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토크쇼J '신문 1면의 민낯' 관련 인터뷰 풀텍스트 [임주현 KBS기자 인터뷰 = 이상국 아주경제 편집총괄 논설실장]
29일 저녁 10시40분 KBS 언론 관련 대담프로인 '저널리즘 토크쇼 J'는 <신문 1면의 민낯…무엇을 경계해야 하나>라는 타이틀로, 국내 언론들의 보도와 편집 문제를 다뤘다. 이 자리에 아주경제 이상국 논설실장 겸 편집총괄에디터의 발언이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됐다. 지난 25일 아주경제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풀텍스트로 정리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때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순안공항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지요. 그날 당연히 모든 신문들은 1면을 비워두고 남북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을 싣기 위해 저마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날 신문 지면은 똑같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접근이 어려운 남북 정상회담 같은 경우는 풀(pool) 기자단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신문사들이 저마다 각각 취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로 뽑힌 기자가 취재해서 기사와 사진을 공급합니다. 그러니 모든 신문사가 받아보는 기사의 내용과 사진이 똑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편집기자는 이 기사와 사진들을 가지고 다른 신문과는 다른 지면을 만들어야 하는 쉽지않은 미션을 가지게 되는 거죠. 당시 저는 1면 편집팀장이었습니다. 사진부장은 제게 사진 두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사는 세 꼭지라고 전달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오늘 1면에 아예 기사를 빼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편집부장님이 깜짝 놀라는 눈이었습니다. 오늘같이 기사가 중요한 날, 기사를 1면에 쓰지 말자고 주장을 하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죠. 그때 TV에선 계속 북한 순안공항에서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이 거듭 나오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뉴스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대신, 사진을 대한민국에서 나오는 신문 중에 가장 크게 쓰자고 말을 했습니다. 편집부장님이 "그래, 한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사인펜으로 그린 지면 구성도(이것을 '편집 레이아웃'이라고 한다)를 들고 편집국장님의 데스크로 갔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국장님에게 편집부장님이 ‘이 친구 말을 믿어보자’고 했습니다. 주변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 국장님의 오케이를 받았습니다.
사진은 가로형태와 세로형태, 두 장이 왔는데 세로 사진에는 두 정상 중간에 인민군 병사 한 명이 끼어있었지요. 두 정상에게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데, 그 병사가 '노이즈'처럼 뉴스의 집중도를 갉아먹는 사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이런 경우는 가로 사진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광고까지 내린 1면 전면을 사진 한장으로 채우려면 세로를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사가 가운데 들어가 있는 '다소 불리한' 사진을 썼습니다. 당시 신문지면 전면에 사진 한장으로 채운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암스트롱 달 착륙 때에 미국 언론에서 그런 지면이 한번 나온 적이 있다는 것을, 그 이후에 들었습니다. 왜 그 산만한(병사가 들어가서) 사진을 쓰느냐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진부장, 왜 기사를 1면에 싣지 않으냐는 취재부장들을 다 설득해야 했죠. 그런 결과 제호와 사진, 그리고 사진설명이 몇 줄 들어간 1면 지면이 나왔습니다.
오후 6시에 초판 신문이 나왔습니다. 편집국에서 많은 기자들이 기사가 없는 신문을 보고 너무 놀랐는지 적막이 흘렀습니다. 그때 편집국장 데스크로 전화벨이 울렸죠. 국장님이 통화하는 소리가 고요한 편집국에 울려퍼졌습니다. 독자의 전화였습니다. 서울시청 앞을 지나며 신문을 사서 보는데 너무 놀랐다고 했습니다. 신문 1면이 너무 파격적이고 생생해서 감동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죠. "아, 그래요? 정말 감사합니다." 국장님이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편집국에선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제1호 독자로부터 인정받은 셈이었죠.
이 신문은 그날 평양으로 배달돼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도 보게 됐습니다. 전면이 두 사람의 사진으로 된 신문을 김정일 위원장이 한참 보고 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다가가 "특이하게 신문을 만들었네요, 나중에 남쪽 신문들을 추가로 좀 더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상황이 타전되면서, 그날 1면 지면은 '김정일도 놀라게 한 편집'이라고 이튿날 다시 기사가 되어 나갔습니다. 보통 지면 편집의 경우, 편집기자협회에서 상을 주는데 이건 기자협회에서 편집특종상 형식으로 상을 줬죠. 당시만 해도 1면은 텍스트로 말하는 지면이며, 신문에서 전하는 것의 주(主)는 텍스트라고만 생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며 전달하는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의미있는 것을 채택해서 집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아이디어가 있어서 파격적으로 하자고 해도 설득과정이 녹록치 않을 텐데, 1면 편집 과정에서 가장 큰 고충은 무엇인가.
편집은 미디어의 콘텐츠를 만드는 행위를 말합니다. 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관여하는 사람을 기자(記者)라고 부릅니다. 편집기자와 교열기자, 혹은 그래픽기자가 기자인 까닭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문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편집국입니다. 그걸 지휘하는 사람이 편집국장이죠. 신문은 편집국장의 그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편집국장 대행인 셈입니다. 특히 편집부는 편집국장의 제작대행입니다. 편집국장의 뜻을 따르는 것이죠. 그렇다고 편집국장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가장 잘 해줘야 편집국장이 빛이 나는 거죠.
전체적인 방향이나 전반적인 기사계획은 편집회의에서 결정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작하는 실무자들에게 미세조정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재량권이 주어집니다. 편집기자의 경우, 역량에 따라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다만 신문사의 논조가 있을 수 있고, 편집국장의 철학이나 스타일이 있으며 전체적인 방향과 방침이 있는데 그걸 깰 수 있냐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언론의 경우, 정치적 컬러나 이념적 논조가 강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신문사가 하나의 컬러와 논조를 날마다 같은 의견으로 내세우는 것은 언론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언론은 하나의 주장이나 의견이 아닌 여러 팩트와 의견을 싣는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의견을 실어 독자가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은 ‘이게 옳은 것이다’라고 내세우고 주입하는 듯한 진영논리가 심한 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옳은 것을 좋아합니다. 옳은 것이란 상식적인 것, 이성적인 것을 말합니다. 이성의 핵심은 비판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허용하는 언론이 제대로 된 언론이며 큰 언론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 전통이 남아있습니다. 여러 의견을 싣는 게 퀄리티 페이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된 의견을 지니더라도, 다른 의견들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실어서 독자들이 판단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신문사 편집국에서 스스로 어떤 의견에 줄을 서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도 그런 분위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좋진 않지만 언론사 어디에나 있는 현상입니다. 제가 있었던 신문사가 상대적으로 유연한 신문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1면 편집에 대해 의견을 냈을 때 다행히 어느 정도까지는 수용되는 편이었습니다. 실무자의 의견이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받아줬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경우처럼 브랜드 가치를 올려주는 일이 있고 나서는 신뢰도가 높아져 주장을 하기 더 쉬워졌던 것 같습니다.
- 방침과 다른 의견을 협의하는 과정이 순탄했다는 말씀?
제 생각엔 순탄한 적이 많았지만, 순탄하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견을 서로 밝히며 치열하게 논쟁하는 환경이 더 중요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 협의의 과정은 보통 편집회의에서 이뤄집니다. 어떤 기사가 더 의미가 있는지, 논리가 상식적인지, 사실관계가 밝혀져 있는지 등의 논란이 항상 있습니다. 편집회의에서 그런 논란이 조율돼서 나옵니다. 오히려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 피력이 덜 자유롭기에, 신문들이 일사불란하게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자유로우면 폭이 넓어질 수 있겠죠. 전에 있던 신문사에서는 일부러 이념적 가치관이나 소신이 상당히 다른 기자들을 키워서 곳곳에 넣어 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언론이 지닌 일종의 자신감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전체 신문 시장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신문이 거칠어지고 좁아진 것 같습니다. 논조나 사실을 높고 신경질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일이 많습니다.
- 연관해서, 우리 신문이 1면을 통해서 정파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시는지.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주 팩트를 강조합니다. 팩트 체크라는 말도 있는데, 이 말은 상당히 위험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팩트와 관점이 엄밀히 나눠질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관점이 팩트처럼 인식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달을 그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달의 모습만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지구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달의 한 면일 뿐입니다. 다른 관점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는 달이 평생 토끼가 방아찧는 무늬가 있는 그 면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그게 팩트의 전체는 아닙니다. 이걸 주의해야 합니다. 뭐가 관점이고, 뭐가 사실일까요. 사실은 정의롭고 안전하며 관점은 위험한 것일까요.
예를 들어 두 기자에게 서울역에서 서소문까지의 횡단보도 실태를 취재하러 보냈다고 합시다. 한 기자는 횡단보도가 많다고 기사를 써왔고 다른 기자는 적다고 썼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횡단보도가 많다는 기자는 자동차를 타고 취재를 했고, 적다는 기자는 도보로 다녔습니다. 자동차를 타면 횡단보도에서 서는 것이 성가시기에 횡단보도가 많다고 했고, 걸어서 가보면 횡단보도가 없어서 많이 걷게 되는 것이 불편하기에 횡단보다가 적다고 하는 것이죠. 입장이 바뀌면 똑같은 팩트라도 다르게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팩트를 볼 때 자기가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서 보도가 전혀 달라지는 겁니다.
다른 예로, 종군기자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종군기자야 말로 전장의 생생한 팩트를 취재하는 기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팩트를 취재할까요? 종군기자는 자기편을 중심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기편의 참상이나 용기를 부각하는 기사를 쓰게 됩니다. 적군에 대해선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관점을 지니게 됩니다. 종군기자는 절대 전쟁터의 중간에 있을 수 없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기 어렵습니다. 즉 관점에 따라 사실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영화, 이오지마 섬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관점과 팩트의 역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있던 섬을 미군이 점령하는 사실을 다룬 영화인데 한 편은 미군의 입장에서만, 다른 한 편은 일본군의 입장에서만 보여주는 영화이다. 미군의 입장을 보여주는 영화에서는, 일본군은 산 속에 숨은 채 얼굴도 안보이는 괴물처럼 등장합니다. 일본군의 입장을 보여주는 영화에서는 새까맣게 함대를 이끌고 섬으로 다가오는 미군이 괴물처럼 보입니다. 입장이 달라지면 묘사도, 가치도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 1면을 통해 드러나는 정파성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건데,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신문들이 1면을 통해 정파성을 드러내지 않냐고 하지만 ‘정파성’이라는 것이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정파성을 너무 옹호하는 것 같고... 우리가 정파성이 왜 이렇게 뚜렷하게 만들어졌냐면 전쟁이 있어서입니다. 아직 70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적개심이라던가 적대감, 혹은 적의(敵意)는 전쟁용어입니다. 전쟁을 치르고 난 후 100년은 적개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례들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 적개심이 한국 사회에서 정파성을 만드는 핵심적인 기반입니다. 진영은 다른 게 아니고 전쟁터의 양쪽 참호를 가리킵니다. 한국전쟁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식 해결방법을 써야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며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전쟁 적개심을 기반으로 해서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마음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과 공평하게 나눠서 잘 살아야한다는 마음으로 나뉜 것입니다. 그 중 잘 살아야 한다는 쪽이 독자가 많았습니다. 한겨레신문이 1988년에 만들어졌는데 그 이후 신문 지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보수 신문은 잘 사는 반면 반대쪽은 힘겹습니다. 왜냐면 보수 쪽은 큰 시장(市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파성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수 없으며, 정파성이 다른 신문들이 논란을 벌이는 것을 문제로 삼는 것은 너무 경직된 언론관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정파성이 이성과 상식 위에서 작동하며 공동체의 선(善)과 우리 미래를 위해 필요한 쪽으로 작동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정파성을 비판하는 것이, 때로는 권력이나 주류가 된 하나의 입장이 다른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 동원하는 '일방의 정의관(正義觀)'이었던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 신문에서 1면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
신문 1면은 독자를 처음 만나는 지면입니다. 신문 중에는 조간이 많습니다. 독자는 방금 일어나 생각이 뚜렷하지 않고 명료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렵고 복잡한 걸 주면 어떻게 될까요. 중학생 수준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쉽게,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약간의 선정성이 필요합니다. 선정성이란 감정을 부추기는 것을 말하죠. 야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을 붙잡는 것이 모두 선정적인 것입니다. 신문은 선정성과 공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관심 있어하고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을 배치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정성 전략입니다. 또 20세기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정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직 시장의 원리에서, 공정성이란 개념이 나왔습니다. 편파적인 것을 실으면 그 쪽 사람들밖에 보지 않기 때문에 공정한 것을 실어 양쪽 사람들이 다 보게 해야 많은 독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쉽게 읽고 매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걸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공정성과 선정성의 기묘한 자본주의적 결합입니다.
신문의 발전에 따라 1면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신문들과 똑같아졌죠. 그래서 1면을 뉴스의 쇼윈도처럼 만들어 '고객'을 유혹하는 경쟁을 하게 됩니다. 잠 덜 깬 독자들에게 어떤 배치로 매력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을 하고. 혹은 지면 내부에 어떤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는 암시를 풍기면서 신문의 콘텐츠를 '세일'하는 전략을 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사례로, 사진 하나만 가지고 구성한 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법이 오직 텍스트로 된 기사가 가장 강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 것입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끌어들일 수 있는 '의미있고 매력적인 콘텐츠'가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신문 편집에 관여하면서 저는, 1면의 의미를 많이 바꿔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꾼 것 중 하나가 제일 중요한 것이 콘텐츠만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면은 세일즈입니다. 진영논리나 이념의 논조 같은 것은 세일즈하는 핵심 상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그것을 구매하고 있는 시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영이나 이념의 신문이 채택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 진영이나 이념이 사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문제를 어떻게 비틀어 이 사회와 이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해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영을 진영의 관점으로 비판하고 이념을 이념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은, 공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비판되려면 상식과 이성이 자리하고 있는 '중심'의 개념이 필요합니다. 신문은 초기에 뉴스를 팔았습니다. 뉴스란 팩트였습니다. 살인사건이 나면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파는 것. 그러다 해석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북한과 관련된 기사들은 예민합니다. 그런 것에는 해석이 중요해집니다. 그 차이로 논조가 만들어집니다. 그것은 입장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위치의 좌표는 변하지 않습니다. 중간으로 잘 안 모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상식이라는 '중간'이 확보되는 것이 그런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1면은 상품으로서의 기능을 지닌 것입니다. 파는 것입니다. 어떻게 파느냐의 전략으로 어떤 컬러를 넣느냐는 것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 어떤 논문에서 1면 머리기사를 카테고리 별로 분석해보니까 정치, 정부, 행정 분야가 많이 실린다는 걸 발견해냈다. 굉장히 많은 기사들을 다루지만 이렇듯 한정된 것들만 주로 신문 1면에 오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핵심은 독자가 무엇에 관심이 많은지에 있습니다. 독자가 무엇에 반응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지의 경우 1면이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선동열이 1면에 나오면 올라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유명한 게이머를 써도 결코 올라가지 않더군요. 즉, 독자가 무엇을 좋아하냐에 따라 올리거나 내리는 걸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가 많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에 유난히 잘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국가 계도 차원에서 바꾸자고 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독자가 있기 때문에 그걸 파는 건데, 다른 걸 팔고자해도 팔리지 않는데 그걸 팔라고 강권하거나 팔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결국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합니다. 독자에게 영합하지 않아야 언론이 바로 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독자는 구독료를 내고 신문을 사가는 고객입니다. 독자를 가르쳐서 언론이 원하는 콘텐츠를 팔겠다는 생각 자체에 무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념을 파는 것에도 이유가 있고 경제를 파는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산업화 이후에 경제지들이 왜 이렇게 많이 생겼느냐. 시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의 마인드쉐어가 무엇을 차지하고 있는지가 1면에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 완전한 관심사나 핫이슈에서는 벗어나지만 가끔 나오는 파격적인 편집은 어떤 경위로 나왔고 주목을 받았을까.
신문이 보도를 하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재현 즉 리프리젠테이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신문은 제안, 즉 프레젠테이션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인터뷰기사는 사건이 아니라, 인터뷰 자체가 기획되어 만들어진 뉴스입니다. 심층취재도 언론의 선택과 집중에 의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주제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아내는 의미 때문에 보기도 합니다. 인간은 복잡합니다. 여러 사안에 대해서 신문은 열려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쓰기에는 도박성이 높고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잘 안하고 안주하는 것이죠. 요즘 검찰총장 얘기와 같은 뜨거운 주제들을 다루면, 비교적 독자들을 잡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안이한 선택들이 세상에 있는 다양성들을 배제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미국 언론을 호수 언론이라고 하고, 우리 언론을 도랑 언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랑언론이란, 먹이가 나타나면 물고기들이 전부 한 곳 한 방향으로 모이는 것을 말한다. 도랑은 좁고 먹이가 적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호수는 먹이가 사방에 있습니다. 각자 다른 먹이를 섭취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이상적인 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좁고 빠른 시장 자체의 강점도 있습니다.
- 의제설정, 담론 제시라는 언론의 역할에서 신문 1면이 지닌 힘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기존 신문이 흥했던 시절이 있고 지금은 모바일, 인터넷으로 옮겨왔는데 그 시절들을 따로 볼 수 도 있을 것 같다.
1면의 의제설정 기능은 신문의 모든 것입니다. 뒷면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뒷면은 1면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1면을 파는 게 중요합니다. 1면에 모든 것이 다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품성도 1면에 있고 논조도 1면에 있고 파워도 1면에 있습니다. 독자가 가서 바로 집는 것이 1면의 힘입니다. 맨 뒤에 칼럼이나 사설이 있지요? 뉴스기사는 앞에 쭉 가고 뒤에 칼럼이 붙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뉴스를 제시할 때는 잠에서 막 깨어난 독자의 뇌가 덜 돌아가기 때문에 스트레이트한 것만 보여주는 게 좋습니다. 글을 읽어가노라면 뇌 기능이 활성화 되는데 신문지면을 끝까지 읽으면 생각이나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집니다. 그래서 신문 페이지네이션은 뇌의 활동 프로그램에 따라서 만든 것입니다.
의제설정은, 원래는 신문에 없던 역할입니다. 원래는 뉴스만 쭉 실었죠. 어젠다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오래전 미국에서 어떤 마을을 이런 조사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은 어떤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다. 그 중요한 것을 10가지만 순서대로 배열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한달 동안 그 마을의 신문(당시 배달되는 신문이 하나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1면에 실렸던 기사와 내용 및 순서가 같았습니다. 신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신문이 인간이 세상을 읽는 굉장히 중요한 툴이고, 사람들의 머리 속에 세상을 구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죠. 그럼 어젠다를 넣어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젠다를 넣으려고 할까요? 권력자, 기업, 돈 있는 사람들, 스타가 어젠다 세터가 됩니다. 부정적인 것은 빼고 긍정적인 것은 넣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젠다 세팅의 경쟁이 생긴다. 판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죠. 신문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어젠다를 정하려 하고, 외부에선 자신들의 필요에 으해 어젠다에 개입하려고 합니다. 독자한테 ‘이것이 중요하다’고 넣는 것이 어젠다 세팅 즉 의제 설정입니다. 그런 걸 반복해서, 집중해서 넣는 것이 신문이 어젠다 세팅입니다. 미디어들이 중점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독자의 뇌리 속에 세상을 점령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도 언론의 권력이 거기서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모바일, 인터넷 등 디지털로 전환되며 시장이 많이 바뀌었는데, 이 상황에서도 신문 1면이 중요하게 여겨지나.
신문 1면의 개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제 독자는 거의 없다고 보고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 유통사에서 신문을 읽고 있죠. 거기서 신문 1면에 실리는 것들이 주요뉴스로 다뤄집니다. 같은 뉴스가 다른 장소에서 팔리고 있는 것이라 할까요. 시장이 바뀐 것입니다. 지금 시장은 10년, 20년 전에 신문 1면에 실리던 뉴스상품들을 가지고 온라인 혹은 모바일 유통사에 모아놓은 컬렉션에 들어가서 서로 경쟁하는 구조입니다. 옛날에는 신문사끼리 경쟁했다면 이제는 디지털 세상에 떠도는 제목들끼리 경쟁하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더 자극적이게 되고 제목들의 장난이 심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 시장이 바뀌고 있고 더 많이 바뀔텐데 뉴스소비자가 신문 1면을 볼 때, 이걸 염두에 두면 좋다고 추천해줄 부분이 있는지.
신문을 그냥 본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문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신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읽을 수 있어야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정보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인터넷 신문시장이 왜 이렇게 혼란스럽냐 하면, 독자들에게 신문을 읽는 힘을 키워주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해력, 독해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해를 못하고 피상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글의 의미와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것들이 만들어진 방식을 인식하고 읽어야 합니다. ‘뉴스에 나왔으니 옳다’가 아니라 ‘어떤 구조 속에서 이것들이 나왔다’는 식으로, 읽는 방식이 똑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독자를 어리석게 하고 휩쓸리게 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똑똑한 독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문을 아예 안 읽는 세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신문이 아니어도 재밌는 게 많은데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문을 읽는 것은 세상 소통의 구조를 이해하고 논의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인에게 유리한 것입니다. 종이로 나오든 디지털로 나오든 어떻든 뉴스시장은 더 커지고 진화하고 다양화할 것입니다. 정보 욕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세상을 더 많이, 정확하게 알게 되고 결국 워너가 됩니다. 거짓말, 과장, 호도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신문에 나왔어. 방송에 나왔어’가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봐야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의 신문만 읽으면 바보가 됩니다. 하나의 관점, 하나의 생각틀, 하나의 해석만을 읽으면, 그 신문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매체 2개를 비교하면서 봐야 합니다. 특히 같은 기사를 비교하면서 봐야 뉴스의 완전체를 볼 수 있고 핵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기사를 두 개의 신문사에서 읽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 관점으로 차이가 달라진 사례에 대해 소개해달라.
우선 광화문 집회 기사들입니다. 그 뒤에 서초동 집회 있었죠. 1면에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비교 분석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조중동을 비롯한 신문들은 사실상 광화문 집회를 크고 의미있게 보도했습니다. 1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초동 시위의 경우, 동아일보는 1면에 사진을 써서 보도했지만 조선과 중앙은 아예 1면에 쓰지 않았습니다. 이 신문들은 서초동 시위는 다루지 않고 야구 사진을 넣었습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서초동 사진을 부각해서 1면에 실었습니다. 광화문 시위는 1면에 쓰지 않았죠. 진영의 대결 같은 두 개의 시위를 다루는 신문들의 태도는, 한국 언론의 진영적 양극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 = 박하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