을 하다가 그해 추석인 10월 3일에 스승을 찾아간다.

1967년과 1977년 사이, 류영모가 그나마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지냈던 사람이 전병호였던 것 같다. 광주에 함께 내려가 살자고 할 만큼, 마음을 터놓았던 사람이었지만 사상적으로 서로 교유했던 흔적은 없다. 류영모가 불쑥 그를 찾아간 까닭은 무슨 제안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10년 전 광주에 가자고 했던 때처럼, 스스로의 중대한 여정(旅程)(사실은 죽음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안주(安住)해온 세속의 속박을 떨치고, 신을 찾아 나서는 길에 그가 동행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고 인사만 하고 돌아나왔다. 다만, 그의 삶이 출발한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의 지점을 둘러본 뒤,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을 향한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시작해도 시작하지 않은 하나, 끝이 나도 끝나지 않은 하나라는 일시무시일과 일종무종일은 천부경의 앞뒤에 나오는 말이다.)
 

[관봉에서 본 북한산 비봉[김석환 그림]]



나 어디 좀 간다

전병호를 만난 이튿날인 1977년 6월 20일. 류영모는 혼자서 아침부터 집 근처에 있는 매바위 안골에 들어가 온종일 기도를 한다. 그 다음날인 21일은 하지(夏至)날이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그는 한복에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고 집을 나섰다. "나 어디 좀 간다."

이를 본 가족이 걱정을 했다. "아버님, 혼자 나가시면 길을 잃을지 모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해주시면 모시고 가겠습니다." 류영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며느리(유윤용)가 나서서 손수건에 싼 돈을 쥐여 주었다. 그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 뒤로 하루 종일 류영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가족은 문간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밤을 샜다. 이튿날 가족이 흩어져 류영모가 갈 만한 곳을 찾아 다녔으나 헛수고였다. 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했다. 22일과 23일 하루 종일, 아무 소식도 없었다.

밤 10시30분쯤에 성북경찰서 방범대원이 찾아왔다. 경찰서 관할인 북악산에 한 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주민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방범대원은 인상착의가 가출 신고를 한 분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자정이 지날 무렵, 성북경찰서 순경이 의식을 잃은 류영모를 업고 집으로 들어왔다. 움직이지 않았으나 심장은 뛰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하지의 햇살 아래 탄 듯 새빨갛게 그을린 얼굴은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었고, 옷에는 이런저런 때가 묻어 의복이 꾀죄죄해졌다. 주머니 속엔 떠날 때 챙겨주었던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집에 누워 안정을 취한 뒤 사흘이 지나서야 의식이 돌아왔다. 열흘쯤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겨우 걸을 만해지자 류영모는 또다시 집을 나갔다. 가족이 멀리서 그 뒤를 따랐다. 구기동 변전소까지 이르렀을 때 체력이 다시 고갈되었는지 주저앉았다. 가족들은 그를 업고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두번을 더, 그는 가출했다. 그는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집을 떠나려 했으며 대체 어디로 가려한 것일까.
 

[제자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그눠 제게 듬이

이런 일이 있은 직후인 7월에 박영호는 류영모 실종사건을 알게 됐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열흘 쯤 지난 때였다. 박영호가 물었다.

"선생님, 이번에 어떤 생각으로 집을 나가셨습니까."
류영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며 이렇게 말했다.
"나, 전과 같아요."
그때 부인 김효정이 물었다.
"무엇이 같아요?"
"똑같은 만큼 같지요."
선문답 같은 대화였다.
박영호가 집에서 나올 때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자주 올 생각 말아요. 바쁠 터인데 이길 저길 갈릴 때나 오면 되지 그 전에는 안 와봐도 그저그저 짐작이 가는 것 아니오. 잘 가시오."

류영모가 '전과 같아요' '똑같은 만큼 같지요'라고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나선 길은, 평소의 생각을 실천한 것이며, 특별한 결행이 아니며 지금에 와서 달라진 일도 아니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목숨은 한 번은 끊어져야 다시 이어집니다. 말씀은 깨끗, 그러니까 끝까지 깨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내 속에 벌써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죽지 않는 생명이기에 몸은 아무 때나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기 위해, 류영모는 옷을 깨끗이 차려 입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신은 그를 부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류영모는 다만 '그눠 제게 듬이'를 마음속으로 외고 있었다.
"'그눠 제게 듬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기도입니다. 그눠는 마르(乾)다는 뜻입니다. 제게는 하늘나라입니다. 듬은 죽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눠 제게 듬이'.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눠 제게 듬이.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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