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동영상 공유 앱 틱톡(TikTok) 영상이었다. 지난 6일 필리핀계 미국인이자 유명 인플루언서인 벨라 포치는 틱톡에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문신 사진을 올렸다. 포치는 다양한 문신을 새기고 춤추고 노래하는 동영상을 올려 인기가 높다. 틱톡에서만도 팔로어가 1700만명 이상이다. 이런 포치의 계정에 욱일기 연상 문양의 문신이 올라오자, 한국 네티즌들의 항의가 그야말로 포화처럼 쏟아졌다.
문제는 항의의 내용이다. 필리핀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까지 확대된 것이다. 필리핀인들에 대해 "가난하고 작고 못 배웠다", "무식하다", "속이 좁다", "못생겼다" 등 폄하하는 내용들이 올라왔다. 게다가 포치의 깊은 사과에도 불구하고 한국 네티즌들은 비난을 이어갔다.
이에 필리핀 네티즌들이 분노했다. "#한국, 사과하라(#ApologizeKorea)", “#한국, 취소하라(#CancelKorea)"는 해시태그들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반한(反韓) 정서가 급격히 고조됐다. 필리핀 네티즌 중에서는 "한국 드라마, K-팝의 팬이었는데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필리핀에서 한국 콘텐츠는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올해 방송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역시 필리핀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면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드라마 주인공인 배우 현빈과 손예진 등은 필리핀 최대 통신업체인 스마트(SMART)의 모델로 발탁되기도 했을 정도다. 한국 화장품은 물론이고 한국 가전의 인기도 매우 높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한국의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물론 이후 일부 한국 네티즌들이 '미안해요 필리핀(#SorryToFilipinos)' 캠페인으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양식 있는 한국인들이 인종차별적 발언들을 반성하고 나섰지만, 이번 사태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무엇보다 한국이 혐오발언의 가장 큰 피해국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은 2000년대 이후 일본이 쏟아내는 수많은 혐오 메시지로 고통받아야 했다. 일본에서 쏟아지는 혐한 서적에 한국인은 교활하며, 날조에 강하며, 무식하고, 교양이 없다는 내용들이 가득차 있다.
최근 공개된 일본 후지주택의 혐한 문서만 봐도 끔찍하다. 2013∼2015년 임원 또는 직원들에게 배포한 문서들에는 "자이니치(在日, 재일한국·조선인을 의미)는 죽어라",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며 사실 종군위안부는 급여가 높은 전시 매춘부일 뿐이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뿐인가. 유튜브에는 "한국의 교활함이나 비열함, 거짓말 행태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혐한 내용들이 버젓이 들어가 있다.
물론 일본에서 후지주택의 문서는 빙산의 일각이다. 이른바 넷우익으로 불리는 극우 인사들뿐만 아니라 일본 정치 내부에서도 혐한 발언들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자민당 소속의 참의원이자 외무성 부대신(차관) 출신의 사토 마사히사는 한 나라의 수장인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무례하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혐한'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을 대상으로 한 수출규제에 찬성하면서 더욱 수위가 높은 금융제재를 주장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공식적으로 물러나고 일본은 7년 8개월 만에 스가 요시히데 총리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한·일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감이 읽히지 않는다. 일본 내 혐한은 양국 관계 개선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끊임없는 혐오 피해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이번 필리핀의 '캔슬코리아' 사태는 더욱 아쉽다.
논어 속 공자는 제자에게 죽을 때까지 행해야 하는 덕목으로 '서(恕)'를 꼽았다. 바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이가 하도록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봐야 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강조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십년간 혐한에 시달렸던 우리의 분노를 필리핀이라는 거울에 한번 비춰보는 것은 어떨까?