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8월 예금은행의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15.5회를 기록했다. 이는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85년 1월 이래 가장 낮은 회전율이다.
회전율이 낮다는 건 가계나 기업이 돈을 꺼내 쓰지 않고 은행에 예치한 채로 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요구불예금은 투자처가 있으면 바로 쓸 수 있는 단기 부동자금으로 분류되는 만큼, 경제주체들이 투자보다는 일단 넣어두기로 결정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8월 국내은행의 요구불 및 수시입출식 예금도 전월보다 14조1930억원(1.8%)이나 증가했다. 수시입출식 예금은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한 시중자금의 대기처 성격이 강하다. 그만큼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됐다는 뜻이다.
문제는 풀린 돈이 실물경제로까지 흘러가진 못했다는 점이다. 시중에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인 ‘통화유통속도’는 2분기 0.63으로 사상 최저치 기록했다. 또 다른 지표인 8월 통화승수도 14.77배로 역대 최저치에 머물렀다. 올 초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내에서 돈이 시중에 도는 속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16개국 중 가장 빠르게 떨어졌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이 역대급으로 돈이 풀지만, 자산 축적에만 쏠리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데 반해,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 과열을 불러일으키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의견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은의 유동성 공급 방식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과거 필요한 곳에 정확히 돈을 공급하던 방식에 비해 실효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뜻이다.
현 상황에서 풀린 돈을 생산성이 있는 곳으로 유도하는 건 쉽지 않다. 향후 실물경제와 자산가격 괴리가 더 커져 ‘유동성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단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각에선 은행의 대출 목적을 좀 더 세부적으로 관리해 생산성이 있는 곳에 돈을 공급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김경수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시중에 풀린 유동성이 적정한 곳에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관리감독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대출을 진행한 뒤, 사후감독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지속적 저물가) 악화에 대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중에 돈이 느리게 돌아 경제 활력이 약화되고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도 함께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미 형성됐다는 의견이다. 한은은 우리나라의 올해 성장률이 -1.3%로 외환위기 때인 1998년(-5.1%) 후 최악을 나타낼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