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뷰] 이건희의 ‘일류’ 정신, K-배터리에 새겨야

2020-10-30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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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생전 한국 사회를 향해 던진 여러 직언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내로남불을 일삼는 정치와 수많은 규제로 가득한 행정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현실이 2020년 지금도 유효한 탓이다. 무엇보다 ‘이 정도면 됐다’라고 안주하는 일부 기업들은 고인의 일침을 뼛속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특히 ‘제2의 반도체’로 주목받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업계는 고인의 ‘일류’를 향한 집요한 도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주목받는 만큼 디테일, 즉 품질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전 세계 배터리 시장 규모는 2025년이면 연 18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150조원) 시장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규모다.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이 시장에서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LG화학은 올해 1~8월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1위를 차지, 24.6%의 점유율을 확보했다.

다만 LG화학은 최근 잇달아 발생한 현대차의 코나 전기차(코나 EV) 화재 사고 등 안전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대차가 대대적인 자발적 리콜(시정조치)에 돌입했지만, 배터리 공급사인 LG화학으로 칼날이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는 코나 EV의 리콜을 알리며 “고전압 배터리 셀 제조 불량으로 인한 화재 발생 가능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반면 LG화학은 “현대차와 공동으로 벌인 재연 실험에서도 화재로 이어지지 않아 분리막 손상으로 인한 배터리 셀 불량이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정면반박했다. 만약 화재의 직접 원인이 배터리 셀 결함으로 귀결된다면, LG화학의 세계 점유율 1위 명성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여기다 현대차로부터 대규모 리콜에 따른 손실에 대한 천문학적인 구상권 청구 부담마저 지게 된다. 비용을 차치하더라도 전기차 배터리는 소비자의 생명과 직결되기에 정부 당국의 철저한 원인 규명이 시급한 때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히 아쉬운 것이 바로 ‘동업자 정신’이다. LG화학의 이런 위기를 경쟁사인 SK이노베이션은 곧바로 홍보마케팅에 활용했다. 지난주 열린 국내 최대 이차전지 박람회인 ‘인터배터리 2020’에서다. SK이노베이션은 2009년 글로벌 첫 수주 이래 2010년부터 배터리를 공급한 이후 현재까지 에너지 저장장치(ESS), 전기차 등 어떤 수요처에서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코나 EV 화재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SK배터리가 LG에 비해 더 안전함을 에둘러 홍보한 것이다.

두 회사는 사실상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진행 중인 배터리 특허 기술 침해 관련 소송으로 소위 여론전을 벌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마다 자신들의 입장이 맞다면서 소송장 밖에서 ‘장외 공방’을 이어왔다. 인터배터리 2020에서도 양사의 전시 부스는 삼성SDI를 사이에 두고 배치해 극한의 대립 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건희 회장이 그렇게 경멸하던 ‘이류 기업’의 또 다른 면면을 보는 것 같다. 국내에서 아웅다웅 싸울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1988년 국내 최초로 휴대폰을 선보인 삼성은 당시 강자였던 모토로라의 점유율을 끌어내리기에 급급했다. 휴대폰을 찍어내기 바빠, 불량률은 한때 11.8%까지 치솟았다. 결국 삼성전자 대리점 사장이 분노한 고객으로부터 뺨을 얻어맞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런데도 삼성은 ‘양이 최고다’며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격노한 이 회장은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경북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그 유명한 ‘애니콜 화형식’을 지시했다. 운동장 한복판에 쌓인 15만대의 애니콜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판매가로 총 500억원어치를 태운 것이다. 이후 삼성은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하며 고가제품에 걸맞은 품질 개선과 기술 혁신에 매달렸다. 결국 ‘갤럭시’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유일하게 아이폰과 경쟁하는 메가 브랜드로 성장했다.

K-배터리도 애니콜의 과오를 거울 삼아 점유율에 급급하기보다 품질 혁신에 매진할 때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국내 기업끼리 소송 공방도 이쯤에서 자중해야 한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예고한 LG 대 SK 간 배터리 소송 최종선고가 벌써 두 차례나 미뤄졌다. 그 결과가 양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간에, 세계 일류가 되겠다는 K-배터리의 품격은 장외 설전이 아닌 오직 뛰어난 기술로만 증명하면 될 일이다.
 

1995년 삼성 애니콜 15만대 화형식[사진=삼성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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