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해마다 2000여 편에 달하는 영화가 개봉한다. 물론 영화 기자라고 해도 이 영화들을 모두 챙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몇백 편의 영화를 관람하고 해당 작품이 스크린에 오르내리는 과정을 함께 한다. 매일매일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작품은 대사까지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어떤 작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마구잡이로 욱여넣다 보니 이런 불상사도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잔상'을 남긴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좋은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향이 있고 반대인 경우는 기준을 만들기도 한다. (관객들도 그렇겠지만, 기자들끼리도 '그 영화 어땠어?' 'OO보다 나아' 하는 식의 대화를 한다)
이러한 '잔상'은 아주 작은 단위부터 시작한다. 대사가 되기도 하고 시퀀스나 편집, 음악, 캐릭터 등등 어느 하나라도 인상 깊은 데가 있다면 '잔상'이 남는 거다. 극장을 나설 때 해당 영화의 어떤 점이라도 남는다면 그 영화는 제 몫을 해낸 셈이다. 그마저도 남기지 못하는 영화가 수두룩하다.
영화 '이웃사촌'(감독 이환경)은 여러모로 '잔상'은 확실히 남은 작품이다. 자의든 타의든 개봉 전부터 많은 '말'이 오갔고 온갖 이슈로 떠들썩했다. 주연 배우 오달수가 '미투' 논란 뒤 3년여 만에 공식 석상에 섰고, 영화도 크랭크인 3년여 만에 관객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로 또 다른 주연 배우인 정우에겐 스포트라이트가 비껴갔다. 나 역시도 영화를 보기 전엔 그를 잊었을 정도다. 하지만 극장을 나설 땐 아니었다. 모든 이슈를 지우고 온전히 정우만이 남았다.
영화는 독재 정권과 그에 맞선 항쟁의 기운이 가득한 1985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남다른 애국심을 자랑하는 국정원 요원 대권(정우 분)은 안기부 기획조정실 김 실장(김희원 분)의 눈에 들어 도청팀의 팀장을 맡게 된다. 그의 임무는 가택 연금된 정치인 의식(오달수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것.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이들이 늘자 정부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야당 대표인 의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대권은 담벼락 하나를 두고 그의 모든 일상을 엿들으며 의식을 비롯한 가족들을 철저히 감시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정권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모두 '빨갱이'라고 배워왔는데, 의식은 그의 생각처럼 야만적이지 않다. 그는 '이웃사촌' 대권을 살뜰히 챙기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대권은 의식의 삶을 엿보며 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이를 눈치챈 김 실장은 대권을 압박한다. 대권은 자신의 신념과 삶의 지반이 흔들리자 큰 혼란을 겪는다. 정부는 의식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대권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다.
2013년 개봉해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7번 방의 선물'의 이환경 감독이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그는 자신의 장기인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유자재로 매만지며 이야기를 힘차게 이끌어간다. 하지만 그의 전작이 그렇듯 영화 '이웃사촌' 역시 한국 영화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했다는 혹평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관객들이 부담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 흐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은 빼어나지만, 마무리는 여전히 부실하다. 영화 결말부는 특히 아쉽다. 의식과 대권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고 주변 인물로 코미디의 '맛'을 잘 살려놨으면서 결말부를 흐지부지, 얼렁뚱땅 넘겨버려 의문만 남게 한다. 정점을 앞두고 김이 팍 새버리는 느낌이다. 영화는 그럴싸한 엔딩으로 끝맺지만, 그 엔딩을 위해 많은 걸 생략한 것만 같다.
1985년 가택 연금당한 정치인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감독은 정치색을 띠는 걸 경계했고 의식이라는 인물을 다르게 구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나친 경계로 의식이라는 인물이 깊이감이나 입체적인 면모도 사라졌다. 대권의 눈으로 본 '대상'에 가까운 느낌이다. 오달수가 웃음기를 지우고 의식을 진중하게 표현하려고 했으나 그리 인상 깊지는 않다. 이슈를 지우더라도 의식이라는 인물이 관객들에게 '흔적'을 남길지는 미지수다.
내게 '잔상'을 남긴 정우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 '이웃사촌' 속 대권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 정우의 얼굴이 담겨있다. 누군가에게 정우의 연기력을 언급할 때면 영화 '바람' '재심'을 예로 드는데 앞으로는 '이웃사촌'도 함께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는 계산할 줄 모르고 제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토해내는 타입이다. 요령이 없다는 소리다. 인물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딱 그만큼의 감정을 보여준다. 스스로 인물에게 공감하고 체화하지 않으면 정우의 매력을 절반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요령 없는 정우의 연기를 좋아한다. 보태거나 덜어내는 법 없이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순수의 결정들을. 투박할지언정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는 감정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바람' 속 장례식장 신인데. 그 신은 언제 보아도 내 눈물 버튼이다.
영화 '이웃사촌'도 그러하다. 의식과 가까워질수록 신념과 삶이 흔들리고 엄청난 불안감과 괴로움을 느끼는 대권의 얼굴은 정말이지 진실하게 느껴진다. 그의 심리는 티끌 없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스크린 속 인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될 때의 카타르시스. 아마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법하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김 실장에게 붙잡혀 온 동생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또 다른 선택을 앞뒀을 때, 의식을 살리기 위해 통닭 봉투를 뒤집어쓸 때. 대권이 느끼는 감정들을 불순물 없이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다. 25일 개봉. 관람등급은 12세이며 러닝타임은 130분이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잔상'을 남긴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좋은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향이 있고 반대인 경우는 기준을 만들기도 한다. (관객들도 그렇겠지만, 기자들끼리도 '그 영화 어땠어?' 'OO보다 나아' 하는 식의 대화를 한다)
이러한 '잔상'은 아주 작은 단위부터 시작한다. 대사가 되기도 하고 시퀀스나 편집, 음악, 캐릭터 등등 어느 하나라도 인상 깊은 데가 있다면 '잔상'이 남는 거다. 극장을 나설 때 해당 영화의 어떤 점이라도 남는다면 그 영화는 제 몫을 해낸 셈이다. 그마저도 남기지 못하는 영화가 수두룩하다.
영화 '이웃사촌'(감독 이환경)은 여러모로 '잔상'은 확실히 남은 작품이다. 자의든 타의든 개봉 전부터 많은 '말'이 오갔고 온갖 이슈로 떠들썩했다. 주연 배우 오달수가 '미투' 논란 뒤 3년여 만에 공식 석상에 섰고, 영화도 크랭크인 3년여 만에 관객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로 또 다른 주연 배우인 정우에겐 스포트라이트가 비껴갔다. 나 역시도 영화를 보기 전엔 그를 잊었을 정도다. 하지만 극장을 나설 땐 아니었다. 모든 이슈를 지우고 온전히 정우만이 남았다.
영화는 독재 정권과 그에 맞선 항쟁의 기운이 가득한 1985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남다른 애국심을 자랑하는 국정원 요원 대권(정우 분)은 안기부 기획조정실 김 실장(김희원 분)의 눈에 들어 도청팀의 팀장을 맡게 된다. 그의 임무는 가택 연금된 정치인 의식(오달수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것.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이들이 늘자 정부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야당 대표인 의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대권은 담벼락 하나를 두고 그의 모든 일상을 엿들으며 의식을 비롯한 가족들을 철저히 감시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정권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모두 '빨갱이'라고 배워왔는데, 의식은 그의 생각처럼 야만적이지 않다. 그는 '이웃사촌' 대권을 살뜰히 챙기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대권은 의식의 삶을 엿보며 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이를 눈치챈 김 실장은 대권을 압박한다. 대권은 자신의 신념과 삶의 지반이 흔들리자 큰 혼란을 겪는다. 정부는 의식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대권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다.
2013년 개봉해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7번 방의 선물'의 이환경 감독이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그는 자신의 장기인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유자재로 매만지며 이야기를 힘차게 이끌어간다. 하지만 그의 전작이 그렇듯 영화 '이웃사촌' 역시 한국 영화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했다는 혹평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관객들이 부담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 흐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은 빼어나지만, 마무리는 여전히 부실하다. 영화 결말부는 특히 아쉽다. 의식과 대권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고 주변 인물로 코미디의 '맛'을 잘 살려놨으면서 결말부를 흐지부지, 얼렁뚱땅 넘겨버려 의문만 남게 한다. 정점을 앞두고 김이 팍 새버리는 느낌이다. 영화는 그럴싸한 엔딩으로 끝맺지만, 그 엔딩을 위해 많은 걸 생략한 것만 같다.
1985년 가택 연금당한 정치인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감독은 정치색을 띠는 걸 경계했고 의식이라는 인물을 다르게 구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나친 경계로 의식이라는 인물이 깊이감이나 입체적인 면모도 사라졌다. 대권의 눈으로 본 '대상'에 가까운 느낌이다. 오달수가 웃음기를 지우고 의식을 진중하게 표현하려고 했으나 그리 인상 깊지는 않다. 이슈를 지우더라도 의식이라는 인물이 관객들에게 '흔적'을 남길지는 미지수다.
내게 '잔상'을 남긴 정우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 '이웃사촌' 속 대권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 정우의 얼굴이 담겨있다. 누군가에게 정우의 연기력을 언급할 때면 영화 '바람' '재심'을 예로 드는데 앞으로는 '이웃사촌'도 함께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는 계산할 줄 모르고 제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토해내는 타입이다. 요령이 없다는 소리다. 인물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딱 그만큼의 감정을 보여준다. 스스로 인물에게 공감하고 체화하지 않으면 정우의 매력을 절반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요령 없는 정우의 연기를 좋아한다. 보태거나 덜어내는 법 없이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순수의 결정들을. 투박할지언정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는 감정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바람' 속 장례식장 신인데. 그 신은 언제 보아도 내 눈물 버튼이다.
영화 '이웃사촌'도 그러하다. 의식과 가까워질수록 신념과 삶이 흔들리고 엄청난 불안감과 괴로움을 느끼는 대권의 얼굴은 정말이지 진실하게 느껴진다. 그의 심리는 티끌 없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스크린 속 인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될 때의 카타르시스. 아마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법하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김 실장에게 붙잡혀 온 동생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또 다른 선택을 앞뒀을 때, 의식을 살리기 위해 통닭 봉투를 뒤집어쓸 때. 대권이 느끼는 감정들을 불순물 없이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다. 25일 개봉. 관람등급은 12세이며 러닝타임은 13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