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IPO)를 코앞에 뒀던 앤트그룹이 관치에 발목 잡혔다.
알리바바 창업자이자 앤트그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마윈(馬雲)과 중국 공산당 간의 질긴 악연이 재연된 모습이다.
◆백기투항 뒤 상장 재개 유력
지난 3일 밤 상하이 증권거래소가 5일로 예정된 앤트그룹의 커촹반(科創板ㆍ과학혁신판) 상장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294억 달러)를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의 IPO 성사를 기대하던 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중국 금융당국을 작심 비판한 마윈이 설화(舌禍)를 자초했다는 게 중론이다.
마윈은 지난달 24일 상하이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당국의 보수적인 정책과 국유은행의 '전당포식(기업신용 대신 담보·보증에 목을 메는) 영업'을 꼬집은 바 있다.
현장에서 이 말을 들은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과 이강(易綱) 인민은행장 등 최고위급 인사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결국 지난 2일 마윈과 징셴둥(井賢棟) 회장, 후샤오밍(胡曉明) 총재 등 앤트그룹 수뇌부가 당국에 끌려가 질타를 받는 '웨탄(約談·예약면담)'이 이뤄졌다.
상하이·홍콩 증권거래소도 이번 웨탄을 '상장 전 중대한 사항 발생'으로 규정하고 상장 유예 조치를 내렸다.
괘씸죄에 걸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했지만 상장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류쥔하이(劉俊海) 인민대 교수는 "성급한 상장보다 사안을 잘 해결한 뒤 안정적으로 상장하는게 기업 성장에 더 유리하다"며 "(거래소가) 상장 취소 대신 유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사측과도 계속 소통하겠다고 밝힌 만큼 일이 해결되면 진일보한 조치가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궁지에 몰린 앤트그룹은 즉각 사과 성명을 냈다. 앤트그룹은 "투자자들을 번거롭게 해 죄송하다"며 "감독·관리를 받아들여 시험을 통과하고 신뢰를 높일 것"이라고 사실상 백기 투항을 했다.
◆짝퉁논란·퇴임압박 등 잇단 흑역사
마윈이 처음으로 공산당의 눈 밖에 난 건 2014년 알리바바의 미국 나스닥 상장 전후다.
당국의 국내 상장 유도에도 마윈은 미국행을 택했고, 상장 직후 주가가 폭등하면서 뉴욕 증시 투자자들의 배만 불린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2015년 1월 국가공상행정관리총국(공상총국)이 '알리바바 때리기'에 나섰다. 알리바바의 정품 판매율이 37%에 불과하다는 폭로에 주가가 폭락하고 집단소송 움직임까지 일었다.
사태 초기 반박에 주력하던 알리바바는 곧 역부족을 깨달았고, 마윈이 직접 공상총국을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이후 앤트파이낸셜(현 앤트그룹)은 투자자 모집 때 연기금과 국유기업을 대거 포함시켜 떼돈을 벌게 해줬다.
한 중국 소식통은 "앤트파이낸셜 지분 헐값 매각은 마윈이 중국 지도부와 관련 당국에 보낸 유화 제스처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라고 전했다.
2018년 마윈은 "1년 뒤 퇴임하겠다"며 '예고 은퇴'를 선언했다. 여기에도 공산당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음모론이 떠돌았다.
마윈은 언론에 "내가 떠나고 싶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고 퇴임 압박설을 부인했지만, 얼마 뒤 연설에서는 "정부는 정부 할 일을 하고 기업은 기업 할 일을 해야 한다"며 해석 여지가 많은 언급을 하기도 했다.
그는 약속대로 지난해 9월 알리바바를 떠났다. 그리고 올해 실질적 지배권을 갖고 있는 앤트그룹의 IPO 이슈와 함께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초 앤트그룹은 미국 증시 진출을 노렸지만 상하이·홍콩 증시 동시 상장으로 선회했다.
앤트그룹의 중국 내 상장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야심작인 상하이 증시 커촹반의 인지도를 높이고 홍콩의 금융허브 위기설을 불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본 전략적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에도 마윈은 공산당에 허리를 굽히며 위기를 넘을 것이다. 중국에 '민간은 관료와 다투지 못한다(民不與官鬪)'는 말이 있다. 마윈은 "알리바바 상장 후 내 삶이 너무 피곤해졌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