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황이 모처럼 좋아요. 이런 때를 해운산업의 신성장·선진화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국내 한 해운전문기업 임원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선전하고 있는 현재를 ‘재도약의 기회’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야말로 부활의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간 미약했던 금융지원책의 파이를 키우는 한편 정부가 공들여온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이와 동시에 해운기업들이 선주를 고집하기보다는 제도 변화를 꾀해 과감한 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의 금융지원-정책변화-제도개선 삼박자가 어우러질 때 해운산업의 신성장이 가능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모처럼 살아난 해운업황...활짝 웃지 못하는 이유
1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컨테이너선 운임지수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달 30일 기준 1443.54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9주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SCFI는 중국 상하이에서 출항하는 컨테이너선 노선의 단기 운임을 지수화한 것으로 1300선을 넘은 것은 2012년 이후 8년 만이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지난 4월 말(818포인트) 대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미국 항로 운임은 7~8월 두달간 전년 동기 대비 72.6% 급등했다. 여기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선박 운항 비용절감 효과까지 겹치면서 시장에서는 하반기에도 해운사들의 실적 호조는 이어질 전망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업계는 언제든 다시 물동량이 급감할 수도 있는 만큼 장기적인 차원에서 근본적인 금융 및 정책,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일부 화주(무역기업)들은 급등하는 운임비 인하를 정부와 관련 협회 등에 요구하면서 선주사와 갈등이 증폭되는 점만 봐도, 해운업의 위기는 또다시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다.
◆정부, 금융 및 정책 지원...다변화 시급
업계는 정부가 ‘해운재건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밝힌 해운업 지원책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잖다. 물론 HMM(현대상선의 새이름)에 대한 과감한 지원은 여러 긍정적 효과를 불러왔다. 특히 국내 화주들이 그간 해외 선사에 의존하면서 커졌던 운임부담을 덜 수 있는 한편 국내 조선 3사의 수주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지난달 출항한 HMM의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12척은 모두 만선을 기록, ‘해운 강국’의 자존심을 되살리고 있다는 평가도 크다.
하지만 정책금융은 여전히 특정기업에 한정되는 데다, 정부의 금융지원만으로는 국내 해운산업의 투자 규모를 키우기에 역부족이란 주장도 거세다. 실제로 산업은행 등 국책금융기관이 선박금융 90% 이상의 돈줄을 쥐고 있다. 유독 해운업을 상대로 한 민간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금 회수가 십수년이 걸리는 데 따른 부담이 가장 크다. 이를 해소하려면 정부가 일종의 시드 머니(Seed money)를 만들어 민간투자를 유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이미 중국은 정부 주도로 2009년 선박산업투자기금을 29억5000만 위안(약 5000억원) 규모로 조성했고, 잇달아 민간투자기업이 참여해 200억 위안(약 3조4000억원) 규모로 키워냈다. 일본도 2012년 일본선박투자촉진회사를 설립, 선주와 국책금융기관이 공동 기금을 마련했고 2012년 조선산업 호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자동해산 했다.
해운기업들은 지금 업황이 좋다지만, 영업이익률이 10% 미만으로 낮은 상황에서 보다 촘촘한 정책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해운재건 5개년 계획에 포함된 지원책도 특정선사나 정기선 운영사에 치중된 점이 한계라는 지적이다. 철강 및 전력기업 관련 부정기선(전용선) 사업을 주로 하는 한 해운기업 관계자는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가까이 장기계약이 이뤄지는 전용선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에 대한 혜택은 전무하다는 점이 아쉽다”면서 “정부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기업의 부채비율을 낮추면서 지속적인 투자를 유인할 수 있는 ‘선박은행’ 설립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변동성 큰 해운산업, 선주-운항 과감히 분리해야
다른 산업에 비해 업황 변화가 심한 해운산업은 각 기업의 신용도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투자를 꺼리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로 인해 그간 국내 선사들은 최근까지도 5% 이상의 고금리 금융이자를 감당해야 했다. 다만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국내 기준금리가 총 0.75%포인트 낮아지면서 다소 부담이 줄어들기는 했다.
이는 일본 해운사가 1%대의 저금리 금융이자를 부담하는 것과는 큰 차이다. 동일한 조건이라 해도 국내 해운사는 이자 비용으로 손해를 보는 반면 일본 해운사는 이자 비용 부담이 적어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
실제 2000년 이후 국내 해운산업은 '롤러코스터'로 표현될 만큼 호황과 불황의 격차가 컸다. 반면 일본 해운산업은 불황의 큰 그늘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를 두고 학계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선박 운영 포트폴리오 차이가 변동성의 격차를 키웠다고 분석한다.
국내 해운사는 모두 대규모 선주(船主)가 되길 원해 금융비용을 감당하고 선박을 늘려 파산 위험이 크다. 실제 국내 해운사는 2000년 중반 호황기에 선박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이후 불황이 닥치면서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진해운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일본 해운사는 무리하게 선주가 되기보다는 남의 선박을 빌려 운영하는 운항(運航) 사업 비중이 크다. 고려대 해상법연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지배 선대는 2496척에 이르는데 이 중 직접 운송하는 대신 운항사에 배를 빌려주는 선주가 보유한 배는 827척(33.1%)이다. 국내에서는 해당 비율을 따지기 무의미할 정도로 선주가 직접 운항을 하는 것과 큰 차이다.
일본 선주들은 선박 건조 이후 운항을 맡을 해운사에 10~20년씩 장기간 배를 빌려주며 용선료(傭船料)를 받을 수 있다. 불황이 와도 용선료가 급감하지 않기에 큰 타격을 피할 수 있다. 운항사 역시 선박 건조에 따른 금융비용 부담이 없어 불황이 오더라도 이를 이겨낼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선주가 되기 어려운 소형 해운사만 이 같은 운항 사업에 적극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3대 대형 해운사로 꼽히는 NYK, MOL, 케이라인 등은 다수의 선주사로부터 선박을 빌려 운항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대형 해운사란 이점을 활용해 다수의 선박을 빌리는 데 성공, 자체 선박 보유에 따른 리스크를 낮췄다.
국내 학계에서는 일본의 이 같은 선주·운항 분리 운영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운항사들이 자신이 소유한 선대를 절반, 선주로부터 용선한 선박으로 선대 절반을 구성하는 포트폴리오가 리스크 관리에 이상적”이라며 “같은 선주사-운항사 분리 운영 방안을 국내에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