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회장은 이날 추도사를 통해 "병상에서 일어나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만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황망히 떠나 슬픔과 충격을 주체할 길이 없다"며 "대한민국 경제계의 큰 어른으로서 우리 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고, 사회의 아픈 곳을 보듬어 주시던 회장님이셨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또 허 회장은 "그는 우리나라에서 전자제품을 가장 많이 구입하고 분해했을 정도로 무수한 전자기기를 다뤄 일찍이 반도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며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살 길은 바로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 산업이라는 확신을 얻고 사업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인은 불확실성이 크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사업이기에 그룹 차원의 추진이 어렵게 되자, 직접 사재를 털어 작은 반도체 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추진했다"며 "반도체를 향한 이 회장의 열정과 노력은 마침내 1983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진출이라는 결실을 맺었다"고 덧붙였다.
허 회장은 "1993년 초 이 회장은 반도체 집적회로를 만드는 웨이퍼의 크기를 6인치에서 8인치로 키워 양산하라고 지시했다"며 "실패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돼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이 회장은 성공하면 생산량을 2배로 늘릴 수 있다며 세계 1위가 되기 위해 과감한 투자로 월반하자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일본의 경쟁사와 16메가 D램을 동시에 개발했지만 8인치 웨이퍼의 막강한 생산량을 바탕으로 일본을 따돌리고, 마침내 1993년 10월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로 우뚝 서게 됐다는 설명이다.
허 회장은 고인을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외치던 개혁가'라고도 평가했다. 허 회장은 "이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했다"며 "국제화 시대에서는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가 된다고 하며, 장장 68일 동안 1800명의 임직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고 언급했다.
이어 "미래를 향한 뚝심 있는 전진은 연구개발, 우수인재 발굴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고스란히 이어졌으며, 이는 기술도 자원도 없는 한반도에 4차산업 혁명을 선도하는 세계 1위의 반도체, 휴대폰, 디스플레이, 2차 전지 같은 첨단산업을 일군 밑거름이 됐다"고 덧붙였다.
허 회장은 고인의 '인재 사랑 정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이 회장은 우리 경제가 살길은 인재양성밖에 없다고 하며, 장학재단을 만들어 '한국을 위해 일한다'는 단 한 가지 조건을 약속받고 해외유학생들을 선발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허 회장은 "이 회장이 걸었던 길은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초일류기업을 넘어 초일류국가를 향한 쉼 없는 여정이었다"며 "저희 후배들은 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큰 뜻을 소중히 이어받아 일등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