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은 저서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2020년)를 통해 진보의 위선을 아프게 들춰낸다. 그중 한 대목인 ‘진보는 왜 보수보다 뻔뻔해졌나’를 보자. “과거의 386들은 어느덧 586이 돼 사회의 주류로 똬리를 틀었다.…반미전사는 아들을 철천지원수 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의장님’의 딸도 미제의 대학에 다닌다.… 과거에는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이 그래도 머리 숙여 사과는 했다.… 문재인 정권 사람들은 다르다. 윤리기준 자체를 바꿔버림으로써 자신들은 하나도 잘못이 없는 대안세계를 만들어낸다.”
추미애와 윤석열의 대립을 ‘원칙이성’과 ‘기회이성’의 충돌로 설명하기도 한다. 진중권에 따르면 원칙이성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 기준을 갖고 있지만, 기회이성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성이다. 그는 민주당이 친문 완장파의 기회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개혁 한다면서 위성정당 만들고, 검찰총장이 정작 ‘산 권력에’ 칼을 대려니까 수사를 방해하고…장관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공소장까지 비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와 공정의 확립된 기준이 도처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거다.
진중권의 냉소와 권력욕
이 모든 게 권력에 대한 집착 탓이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는 생각이 거듭된 자충수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power)은 난해한 말이나 대체로 ‘A가 원하는 일을 B에게 강제할 수 있는 힘(영향력)’으로 정의된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고전적 명저 <권력>(power)에서 “사회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변화를 강력히 바라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권력욕(love of power)은, 그럼으로써 중요해진 그들의 특성”이라고 했다. 적폐 청산을 외치며 한국사회의 주류세력을 교체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물론 권력욕을 한 개인이 성장과정에서 겪은 개인적 좌절과 박탈감의 결과(사회화)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미국의 정치심리학자 롤로 메이(Rollo may 1909~1994)는 권력을 △착취적 권력 △조작적 권력 △경쟁적 권력 △자양적 권력 △통합적 권력으로 나눈다. 착취적 권력은 누군가를 착취하는 권력이고, 조작적 권력은 조건을 조작함으로써 지배하는 권력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통합적 권력이다. 이 권력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권력이다. 메이는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의 비폭력도 통합적 권력의 한 예로 본다. 그에 따르면 “간디는 영국인의 정(正)명제에 대항하는 반(反)명제로서 영국인들이 새로운 종합명제(합‧合)를 향해 움직이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강요한 그 힘이 권력, 곧 통합적 권력이다. ‘합’의 명제는 물론 인도의 독립이고. 당시 곤혹스러웠을 영국에 대해 메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하면 자기의 고통을 건설적 용도로 바꿀 수 있는지 아는 이 작은 갈색 피부의 남성(간디)을 다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대영제국 전체가 삐걱거리고 신음했다.”(<권력과 거짓순수> 2013년) 실로 멋진 권력이다.
‘절반의 공화국’을 장기화?
한국사회의 진보, 좁게는 이 정권의 586 신주류가 완성하고자 하는 권력은 어떤 권력일까. 아무래도 ‘통합적 권력’인 것 같지는 않다. 러셀의 말처럼 사회를 바꾸고자 하기에 그들의 권력욕(love of power)은 누구보다 강하다. 그러나 그런 권력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생각이 우선 없고, 권력을 통해 달성코자 하는 미래 비전에 대한 확신도 없어 보인다. 간디처럼 ‘자신의 고통을 건설적 용도로 바꿀 수 있는’ 경지까지야 어디 바라겠는가마는, 적어도 그 사납고 맹렬한 권력욕의 끝이 어딘지는 국민이 알아야 할 텐데도 말이다.
혹여 그들의 권력욕이 ‘절반의 공화국’을 장기화하는 걸로 귀결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20년은 집권해야 한다고 하니 더 그렇다. ‘편 가르기’로 작동하는 권력은 한낱 사욕(私慾)에 불과해서 통합은커녕 온갖 비리와 추문의 원천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코미디 같은 싸움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밀리면 다 죽는다’로 요약되는 권력에 대한 피해 망상적 집착이 사안을 실제 이상으로 격화시켰다. 단언컨대 앞으로 크고 작은 모든 다툼은 적어도 2022년 3월 대선 때까지는 추(秋)-윤(尹) 대결과 똑같은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선한 권력의지는 간데없고 이기적이고 파당적인 깃발만 나부끼는 형국이다. 집권 3년 반을 넘긴 586 신주류는 지금쯤 롤로 메이의 표현을 빌리면 적폐(積弊)의 반(反)명제로 우뚝 서서 합(合)의 명제-정‧반‧합의 명제, 통합-로 나아가고 있어야 옳다. 과연 그러한가. 글쎄다. 보수 기득권세력들이 발목을 잡아서 안 된다고?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공정과 정의라는 이념의 외투를 입긴 하지만 현실 권력정치는 다르다고? 그게 속마음이라면 진보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신폐(新弊)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선출된 권력론’의 허구와 오만
요즘 민주당 의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선출된 권력론’도 오도된 권력욕의 연장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선출된 권력’에 의해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들의 눈에는 통제만 보이고 상호 견제와 균형은 안 보이는 듯하다. 그런 인식은 추-윤 싸움으로 집약되는 검찰개혁 문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에겐 윤 총장이 추 장관과 같은 ‘높이’에서 다투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어디 감히…”인 것이다.
지난달 국회 국토교통위 회의(6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국토교통부장관이 민주당의 ‘가덕도 신공항 검증용역 예산 20억 증액’ 요구를 거절하자 민주당 의원들이 크게 반발했다. 고위당직자는 격분해서 “X자식, 들어오라고 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선출된 권력’이 통제해야 한다는 허구적, 위압적 심리의 폭발이다.
그러나 ‘선출된 권력’이 권력체계의 구조적 정점에 있는 것도 아니고,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게 돼 있지도 않다. 현대 민주주의는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과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3권 분립의 원칙부터가 그렇고. 그 기초 위에서 우리의 헌법체계가 5부로 돼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행정부, 입법부, 대법원, 헌법재판소, 선관위 5부가 각자 중립성과 독립성을 갖고 견제와 균형을 통해 일하도록 돼 있다. 5부 중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됐다는 이유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힘 있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면 헌법교과서를 제대로 읽은 게 아니다.
우문 같지만 ‘선출된 권력’이 최고라면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에 관한 법적, 정치적 문제는 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법정)에서 최종 결정이 나는가. 이 정권 사람들이 부쩍 ‘선출된 권력’을 입에 올리는 것은 지난 4‧15 총선에서 과반이 넘는 압승을 거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혹여 권력의 존재감과 위력을 실감하고 즐기는 것은 아닐까. ‘선출된 권력’으로서의 자긍심과 그에 걸맞은 역할은 국민의 박수를 받을 일이지만, 이미 압도적 다수가 된 민주당이 ‘선출된 권력’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현대 민주주의는 치자(government)와 피치자(the governed)를 구분했던 대의제 간접민주주의에서 그 구분을 약화시키는 직접민주주의 쪽으로 가고 있는 추세다. 명색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민주주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선출된 권력’을 노래하고 있다.
권력?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라, 족하고 멈출 줄 알면 욕되거나 위태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